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508화 (508/649)

〈 508화 〉 7. 질투는 나의 힘(8)

* * *

“이안 페르쿠스, 네 몸에는 극독이 돌고 있다. ‘그림자’들의 독니에는 언제나 독이 묻어있거든. 무려 ‘하이 익스퍼트’에 도달한 기사인 만큼, 죽지는 않겠다만… 더는 움직이지 힘들겠지.”

그러면서 사내는 소리 없이 발걸음을 내딛었다.

단 두어 걸음만에, 미끄러지듯 내 앞에 도착한 그의 상반신이 굽어졌다.

아마도 나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솔직히 말해 놀랐다. 우리 정도라면, ‘하이 익스퍼트’나 ‘대마법사’가 상대라도 승리를 점칠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순간적으로 검공께서 오셔야 한다는 판단이 들 정도였으니.”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지 헐떡이면서, 호흡을 가라앉혔을 따름이었다.

“해독제는 곧 검공께서 도착하시면 주도록 하지.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자기소개나 할까? 내 이름은 핀들스턴의 루벤…….”

“이봐.”

나지막이 내뱉은 한 마디였다.

사내의 유려한 혀가 그제야 한 번 멈칫했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웃고 있었으니까.

이윽고 사나운 호선을 그리던 내 입술이 달싹였다.

“시끄러워.”

무슨 소리냐고, 사내가 되묻기도 전에.

핏물이 사선을 그리며 뿜어져 나왔다.

어느덧 나와 사내의 구도가 역전되어 있었다. 사내를 등 뒤에 둔 채로, 서서히 걸음을 옮기는 나와 그 자리에 무릎을 꿇는 사내가 교차했다.

부릅떠진 눈이 덜덜 떨리는 시선을 내게 보냈다.

“무, 무슨… 아무리, 하이 익스퍼트라 해도 움직일 수 있을 리가……!”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심상을 두 개나 지니고 있고, 그중 하나로 죽은 이후에도 몸뚱어리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구차한 사정이었다.

그보다는 황제와의 대화가 더 중요했다.

비로소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와 독대할 수 있었으니까.

황제는 호의도, 적의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우묵히 가라앉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전투의 흥분이 가시고 보니 다소 어색한 분위기였다. 내가 굳이 구질구질한 변명을 입에 담은 까닭은, 이 침묵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리라.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자랑인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황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흘깃 방 안을 훑어보던 그의 발끝이 창가 쪽에 놓인 의자를 향했다. 집무를 볼 때를 고려한 배치였는지, 그 앞에는 넓은 책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노인은 그 푹신한 의자 등받이에 등을 파묻었다.

“좋아, 인정함세. 짐이 그대를 잘못 보았어. 그대는, 좀 더 나와 비슷한 사람일 줄 알았는데…….”

쾅, 하고.

폭음이 울려 퍼진 시점은 바로 그때였다.

웅장한 크기를 자랑하던 문이 한순간에 박살 나는 소리였다. 아니, 이를 ‘박살’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목재와 합금을 적절히 섞은 문에 무수한 실금이 가 있었다. 그 선을 따라 문짝이 하나둘씩 조각나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문은 그 형체조차 남기지 못했다.

가루.

참격은 금속과 나무를 가리지 않았다. 그 검 앞에서 만물은 평등할 따름이었다.

흩날리는 먼지 너머로 신이 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네 이놈, 이안 페르쿠스! 드디어 본성을 드러냈구나! 정말 어찌할 수 없이, 이 나와 검을 겨루어 보는 수밖에!”

일말의 위기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음색이었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검공쯤 되는 고수가 실내의 상황을 지금껏 파악하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굳이 방 안에 들어서지 않고서도 나를 다진 고기로 만들 실력이 있는 남자였다.

‘검혼(??)’이라 했던가.

그 소름 끼치는 예기가 아직도 안개처럼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마도 비단 내 주위뿐만 아니라, 이 건물 전체가 그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검공은 사태가 모두 정리된 후에야 나타났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그 의도는 뻔했다. 검공은 내게 살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문 뒤에서 내 실력을 감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조차 알고 있는 사실을 황제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재차 흘러 나왔다.

“……숙부를 닮은 사람이었군.”

그 한탄을 배경으로 검공은 칼 한 자루를 꼬나쥐었다. 얼핏 보기에는 엉망진창으로 보이는 자세였지만, 나는 이를 마주하자마자 숨이 턱 하고 막히고 말았다.

빈틈이 없다.

전력을 다하더라도 생채기 하나는 낼 수 있을까?

이처럼 회의적인 전망만이 반복적으로 그려졌다. 어딜 보아도 내가 패배하는 미래밖에 없었다.

식은땀이 낯가죽을 적신다.

반면, 검공은 바짝 긴장한 나를 보고 헤실헤실 웃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의 눈동자에 어린 손주를 상대하는 노인 특유의 즐거움이 일렁였다.

