〈 502화 〉 7. 질투는 나의 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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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륙을 강타한 몇몇 소식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암흑교단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수천 년의 침묵을 깨고 그 발톱을 드러낸 악신의 저력은 무시무시했고, 대륙 각국의 수뇌부에는 배신자들이 숨어 있었다.
심지어 마인과 악신의 권속이 연달아 등장하기까지.
이제 오랜 평화가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이들은 없었다.
델피렘이 이끄는 암흑교단이 돌아왔다. 그리고 이는 인류의 운명을 건 전쟁이 임박했다는 뜻이었다.
민초들의 낯에 그림자가 드리울 수밖에 없는 결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란이 최소한에 그친 까닭은, 난세가 영웅을 부른 덕이었다.
‘이안 페르쿠스’를 필두로 한 ‘샛별’들.
그들의 활약은 희망을 원하는 민중들의 소망과 결합하여 부풀려지고 다듬어졌다. 다소 낯부끄러운 찬사조차 이들에 한해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칭송에 불과할 정도였다.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영웅담이 바로 ‘산상법정(山上??)’이었다.
무고한 연인을 구하기 위한 기사의 혈투는 서사시의 단골 소재였다. 더불어 일격에 산을 부순다는 성자의 강함과, 몸소 천신의 존재를 증명한 성녀의 이야기는 많은 교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악신과 맞서 싸운 영웅이 우리를 지킨다.
천신께서는 아직 인류를 버리지 않으셨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얼마나 커다란 위안이 되는지는, 굳이 논할 필요도 없었다.
대륙의 호사가들은 한동안 산상법정이 유일한 대화 주제가 되리라 단언했다. 통상적이라면 몇 년 동안이나 회자될 만한 대사건이었으니까.
실제로 시중에는 이안과 성녀의 후일담을 상상 속에서 다루는 창작물이 나돌던 참이었다.
하지만 거침 없이 흐르기 시작한 시대의 물길은 더는 멈추지 않는다.
또 하나의 풍문이 전해지자, 대륙은 소란을 넘어 정적에 빠지고 말았다.
온 대륙의 눈이 어느 인물의 행보 하나하나를 집중되어 있었다. 무수히 많은 명사 사이에서도, 이만한 영향력을 지닐 수 있는 자는 손에 꼽을 만했다.
존재 하나가 일국의 존망을 결정 짓는다는 절대자들.
단 셋밖에 없는 마스터 중 하나가, 그 무거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늘따라 날이 따사롭구나.”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던진 한 마디였다.
무료한 음색이 여인의 심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1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소녀였는데, 곰방대를 피우는 폼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별빛을 빼다 박은 듯 영롱한 녹빛 눈동자는 거뭇한 피로에 물들어 있었다. 심지어는 그 걸음걸이조차 느긋하기만 해서, 도저히 외양과 행동거지가 일치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최소한 어린아이가 보일 양태는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에 통달한 염세주의자의 느낌을 물씬 풍긴다고 할까.
소녀의 주위에는 수십이나 되는 인원이 몰려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소녀의 혼잣말에 답하는 이들은 없었다.
하나 같이 품위 있는 복식을 갖춘 자들이었다. 고귀한 태생임이 분명함에도, 감히 소녀에게 말을 붙이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 소녀의 진정한 정체는 신분 따위를 들이댈 만한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남부 열왕국의 대마녀.
대륙에 단 셋밖에 없는 마스터이자, 남부 열왕국의 대모라 불리는 여인이었다.
“날이 따사롭다니… 제정신입니까. 어르신? 제국은 이 이상기후로 난리가 났는데!”
물론 개중에도 대마녀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인물은 하나쯤 포함되어 있었다.
투덜거리며 핀잔을 주는 중년의 사내는 머리가 희끗했다. 건장한 체격으로 보나, 모로 보나 대마녀보다 연상으로 보이는 검객이었다.
하지만 그는 꼬박꼬박 대마녀에게 존칭을 쓰고 있었다.
제국의 검공.
그 또한 마스터에 이른 강자였으나, 연장자를 향한 예우 정도는 지킬 줄 알았다.
대마녀와 검공 사이에는 무려 수백 년에 이르는 세월의 격차가 있었다. 한때 제국의 미친개로 불렸던 검공이라도 예의를 차리지 않을 수 없는 연령 차였다.
정작 대마녀는 그 후대를 반기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말이다.
