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503화 (503/649)

〈 503화 〉 7. 질투는 나의 힘(3)

* * *

To. 사랑하는 내 제자에게

평안하냐? 이 스승은 다행히도 평안하다.

이제 그곳은 한창 알곡이 무르익을 무렵이겠구나. 반면 대수림은 사시사철 덥고 습한지라, 늘 따분한 마음으로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세상이란 이처럼 무료하고도 평온하구나.

그래서 더욱 낯선지도 모르겠다.

나의 모든 것이 달라졌는데, 이 대수림만은 그대로라서. 때로는 내가 달콤한 공상에 빠져 있다 되돌아오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평생을 목줄에 묶여 살던 개를 마당에 풀어놓으면 나와 비슷한 꼴을 보일까.

목줄이 닿는 좁은 세상만을 집으로 삼아 왔던 삶이다. 그 바깥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찌나 생소하고, 또 두려운 마음이 앞서던지.

우습지 않느냐? 오래 전 세상의 모든 이치를 통달했다는 대마녀가, 실은 이처럼 서툴고 모자란 계집에 불과하다는 것이.

비웃고 싶다면 비웃어도 좋다.

다만 이 세상에 내가 의지할 사람은 오직 너뿐이라는 사실만은 알아다오. 이 스승이 허세를 부리지 않아도 되는 상대는, 온 대륙을 통틀어도 너 하나뿐이구나.

혹시 비겁하다고 생각했느냐?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누누히 가르친 바 있듯이, 모든 행위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니까.

따지고 보면 이 또한 네 죄가 아니더냐. 누구에게도 내줄 생각이 없던 내 마음을, 기어코 네가 가져가고 말았으니.

돌이켜 보면 참으로 기묘한 인연이구나.

처음 네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무려 수백 년 동안 숨겨 온 비전이다. 아느 누구도 내 기술을 훔치거나 흉내 낼 수 없다는 사실쯤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어. 그래서 더욱 의문이었다.

성국의 천신쟁이가 착각이라도 한 걸까?

이 짧은 호기심이 설마 그처럼 큰 사건으로 비화될 줄은 몰랐다. 설마 하니 흡혈귀가 아카데미에 숨어들어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

그럼에도 세상의 이치란 참 신비하구나. 운명은 늘 활로를 남겨두고는 해서, 절묘할 만큼 필요한 인연들이 얽혀 들었지.

우선 검공, 그 꼬맹이부터가 그렇다.

이후에는 둘째와 막내, 심지어는 흡혈귀의 핏줄까지 아카데미에 모였지. 그 중심에 네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어 보이는구나.

넌 어떨지 모르겠다만, 나는 아직도 ‘운명’을 믿는다.

얼마 전까지 수백 년이나 스스로를 포박해 왔던 삶이 아니더냐.

한때는 못난 언니의 목숨을 제 손으로 취해야 한다는 비극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왜 하필 나여야 하냐고, 울부짖고 싶은 적도 수도 없이 많았지.

하지만 그날 깨달았다.

운명이 실존한다는 사실을.

오랜 길을 걷고 걸어, 비로소 너를 만났구나.

그리고 불쌍한 내 또 다른 제자들도.

다만 네 소꿉친구에 대해서는 유감이다. 대수림에 돌아온 뒤에 듣긴 했다만, 내가 도울 길이 없어 발만 동동 굴렀던 기억이 나는구나.

너도 알다시피 마음의 상처란 간단히 치유되지 않는다. 나 또한 못난 언니가 이따금씩 생각나면 속을 앓는 마당이니.

그래도 어찌하겠느냐. 상처 입은 짐승들이 그렇듯이, 서로의 상처를 핥아 주는 수밖에.

다음에 보면 술이나 한 잔 하자꾸나.

밤이 되니 숲이 소란스럽다. 오늘따라 달빛이 너무 밝은 탓일지도 모르겠다.

이만 줄이마.

추신 1: 둘째는 그렇다 치고, 최근 막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구나. 겉으로는 순진한 척 해도 심계가 보통 깊은 아이가 아니니, 특히 유념하거라. 하여간 시샘만 많아서는, 이제는 이 스승까지 잡아먹으려 들다니. 괘씸한 녀석.

추신 2: 더불어 지난번에 술 먹고 있었던 일은 이만 잊어라. 둘 다 만취해서 저지른 짓이니 누구를 탓할 것도 없다. 이러다 애라도 들어앉으면 둘째와 막내를 도무지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가 없구나.

From. 너의 스승으로부터.

제국력 571년, 낫의 달 열일곱 번째 날에.

——

방 안.

루핀을 내보낸 실내는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그 침묵을 벗 삼아 줄글을 읽어 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미래에서 온 편지를 전부 훑어 본 내 입에서 진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무리 샅샅이 훑어봐도 유의미한 정보가 많지 않았다. 그나마 뇌리에 각인될 만한 정보는 ‘흡혈귀’의 행방뿐이었다.

흡혈귀가 아카데미에 숨어들었다고?

