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505화 (505/649)

〈 505화 〉 7. 질투는 나의 힘(5)

* * *

저 '엘시 선배'는 대마녀의 제자였다. 그리고 흡혈귀의 급습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며, 더불어 나는 이전부터 흡혈귀의 흔적을 찾아낸 적도 있지 않은가.

북부의 엘프들.

그들을 찾아온 이들이 바로 흡혈귀의 혈족이라고 했다.

심지어 세리아의 어머니조차도.

무언가 있다. ‘결계’를 넘어서, 흡혈귀가 아카데미까지 숨어들 수 있는 비법이.

그리고 이에 대해 가장 자세히 알고 있을 만한 사람?

대마녀의 곁에서 결계를 보수하고, 흡혈귀의 습격을 목도하기까지 한 인물.

하나밖에 없었다.

“자, 그럼 오늘은 일부러 비싼 술을 골라 보실…….”

“……잠깐!”

탁, 하고 내 손이 소녀의 가녀린 어깨를 움켜쥐었다.

엘시 선배의 오목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노골적인 의문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결국 나는 다듬거리며, 직전의 발언을 철회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아무래도, 도움을 받아야 할 부분이 있을 것 같아서.”

엘시 선배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흐응, 하고 묘한 소리를 내며 눈을 가늘게 뜨기를 얼마쯤.

끝내 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대답은, 다행히도 내가 바라던 대로였다.

“……좋아.”

물론 그렇게까지 이야기가 잘 풀릴 리는 없었지만.

“대신, 조건 하나만 들어 줘.”

이후, 또 하나의 별동대가 구성되었다.

엘시 선배는 한동안 단독행동을 하며 조사에 나선다고 했다. 적당한 정보가 모이기 전까지는, 내 나름대로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 돌아다니라고 하면서.

다만 그 조건이 난감했다.

“너 말이야, 내가 알고 있는 ‘후배’도 알고 있지?”

“글쎄요, 누구 말입… 네, 압니다.”

나는 일부러 시치미를 떼 보려 했으나, 엘시 선배가 곧장 등을 돌리자 대답을 수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엘시 선배는 제 요구 사항을 밝혔다.

“……혹시 만날 수 있어?”

드물게도,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고깔모자를 만지작거리며 흘깃흘깃 시선을 피하는 그 모습이 낯설었다. 여태껏 보여 주었던 강하고 당당한 인상과 대비되는 태도였다.

그래서 나는 더욱 망설이는 수밖에 없었다.

초조함, 그리움, 그리고 간절함.

몇 가지의 감정이 망막을 파고들더니 심장을 송곳처럼 관통했다. 어떻게든 이루어 주고 싶은 꿈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한 마디를 입에 담으려다가, ‘엘시 선배’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옅은 물기마저 어린 눈동자였다.

결국 나는 진실을 밝히는 수밖에 없었다.

“……네.”

그러자 소녀의 낯빛에 여러 감정의 파문이 일었다.

환희, 행복, 긴장, 이윽고 다짐.

“그럼 만나게 해줘.”

“지금 당장은, 좀…….”

“언제라도 좋아.”

감히 무너트릴 엄두조차 나지 않는 단단한 목소리로, 엘시 선배는 애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고 싶어… 그 정도면 돼.”

그것이 끝이었다.

엘시 선배는 내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뛰어 어딘가를 향했다. 우두커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내 낯빛에 낭패감이 서렸다.

나라고 해서, 사내와 엘시 선배를 만나게 해주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특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아무래도…….

이제 와서 뒤엎을 수도 없는 사안이었다. 나는 답이 없는 고민은 그만 두기로 했다.

결국 사내를 만나 봐야 풀릴 문제이리라.

오늘 밤에라도 만취해서 몸을 뉘이고 싶었지만, 나는 일단 사내와의 만남을 하루만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일은 황제가 도착하는 날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대륙의 지존을 만나는 날이기도 했다.

**

다음날, 나를 안내하러 온 인물이 꽤 낯익었다.

“오랜만일세, 페르쿠스의 꼬맹이.”

생글생글 웃는 중년의 얼굴이 참 밉상이었다. 그 강건한 육체와 새하얀 머리카락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무인, 대륙 최강의 검호라는 ‘검공’이 바로 날 황제에게 인도할 전령이었다.

그야말로 호화스러운 인선이 아닐 수 없었다.

대륙에서 독대할 수 있는 이가 손에 꼽는다는 황제를 만나기 위해, 단 셋밖에 없는 마스터 중 하나의 안내를 받다니.

그럼에도 이러한 호사를 누리는 내 낯빛에는 불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설마, 이걸 말씀하셨던 겁니까?”

“무슨 말인가?”

요즘따라 내 앞에서 시치미를 떼는 사람이 많아진 느낌이었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내 입에서는 자연스레 원망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지난번에 곧 온 아카데미가 떠들썩해진다면서요! 황제 폐하에, 남부 열왕국의 대마녀에… 이렇게 중요한 일이었으면 미리 말씀 좀 해주시지 그랬습니까. 어쩐지 알펜하우저의 쌍둥이부터 소란스럽더라!”

그러나 내 타박은 도리어 검공을 기쁘게 했을 따름이었다.

