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09 - 7. 질투는 나의 힘(9)
황제의 부탁은 의외로 간단했다.
“내 딸이 제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게.”
그럼에도 나는 일순 대답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짤막한 구절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내용이 더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하나였다.
“딸이라고 하심은……?”
지당한 의문이었다.
황제의 딸은 한둘이 아니었다. 제국의 지존에겐 혈통을 이어나가야 할 의무가 있었고, 만일을 대비하여 최대한 많은 자식을 낳는 것이 보통이었다.
당대의 황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슬하에 무려 열 명 남짓의 자식을 두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차기 황권에 도전할 수 있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겠지만, 황제가 단순히 ‘딸’이라 칭할 만한 인물은 여럿이 존재했다.
당장 떠오르는 황녀만 해도 둘이나 되지 않는가.
제2황녀 아이리스와, 제5황녀 시엔.
그러니 내게는 보다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했다. 도와야 할 상대에 따라 임무의 난이도가 달라질 테니까.
나와 달리, 황제는 조금도 망설이는 기색이 없었다. 노인의 말소리가 거침없이 이어졌다.
“내 딸 중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아이는 하나뿐일세.”
“……시엔 전하, 말씀이시군요.”
반사적으로 떠올린 이름이 그대로 입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러자 황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 추측을 확인시켜 주었다. 나로서는 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시엔을 제외한 황족과 동행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일단 지위가 너무 높다는 점이 부담이었다. 더불어 그 성정 또한 제멋대로일 가능성이 큰데, 이를 어디까지 받아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면 내 손에 손도끼가 들려 있을지도.
그 시엔조차도 예전에는 오만하고 침착한 성미를 보이지 않았던가.
그때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불우한 과거를 떠올린 내 몸이 멋대로 몸서리를 쳤다. 그러는 와중에도 황제의 설명은 재차 이어졌다.
“’대마녀’께서 이곳으로 오신다는 소식은 들었나?”
“아… 네, 지나가다 들은 것 같습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에도 언급이 된 내용이었다.
대마녀는 모종의 사유로 아카데미에 방문했다. 소문에 따르면 이는 제자를 선출하기 위해서인 듯하고, 그 과정에서 ‘흡혈귀’와 혈투를 벌이게 된다.
이것이 내가 파악한 대략적인 미래였다.
정작 중요한 부분이 빠져 듬성듬성한 얼개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내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언제나 대략적인 내용만 적혀 있을 뿐, 중요한 단서를 찾아내는 쪽은 언제나 나였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황제가 이 사건에 얽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편지에서도 ‘검공’이 언급되어 있었으니, 제국 황실이 앞으로 벌어질 사태에 개입하고 있을 가능성은 농후했다.
그래서 일부러 호위를 습격하는 무리수까지 두지 않았는가.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내가 원하던 이야기를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분께서 제자를 뽑으려 하신다는 말도 들었겠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내 딸이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자네가 힘을 써주었으면 하네.”
“어떻게 말입니까?”
“그야, 그대가 하기 나름 아니겠나?”
농담인지, 진담인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어 분간하기 힘든 말이었다.
물론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살면서 맞닥뜨리는 대개의 문제는, 내가 하기 나름이었으니.
그럼에도 나는 쓰디쓴 침음을 삼켜야 했다.
암만 그래도 출구가 너무 보이지 않지 않은가.
제자를 뽑는 주체는 ‘대마녀’였다. 세속을 등진 초월자를 금전이나 권력으로 회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따라서 황녀를 대마녀의 제자로 만드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대마녀의 마음을 혹하게 할 것.
다시 말해, 내가 무진 애를 쓰더라도 한계가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결과는 대마녀와 황녀에게 달려 있었으니까.
이 명료한 관계에 타인이 개입할 여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황제의 은근한 조언이 귓가에 와 닿은 건 그때였다.
“그러고 보니, 그분께서 그대에게 관심이 많은 모양이던데…….”
“네?”
그야말로 내 고개가 갸웃 기울 만한 이야기였다.
나는 살면서 대마녀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고작해야 미래에서 온 ‘나’의 기억을 몇 번 훔쳐본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대마녀가 내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니.
지난 성자와의 대결이 그렇게 인상적이었나?
그러나 황제는 굳이 내 호기심을 해소해 주지 않았다.
대신 또 다른 조언을 이어갔을 따름이었다.
“또, 시엔을 대마녀의 제자로 들이고자 하는 이는 그대만이 아닐세. ‘빌테온’과 ‘아이리스’… 그 두 아이도 진작 아카데미에 도착했다고 들었지.”
이 또한 금시초문이었다.
‘빌테온’과 ‘아이리스’, 나도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제국의 귀족이라면 마땅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차기 황권을 두고 다투는 가장 유력한 주자가 아닌가.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판이 커져 가고 있었다. 하기야, 무려 ‘황실의 비원’과 관련된 일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렇게 나는 애써 바싹바싹 말라 오는 입술을 침으로 축였다.
이보다 더한 위기도 몇 번이나 넘겨왔던 나였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검이 필요했고 지금은 두뇌가 필요하다는 점뿐.
나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레토를 찾아가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다만 내 첫 걸음을 정해 줄 이는 따로 있었다.
“꼬맹아, 우선 알펜하우저의 쌍둥이를 찾아가 보는 편이 좋을게다.”
검공은 담백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나를 응시하는 그 푸른 동공에서 흥미진진하다는 기색이 엿보였다. 과연 내가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나갈지, 꽤나 기대가 된다는 얼굴이었다.
정작 나는 그 과분한 관심이 부담스러울 뿐이었지만.