사실이라면 당장 대응에 나서야 할 대사건이었다. 여태껏 몇몇 마인을 상대해 본 적은 있었으나, 나 또한 ‘흡혈귀’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감 앞에서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수림의 중심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핏물의 주인.

무려 수백 년 동안 최강이자 최악의 자리에서 군림하고 있는 마인이었다. 그 힘은 상상을 초월해서, 대륙의 단 셋밖에 없는 마스터 중 하나가 결계를 동원하여 가까스로 억눌러야 할 정도였다.

설마 그 괴물이 우리를 탈출했을 줄이야.

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 한 방울을 느꼈다. 현 시점에서 ‘흡혈귀’의 무력을 눈앞에서 목도한 이는 많지 않았으나, 통상적으로 마스터와 동급이라 평가하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이미 ‘성자’와 혈투를 벌인 적이 있던 나였다. 자연스레 일전의 전투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냉정히 말해서, 상대도 되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죽음을 경험하는 동안 유효타는 단 둘, 그마저도 치명타는 존재하지 않았다.

흡혈귀와의 전투도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

더욱이 내 심경을 어지럽히는 요소는 두 가지가 더 남아 있었다.

우선 첫 번째, 늘 그렇듯이 편지 뒷면에 휘갈기듯 쓰인 글귀.

‘은월초의 씨앗 가루와 빻은 세계수의 잎사귀, 대수림 안개꽃을 3:1:2 비율로 섞는다. 이후 마력이 풍부한 수원지의 맑은 물로 3분 동안 끓여낸 뒤, 거름망에 걸러 진액을 남긴다. 이 과정에서 생긴 잔여물은 고온건조한 바람으로 단시간에 말려…….’

검술을 전공하고 있는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 분량마저 상당한 설명문이었다. 이전의 글귀들은 고작해야 한 줄에 불과했으나, 이 정체불명의 교범은 글씨로만 무려 한 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탓인지 필체는 더욱 날림이었다. 이 글을 남긴 사내의 다급한 심정이 절로 느껴질 만큼.

결국 나는 한숨 섞인 탄식을 내뱉는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대화 상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혼잣말에 불과한 한 마디였지만, 지금의 내게는 홀로 한탄할 자유마저 존재하지 않았다.

내 앞에 있는 소녀가 이를 두고 보지 않았으니까.

“마침 내가 하고 싶던 말이 그거야, 후배님… 응?”

생긋,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하지만 악문 잇새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나, 부자연스러울 만큼 미동이 없는 눈꼬리를 보면 이 여인의 심기가 마냥 편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척이나 불편해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소녀의 손에 들린 기사에는, 터무니 없는 제목이 적혀 있었으니.

‘충격! 엘시 라이넬라, 자작가의 차남에게 ‘애완견 선언’?! 아카데미의 꽃을 노리는 이안 페르쿠스의 검은 손길!’

나는 슬그머니 여인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내 눈앞에 앉은 이 자그마한 소녀야말로, 내 심경을 더욱 어지럽히는 또 하나의 주범이었다.

엘시 라이넬라.

둘도 없이 소중한 내 동료이자, 약혼이 예정된 상대이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래, 본래의 ‘엘시 선배’는 말이다.

지금 내 맞은편에서 씩씩대며 분을 삭이는 여인은, 아무리 봐도 내가 알고 지내던 ‘엘시 선배’가 아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내게 재차 되묻는 꼴부터가 그랬다.

“응? 내가 뭐라고? 애, 애완견……?”

당장이라도 흐트러질 듯 위태로운 음색이었다.

내가 알던 엘시 선배라면 이러한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 저 ‘애완견 선언’은 다름 아닌 엘시 선배가 자진해서 저지른 짓이었으니까.

그래서 내 마음은 더욱 착잡해졌다.

눈앞의 ‘엘시 선배’가 누구인지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푹푹 찌는 날씨와 강렬한 햇빛이 어느 날의 기억을 재생시키고 있었으니까.

대수림.

정작 나는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장소였으나, 그곳과 얽힌 추억만은 아직 내 가슴에 잔향처럼 남아 있었다.

내 것이 아닌, 어느 사내의 기억이었다.

페르쿠스 영지에서 ‘시체 거인’을 상대할 때 엿보았던가.

그렇다. 지금 엘시 선배의 몸에는 그날 미래에서 보았던 '엘시 선배'가 빙의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도무지 그 이유는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내가 짧은 회상에 잠긴 사이, 소녀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쾅, 하고 책상을 내리치며 내지른 목소리가 드높았다.

“웃기지 마! 이, 이… 엘시 라이넬라가, 애완견을 자처한다고?! 그, 그것도 네 애완견을?!”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여인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야 믿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내뱉어진 말을 주워 담을 수단 따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한편으로는 그까짓 ‘애완견 선언’이 무슨 문제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카데미에 흡혈귀가 숨어들었고, 인류는 존속의 위기를 앞두고 있었다. 이러한 판에 일개 개인의 체면 따위가 내 눈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우선은 흡혈귀를 찾아보아야 한다.