검공은 날 골려주었다는 점이 퍽 마음에 드는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턱을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릴 리가 없었으니까.

“큭큭, 놀랐나? 그러게 좀 더 제국을 향한 충심을 보였다면 좋았을걸.”

“지금 막 그 강철 같은 충심이 흔들릴 것 같은데요.”

“너무 그러지 말게, 황제 폐하의 행보는 극비 사항이니까… 아무리 내부인이라고 해도, 그 정보를 함부로 건넬 수는 없는 노릇이지.”

내 볼멘소리에도 검공의 목소리는 의연하기 짝이 없었다.

어차피 내가 하는 말이 사소한 불평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투였다. 여태 몇 번을 보았다고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체를 하는지.

정작 검공의 추측을 부정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분할 뿐이었다.

그러든 말든, 검공은 조곤조곤한 어조로 내게 주의사항을 늘어놓았다.

“우선 예의는 너무 차릴 필요 없네. 어차피 공석이 아닌 사적인 만남이니, 폐하께서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실 거야. 또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한 기회이기도 하고.”

“……기회, 말입니까?”

“진짜 측근.”

유독 무게감이 느껴지는 낱말이었다.

그 짤막한 말귀가 내뱉어지던 찰나, 검공의 눈동자가 차게 가라앉았다. 그 눈빛을 마주한 나는 일순 숨이 턱, 하고 막히고 말았다.

칼날이구나.

비유나 과장 따위가 아니었다. 내 눈앞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내는, 그 자체로 잘 벼려진 칼 한 자루나 다름없었다.

몸짓, 손짓, 눈짓 하나하나가 치명상을 입힐 만한 예기를 품고 있었다.

토막 난다.

솜털이 쭈뼛 서는 듯한 충격, 오히려 방심하고 있었기에 더욱 날카로운 실감이 척추를 파고들었다.

죽었다.

저 인외의 괴물이 그럴 마음만 들었다면, 나는 이미 몇 번이고 죽었을 터였다.

이것이 제국의 마스터, 검공(??).

그러자 검공은 도리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려 보였다.

“하하하! 과연, 하이 익스퍼트… 이제 이 정도는 느낄 수 있나?”

“무, 무슨… 이게 무슨……?”

“’검혼(??)’.”

더듬거리며 말조차 제대로 뱉어내지 못하는 내게, 검공은 그렇게 사나운 미소로 화답했다.

“어쩌면, 자네가 배울 수도 있겠지… 그러기 위해서라도 잘 해보게.”

검공의 걸음걸이가 멎은 건 그 무렵이었다.

내가 아직도 혼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검공은 망성임조차 없이 복도 끝에 위치한 화려한 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끼이익, 하고 문짝이 스스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검공의 두터운 손이 밀치듯이 나를 실내로 인도했다.

그리고 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방 안의 풍경을 시야에 새겼다.

고풍스러운 가구 사이로 노인 하나가 보이고 있었다.

강자 특유의 기세는 감지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는 연로한 사내에 불과했으나,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세가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서서히 노인의 시선이 이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청색의 불꽃을 마주한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용이다.

또한 제국에서 용을 칭할 수 있는 인물은 오직 하나뿐.

내 무릎이 절로 꺾인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황제 폐하.”

“이안 페르쿠스.”

나지막한 호명뿐인데도, 내 온몸이 즉시 굳어 버렸다.

말로만 듣던 제국의 지존을 마주한 내 심장이 쿵쾅쿵쾅 널을 뛰었다. 제국 황실을 향한 존경과 공포는 모든 신민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감정이었다.

일평생 황실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라 배웠다.

그 가르침을 단시간에 이겨낼 수는 없었다.

황제 또한 내게 무리한 조건을 내걸지는 않았다.

“워낙 갑작스러운 만남이라, 마음을 추스를 틈도 없었겠군. 제국의 기사로서 그대가 보인 활약은 멀리에서나마 익히 듣고 있었네… 제국뿐만 아니라, 대륙이 그대에게 많은 빚을 졌어.”

“과, 과찬의 말씀입니다…….”

꼴깍, 하고 마른침을 삼키며 나는 가까스로 무례를 피해냈다.

황제가 공을 치하하는데,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서야.

귀족 실격이었다.

하물며 황제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의외로 유순한 편이었다. 굳이 격식과 위엄을 챙기려 들지도 않았고, 그 따스한 어조에서는 배려심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진정해야 한다.

그렇게 가까스로 가슴을 다독였을 때였다.

“과연 ‘녹슨 칼’답네.”

“……네?”

난생 처음 들어보는 낱말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무척이나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묵묵히 내게 시선을 향했다.

“그대가 말하지 않았던가? ‘요람에 숨은 용, 명검보다도 잘 드는 녹슨 칼’…….”

깊이 침전한 눈빛이었다.

감히 그 속내를 짐작해 보기도 어려울 만큼.

그래서 나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떻게 알았나?”

흐릿하면서도 묵직한 목소리.

내 폐부를 꾹 짓누르는 물음에, 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제국 황실의 오랜 비원을 말이야.”

속으로 어느 사내를 향한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그게 뭔데, 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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