“흥, ‘어르신’이라니… 여전히 입만 살았구나. 네놈이 천방지축 날뛰면서 온 대륙을 들쑤시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수십 년 전 일 아닙니까…….”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선해. 검 한 자루만 들고 대수림까지 찾아왔길래, 얼마나 대단한 걸 바라나 했지. 그런데 한 판 붙어 보자나? 하, 주제도 모르고.”
끄응, 하고 검공은 팔짱을 낀 채 신음을 흘렸다.
말은 수십 년 전이라 했지만, 그 또한 그날의 기억이 선명히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그 수상한 기류를 감지한 인물은 검공의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노인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어허.”
검공은 노인의 의문에 살짝 음색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대마녀도, 노인도 이를 신경 쓰는 기색은 아니었다. 도리어 대마녀는 재미 있다는 듯 옅은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당연히 만신창이가 돼서 쫓겨났지. 아무리 내가 대결계를 유지하는 중이라 해도, 마스터도 아닌 꼬맹이한테 당하겠느냐?”
“하하하! 숙부께서도 그런 시절이 있었군요.”
검공은 다소 억울한 낯빛을 했으나, 이내 옅은 침음을 삼키며 두 손을 들었다.
항복이라는 뜻이었다.
이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행렬이 경직된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대화를 나눈 셋을 제외한 이들이 뻣뻣이 긴장한 걸음을 옮기고 있는 탓이었다.
그야 저 셋은 별세계의 인물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마녀에 검공, 심지어 그 안에서 막내를 맡고 있는 인물조차 제국의 황제였다.
누구라도 한 마디를 얹을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결국 다음 화두를 꺼낸 이 또한 검공이었다.
“……그래서, 무슨 바람이 분 겁니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검공이 던진 단 하나의 질문에, 수십이 되는 사람들이 숨을 죽이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정작 대마녀는 후, 하고 한 모금의 담배연기를 내뱉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무슨 소리냐?”
“느닷없이 대수림을 나선 까닭이 있을 것 아닙니까. 지난 수백 년 동안, 남부 열왕국에 대사건이 있을 때를 제외하면 한 번도 결계로부터 멀어진 적이 없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라.”
한없이 태연한 목소리로, 대마녀는 검공의 물음을 축약했다.
“그깟 결계쯤이야, 내가 자리를 비워도 몇 년 정도는 멀쩡해. 그보다는 제자를 뽑는 일이 더 중요하지.”
“’제자’라…….”
흐, 하고 헛웃음을 삼키며 검공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미 들은 적이 있던 사정이었다.
다만 검공이 진정 의문이었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러니까, 왜 뜬금없이 아카데미에서 제자를 뽑겠다는 거냐 묻고 있는 겁니다. 원래 대수림에 틀어박혀 오는 애들 적당히 낚아채지 않았습니까?”
“……흥, 내 맘이다.”
그러면서 대마녀는 베에, 하고 살짝 혀를 빼물었다.
두 눈까지 감고 검공을 도발하는 솜씨가 영락없이 어린 소녀를 닮아 있었다. 검공은 결국 이 늙은이가 또 나잇값을 못한다며 속으로 투덜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 화두를 던진 이는 황제였다.
“그 소문이 사실입니까?”
“무슨 소문? 제국 황가는 질문을 던질 때 반드시 생략법을 사용하라 교육이라도 받느냐?”
“새 제자한테 ‘비전’을 전해 주겠다는 소문 말입니다.”
또 다시 정적.
이제는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마저 들려올 지경이었다.
‘비전’이란 각 조직이나 무인이 지니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기술이었다. 무려 대륙에 단 셋밖에 없다는 마스터가 전해 줄 비전은 도대체 어떤 힘을 지니고 있을 것인가.
노력여하에 따라 단숨에 하이 익스퍼트의 경지에 이르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시선을 측면으로 돌리며 딴청을 부리던 대마녀의 입은, 한참 뒤에야 열렸다.
“……그래, 맞다.”
단숨에 일행의 분위기가 달아 올랐다.
다들 애써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에는 이미 늦은 나이였으나, 그들의 지인이나 가족 중 몇몇은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었다.
혹시라도 대마녀의 제자가 될 수 있다면?
가문의 영광이었고, 더 나아가 대마녀의 비전을 공유 받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 황제조차도 은근한 기대를 드러낼 정도였다.
“하하하! 기대가 되는군요. 일부러 아카데미까지 따라가기로 하길 잘했습니다.”
“흠, 하기야 그렇구나. 넌 도대체 왜 아카데미에 가는 거냐?”
대마녀의 반문에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마침 제 딸이 그곳에 재학 중입니다. 용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라… 혹시 제자가 될 수 있으려나 모르겠군요.”