온 마음이 그에 쏠린 참이었으니, 엘시 선배를 대하는 내 반응 또한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다.

“진정하세요, 선배…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현실도 아니니까.”

“너라면 그럴 수 있겠냐?!”

물론 옛 성깔을 되찾은 엘시 선배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를 삿대질하며 목청을 높이는 폼이, 이 수모를 씻지 못하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기세였다.

“이, 이건 패륜이야… 후배가 감히 선배의 주인 노릇을 하려 들어?! 야, 임마! 넌 부정 안하고 뭐했어!”

“부정했는데요.”

“어쭈? 이게 아주, 입만 열면 거짓말이야… 임마, 조사해 보면 다 나와. 도대체 네가 무슨 짓을 했길래 내가 이렇게 망가진 거냐고!”

무슨 짓을 했더라.

실로 오랜만에 받은 질문이라, 나는 무심코 지난날의 추억을 되짚고 말았다.

엘시 선배의 첫 만남은 꽤 극적이라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아카데미 한복판에서 누굴 손도끼로 찍어 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

추억에 잠긴 내 입에서 흐릿한 진술이 새어 나왔다.

“처음 만났던 날… 엘시 선배는 오줌을 지렸었죠.”

“……무, 뭐?!”

일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던 엘시 선배의 몸이 펄쩍 하늘을 부유하다 떨어졌다.

그 푸른 시선이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든 말든, 옛 추억을 반추하는 내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돌이켜 보면 그날의 인연이 이어져 지금에 이르지 않았던가.

“의외로 귀여운 일면도 있었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걸 유독 좋아해서, 나중에는 졸라대기까지 했는데…….”

“……거짓말!”

그때였다.

파직, 하고 내 눈앞에서 푸른 전하가 튀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마룻바닥을 굴렀다. 그러자 내 빈자리로 푸른 전하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쾅!

자그맣지만 실내를 뒤덮기에는 충분한 소음이었다. 위력 자체는 그다지 강하지 않았으나, 나는 일순 넋을 잃고 그 폭발을 바라보아야 했다.

“거, 거짓말이야… 내가 그랬다고? 아무리 몇 살 어리다지만, 나 엘시 라이넬라야! 그렇게 자존심을 내던질 리가 없잖아……!”

벼락뿐만이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에, 분명 전하와 함께 불꽃이 얽혀 들었다. 이는 상식을 정면으로 파괴하는 광경이었다.

마법사가 다루는 원소는 대개 하나로 한정된다.

여러 가지 원소에 재능을 지닌 마법사도 있긴 했지만, 마력은 쓰면 쓸수록 특정 원소에 특화되는 속성이 있었다. 종래에 이르러서는 다루는 원소가 단일해지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저 ‘엘시 선배’가 다루는 마법은 예외였다.

불꽃과 전기.

고작해야 견제에 불과한 작은 마법이었으나, 두 가지 원소가 혼재된 새로운 종류의 술식이었다.

무심코 내 입에서 의문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엘시 선배, 그 마법은 대체……?”

그 직후였다.

콱, 하고 난데없는 두통이 두개골을 직격했다. 날아든 송곳이 관자놀이를 꿰뚫고 뇌리를 강타하는 감각이었다.

서서히 일으켜지던 내 몸이 움찔, 하면서 휘청였다.

어느 사내의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고 있었다.

“……아직 너는 용혈 문자의 비밀조차 파헤치지 못했는데.”

탄식과도 같은 힐난이었다.

시야가 점차 좁아지며 무의식의 공간이 하나둘씩 망막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황량한 황무지 위로, 피로한 눈빛을 한 사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 간절해 보이는 시선으로.

“네게 부탁해도 되겠나?”

무슨 소리냐고, 내가 손을 뻗기 직전.

팍, 하고 자그마한 손길이 우악스럽게 나를 무의식의 저편에서 끄집어냈다.

“야, 야… 눈 좀 떠봐! 내, 내가 너무 심했나? 이상하다… 위력까지 조정해서, 맞아봐야 따금거리기만 할 텐데……?”

당혹감에 젖은 말소리와 함께, 내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며 박동을 개시했다.

맑아져 오는 시야 속으로 엘시 선배가 보이고 있었다. 걱정을 가득 담은 푸른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일순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 상반신이 곧장 벌떡 일으켜졌다.

뇌리가 간질거리며 어떠한 지식을 도출해 내고자 애를 쓰고 있었다. 이 참을 수 없는 감각을, 어떻게든 언어로 정제해 보려던 찰나.

쾅쾅쾅!

또 다시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 큰일 났어요! 이안 경!"

낯익은 목소리였다.

제국의 제5황녀, 시엔.

나는 흔적처럼 남은 두통에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황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늘따라 왜 이리 나를 찾는 사람이 많은 걸까.

이러한 불만은, 이윽고 내뱉어진 황녀의 용건에 지워지고 말았다.

"아바마마께서, 이안 경을 보고 싶대요!"

그야말로 뇌리를 새하얗게 표백시키는 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엘시 선배마저 흠칫 몸을 굳힐 정도로.

새로운 사건의 시작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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