“어떻게 할 테냐, 페르쿠스의 꼬맹아? 참고로, 오지 않아도 넌 죽는다.”

이쯤 되면 순 협박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호흡을 더욱 깊이 가라앉혔다. 팍, 팍, 하고 내 시야에 금빛 불꽃이 튀기고 있었다.

그래도 전력을 다한다면.

심상을 최대한 이용한다면, 생채기 하나쯤은 낼 수 있지 않을까?

사고가 곧장 현상으로 이어진다.

나를 중심으로 은빛의 안개가 피어 올랐다.

아주 옅은 수준에 불과했지만, 제국 첩보부를 상대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양의 오러였다. 그 증거로 땅에 엎어진 첩보부원 중 하나가 컥컥대며 호흡 곤란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검공은 단지 이죽이며 그 자리에 서 있을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내 오러는 단 한 치도 그 주변을 침범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존재감이었다.

이렇게 되면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정면돌파.

이윽고 세상이 무채색으로 물들고, 검공이 꼬나쥔 검을 치켜들었을 찰나.

“……그만!”

쿵, 하고 터져 나온 목소리가 내 속을 진탕시켰다.

나는 울컥, 하고 치솟는 핏물을 느끼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검공은 아무런 수도 쓰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 비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황제의 뒤편으로 웅웅거리며 정체불명의 문자가 떠올라 있었다. 이를 본 검공도 혀를 쯧, 하고 차며 검을 거두는 수밖에 없었다.

저 글자야말로 황제의 상징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황제의 권위 앞에, 제국의 그 누가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제국의 마스터인 검공조차도 황제에 대한 예를 지키는 마당이었다.

나는 황급히 검을 거두고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황제의 등 뒤에 떠오른 문자가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황제의 입에서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곳은 실내일세! 두 사람쯤 되는 무인이 검을 겨룬다면, 방 하나는커녕 건물 하나가 날아가도 모자라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하지만, 폐하…….”

“숙부.”

검공은 무어라 반론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황제의 나지막한 부름에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끄응, 하는 소리가 유독 애달프게 와 닿았다.

그토록 나와 검을 겨루고 싶었을까.

솔직히 나도 아쉽기는 했다.

명실상부 대륙 최고의 검객과 검을 나누다니, 무인으로서 최고의 영광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미 판은 뒤집어진 뒤였다.

나는 눈치껏 고개를 숙이며 힐끔힐끔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노인은 그새 몇 년은 늙은 얼굴이었다.

“숙부까지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젊은 기사는 이미 제 목표를 이루었으니까요.”

그 말에 나는 무심코 쾌재를 내지를 뻔했다.

다소의 갈등은 있었으나, 결국 황제는 나를 인정했다. 그 사실이 내게 뿌듯함과 함께 잔잔한 감동을 전해 주었다.

이제야 그 사내가 걸어가던 길의 출발선에 섰다.

이미 한참이나 뒤쳐진 뒤였으나, 사내의 짐을 떠맡을 정도는 되었다는 나를 들뜨게 했다. 사내의 길이 아닌 나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 이상으로 두렵기도 했지만.

나는 꾸욱, 하고 조여오는 가슴의 통증을 억지로 무시했다. 그 사내는 아마도 이보다 떨리고 무서웠을 터였다.

나처럼 각오를 다질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겠지.

그러다 문득 또 하나의 풍경이 망막을 스쳐 나가기도 했다.

미래에서 온 엘시 선배와 대화를 나누던 날, 난데없이 찾아온 통증과 함께 보이던 사내의 표정.

무언가 달랐다.

여태까지와 달리, 좀 더 회한과 우수에 젖은 눈빛이었는데.

하지만 내게 상념에 장길 시간은 얼마 주어지지 않았다.

“……이안 페르쿠스!”

“예, 폐하!”

나는 황제의 위엄 서린 호명에 지체 없이 응답했다.

내 고개가 더욱 깊이 숙여지자, 황제는 이글거리는 눈빛을 하며 재차 외쳤다.

“정 그렇다면, 그대에게 하나의 임무를 부여하겠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황실의 비원에 대해서도 알게 될 테니!”

두근, 하고 맥동하는 심장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무려 황실의 비원과 연관된 임무였다.

얼마나 고된 시련을 거쳐야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속으로 단단한 각오를 마쳤고, 다음날.

“유렌 페리아스, 당신에게 과분한 영광을 드리죠! 바로 제 동생, 루나를 아내로 맞이할 영광을! 그 대신, 부탁 하나만……!”

언제나와 같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여인을 마주하며, 나는 두 손으로 낯가죽을 훑어 내렸다.

“제발, 틀려도 하필 그 새끼 이름을… 미쳤습니까?”

알펜하우저의 쌍둥이.

그 질긴 악연이, 또 다시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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