“호오, ‘용의 피’라.”
드물게도 대마녀의 눈에 일순 이채가 어렸다.
흥미가 인다는 뜻이었다. 황제는 그 관심이 기꺼웠는지 따스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 자식 중 둘이 아카데미로 먼저 가 있습니다. ‘빌테온’과 ‘아이리스’라고… 둘 다 시엔이 제자가 되어 비전을 전수받길 바라는 모양이더군요.”
“아주 노골적이구나. 이제는 숨기지도 않아.”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대마녀는 다시금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말과는 달리 딱히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뻔한 이야기였으니까.
대마녀의 비전을 수집하면, 제국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어쩌면 마스터를 둘이나 보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도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상황이었다. 더불어 차기 황권을 두고 다투는 두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아비의 눈에 들기 위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공을 세우고 싶겠지.
아사리판이었다.
짧은 외출만이라도 이만한 소란이 일어나다니, 대마녀는 혀를 쭛쭛 차며 담백한 감상을 뱉었다.
“그 ‘시엔’이라는 아이가 고생하겠구나.”
차기 황권을 각축전 사이에 끼게 되다니.
수백 년을 살아 온 대마녀조차 동정심이 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목적은 아직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그리고 또, 만나봐야 할 젊은 기사가 하나 더…….”
“어르신, ‘이안 페르쿠스’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감히 황제의 말을 잘라먹는 무례를 저지른 인물은 바로 검공이었다.
귀족은커녕 황족조차 상상하기 힘든 불경이었으나, 황제는 그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어느 누가 검공을 말리겠는가.
심지어 검공의 목소리에선 들뜬 기색마저 감지되고 있었다.
“최근 젊은 기사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놈인데, 하하하… 자랑은 아니지만, 제국의 미래를 자처할 정도는 되는 모양이더군요. 성국의 그 늙다리에게 한 방, 아니 무려 두 방을……!”
“……그래.”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신이 나서 말을 이어가던 검공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뿜으며 답하는 대마녀의 낯빛이 심상찮았던 탓이었다.
여태껏 태연자약하기만 했던 여인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이안 페르쿠스’라… 물론 들었지, 얼마 전에 성국의 천신쟁이한테 연락을 받았거든.”
‘성국의 천신쟁이’.
멸칭이었으나, 대륙의 고고한 강자로 군림하는 마스터 셋은 의외로 교류가 잦았다. 일부러 애칭 삼아 서로를 그렇게 깎아내리는 표현을 쓰곤 했다.
바로 ‘성자’를 칭하는 호칭이었다.
다만 검공이 여전히 입을 열지 못하는 까닭은, 성자가 대마녀에게 굳이 연락할 만한 사유를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던 검공에게 느닷없는 질문이 던져졌다.
“혹시 비전을 전한 적은 있느냐?”
“아니, 뭐… 유력한 후보가 나타나긴 했는데, 아직은 고민 중입니다.”
“나도 그렇다.”
얼떨떨하게 답한 검공의 말을 받으며, 대마녀는 더욱 음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내가 전한 적도 없는 비전이 돌아다니고 있다면, 넌 어떻게 할 테냐?”
“그야 당연히 일단 조지… 크흠, 사정을 살펴봐야겠죠.”
“그래서야.”
후우, 하고 담배 연기가 뭉게뭉게 허공에서 흩어졌다.
대마녀를 제외한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말이었다. 그럼에도 대마녀는 홀로 스산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래서, 온 거라고.”
일부러 이곳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여정의 끝.
대마녀의 녹색 눈동자에 흐릿한 건물의 풍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였다.
*
그리고 그 아카데미의 한가운데.
이안은 심각한 낯빛으로 편지를 읽어 내리고 있었다.
맞은편에 고깔모자를 쓴 소녀를 둔 채로.
소녀는 얼음 컵에 찬 음료를 쪽쪽 빨아내며 물었다.
“그래서 우리 후배…….”
그 앙증맞은 자그마한 신문 조각이 들려 있었다. 보존 상태로 보아 누군가 일부러 오려 붙인 듯한 듯했다.
부제가 굵고 강렬했다.
‘충격! 엘시 라이넬라, 자작가의 차남에게 ‘애완견 선언’?! 아카데미의 꽃을 노리는 이안 페르쿠스의 검은 손길!’
사내의 이마에 맺힌 땀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생글생글 웃으며, 소녀는 이안에게 재차 물었다.
“이건 뭘까… 앙?!”
그렇게 또 다른 현재와 미래가 교차하고 있었다.
그다지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