이를 신경이나 쓸 검공이 아니었다. 그의 쾌활한 목소리가 어김없이 이어졌다.
“아이리스, 그 아이의 지시에 따라 무언가 준비를 하고 있다고 들었거든. 마침 두 사람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라고 했지?”
물론, 검공의 의도도 마냥 순수해 보이지는 않았다.
예전에 들은 바 있던 검공의 제안이 얼핏 귓전을 스치는 듯했다.
알펜하우저의 쌍둥이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했던가.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소리였다.
하지만 내게는 당장 길이 없었고, 따라서 검공의 조언을 뿌리칠 여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내키지 않은 걸음을 옮겨야 했던 내막이었다.
다만 의외였던 점이 하나 있기는 했다.
그 얄밉던 시에네 선배가 오늘따라 저자세로 나오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내가 부탁을 건네야 할 처지라, 무슨 수모를 당해야 할지 몰라 끙끙 앓던 지난밤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지금만 해도, 보라.
은회색의 동공이 흘깃흘깃 내 낯빛을 살피고 있었다.
나름대로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는데, 내가 혹하지 않아 초조하다는 기색이었다.
“호, 혹시 불만인가요? 우리 루나는 예쁘고, 똑똑하고, 기억력도 좋은데! 심지어 돈도 많아서, 결혼만 하면 일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고요!”
“아니, 아니… 시에네 선배, 전제가 잘못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나는 슬쩍 시에네 선배의 등 뒤를 살폈다.
그곳에는 귀까지 새빨개진 루나 선배가 서 있었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난데없이 제 언니란 인간이 외간 남자 앞에서 제 반려를 결정하는 판이라니.
제정신인 편이 더 이상했다.
우물쭈물하는 꼴이, 제 언니를 말릴 여유조차 없을 만큼 창피한 모양이었다.
혹은 두 사람 사이에서 이미 합의가 끝났거나.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다. 아무리 알펜하우저가 상가(商家)의 명문이라고는 하나, 이처럼 갑작스레 매매혼을 결정할 만큼 근본 없는 가문은 아니었다.
그저 못난 언니를 둔 루나 선배가 불쌍할 뿐.
안쓰러운 마음에 나는 더욱 강한 어조를 쓰고 말았다.
“루나 선배가 무슨 물건입니까? 이렇게 갑작스레 일평생을 함께할 짝을 정하는 건…….”
“그리고 루나와 결혼하면, 무려 이 시에네를 처형으로 모실 수 있답니다!”
물론, 시에네 선배는 내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언제 보아도 막무가내 기질이 있는 여인이었다. 이대로라면 대화조차 성립하지 않으리라.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루나 선배에게 구슬픈 눈빛을 보내야 했다.
도와 달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루나 선배도 곤란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얌전한 인상의 여인이 기껏 토막 난 언어를 짜냈다.
“죄, 죄, 죄송합니다… 이안 경, 저희 언니께서 다소…….”
“어때요, 굉장하죠? 어딜 가든 자랑해도 좋아요, 아란 코이누스! 다름 아닌 제 매부가 되는 일이니까요!”
그러든 말든 시에네 선배는 우쭐한 어조로 떠들 뿐이었다. 그 자신감을 상징하듯 쫙 펼쳐진 어깨 탓에 강조된 흉부가 인상 깊었다.
이윽고 수치를 이기지 못한 루나 선배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부끄러웠는지, 두 손을 꼭 쥔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한숨 섞인 힐난을 내뱉었다.
“매부 이름도 제대로 못 외우면서, 무슨…….”
무의미한 시도였다.
시에네 선배는 내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분위기에 취해 멋대로 협상을 진행해 나가기까지 했다.
“이, 이래도 불만인가요? 흠흠, 의외로 욕심이 많은 편이었군요… 좋아요, 그럼 처가 아니라 첩으로 하죠! 그, 성국에 따로 연인이 있다고 듣긴 했으니… 끄엑.”
빡, 하고.
결국 참다 못한 루나 선배의 손바닥이 시에네 선배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호신술을 배우기라도 했는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꽤 경쾌했다.
최소한 상인 따위가 정통으로 맞고 버틸 만한 위력은 아니었다.
시에네 선배의 초점이 한 차례 세차게 흔들리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던 몸뚱어리가 이내 풀썩, 하고 땅 위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정적.
되찾은 평화를 기뻐할 새도 없이, 루나 선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 언니께서, 다소 예법에 무지할 때가 있는지라…….”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뚱한 눈빛으로 루나 선배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러자 루나 선배는 크흠, 하며 애써 사태를 무마하려 애썼다.
무용한 시도였다.
결국 루나 선배는 눈꼬리를 축 늘어트리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용서해 주실래요?"
내 눈이 자연스레 시에네 선배를 향했다
"……한 번만 찍어도 됩니까?"
내 손이 도끼 자루를 만지작거리자, 루나 선배는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한 정보라면 다 드릴 테니, 부디 꿀밤 한 대로……."
차마 시에네 선배를 때리지 말아 달라고는 하지 못하는 루나 선배였다.
그 덕에 목표를 이루기는 했다.
"대마녀께서 최근 이상고온에 관심을 보인다고 들었어요."
"그래서요?"
"대마녀께선 그 근원이 아카데미에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더군요."
나는 입을 열려다가, 다시 닫았다.
"우리가 먼저 찾아내야 해요."
으득으득, 강한 의지가 담은 말이 이어진다.
"……빌테온이 찾기 전에."
황권 다툼.
일펑생 관심도 없던 주제가 무대 위로 오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