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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10)화 (510/649)

Chapter 510 - 7. 질투는 나의 힘(10)

권리는 의무를 수반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러한 진리를 피해 갈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았다. 권리와 의무의 균형이 기울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혁명의 불꽃이 당겨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안정된 사회의 특권계층은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우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최소한 그것이 겉치레에 불과한 수준이라도 말이다.

제국의 황족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제5황녀 시엔은 모범적인 황족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녀의 일생은 권리와 의무 사이의 줄타기와 다름없었다.

자고로 ‘황녀’란 그 존재만으로도 주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신분이 아니던가. 더불어 타고난 미모와 ‘용의 눈’이라는 특별한 힘은 시엔으로 하여금 때이른 깨달음을 맛보여 주었다.

용의 피를 이었다는 이유 하나로 사랑받았던 소녀였다.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 본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무수히 내리꽂히던 혐오의 시선은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의 마음을 병들게 하기 충분했다.

그때 소녀는 깨우쳤다.

애정과 증오는 마치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서, 언제든 손쉽게 뒤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황족’이라는 고귀한 태생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에야 아무 생각 없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지만, 차기 황권 다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면?

삶과 죽음의 줄타기가 시작될 터였다.

그래서 소녀는 독해졌다.

타인의 마음과 욕망을 이용하기를 망설이지 않았고, 차기 황권을 노리지는 않더라도 쓰임새 있는 패가 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그렇게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며 차기 황권을 노리는 세력들의 시선을 모으기를 몇 년.

모두의 기대와 경계를 등에 업고 아카데미에 입학한 시엔은, 단 1년만에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시엔, 이게 뭐니?”

시엔의 앞에는 은청색 머리카락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연약한 살결이 여인의 병약했던 과거를 말해 주었다. 어린 시절 몇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긴 여인의 살결은 희다 못해 창백해서, 태양이 중천인 시간 속에서는 또 다른 세계에서 온 주민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다만 유약했던 유년기를 거쳤다고 해서 그 성정마저 유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날카로운 눈매와 도도한 몸짓, 차가운 낯빛은 여인이 결코 만만찮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귀띔해 주고 있었다.

하기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 살얼음판 같은 정쟁에서 살아남았겠는가.

여인은 무려 다음 권좌에 가장 가깝다는 평을 듣는 황위 계승권자 중 하나였다.

제국의 제2황녀 아이리스.

시엔이 가장 두려워하는 두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다만 시엔의 몸이 오들오들 떨리는 까닭은 그 외에도 따로 있었다.

“언니. 그, 그건 말이죠…….”

꿀꺽, 하고 시엔이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리스의 한심하다는 시선 끝에는, 한창 시엔이 만지작거리고 있던 인형이 하나 위치하고 있었다.

소녀의 짝사랑을 본뜬 인형이었다.

처음에는 취미 생활에 불과했으나,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찾다 보니 어느덧 시엔도 이 비밀스러운 창작 활동에 몰입하게 되었다. 돈을 들여 솜씨 좋은 재봉 장인들에게 의뢰를 맡긴 적도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시엔에게는 원칙이 하나 있었다.

마무리 작업만큼은 손수 맡는 것.

시엔은 이안의 동료였고, 눈썰미와 손재주도 일반인과 궤를 달리할 만큼 좋았다. 이러한 재능이 남들이 보지 못하는 인형의 매력을 되살리곤 했다.

오늘도 한창 또 하나의 마무리 작업을 끝마치던 중이었는데.

운이 나빴다. 하필이면 들켜도 아이리스에게 발각을 당하다니.

아이리스의 뒤로는 제 주군과 마찬가지로 우물쭈물하고 있는 아이린이 보이고 있었다. 당연히 일개 호위기사 따위가 제국의 유력한 황위 계승권자를 막을 도리는 없었겠지만, 시엔은 원망스러운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아이린 경, 무능해!

그렇게 속으로 제 부하를 탓하면서, 시엔은 이 상황을 모면할 최후의 수단을 떠올렸다.

“……에헤.”

멍청한 미소와 함께 소녀의 얼굴이 갸웃 기울었다.

그러나 이 하찮고 무해한 여동생을 앞둔 아이리스의 표정은 여전히 냉막하기만 했다. 아니, 이를 넘어 두통까지 느낀다는 듯 이마를 짚고 신음을 흘릴 정도였다.

아이리스의 입에서 절로 한탄이 흘러나왔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니, 시엔… 그토록 총명하고 야심만만하던 너였는데, 이젠 여느 계집애와 다름없이 방구석에 틀어박혀 인형이나 만지작거리는 꼴이라니.”

시엔은 아이리스의 노골적인 힐난에 그만 풀이 죽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그간 참 많은 변화가 있다 싶긴 했다. 예전의 아이리스는 시엔을 경계하면서도 은근한 기대감을 숨기지 못했다.

음험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여인이 아닌가.

제 성정을 똑 닮은 여동생이 유독 귀여웠을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단 1년만에, 여타의 그 나이대 소녀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모습을 보이다니.

실망을 넘어 경멸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리스는 마지막까지도 못내 한심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사실은, 아이리스가 이유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이리스가 아카데미까지 찾아왔다면 그럴 만한 용건이 있을 터.

그리고 아이리스는 시간 낭비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따라오려무나.”

가타부타 설명조차 없이 내던져진 지시였다.

시엔은 얼떨떨한 표정을 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수밖에 없었다.

“네?”

“따라오라고 말했잖니, 시엔… 설명 따위는 가면서 들어도 되니까.”

약간의 짜증마저 서린 목소리에, 시엔은 결국 도축장에 끌려 가는 개처럼 질질 발을 끌어야 했다.

본래 아이리스는 화를 잘 내지 않는다. 애초에 사람 자체를 잘 믿지 않는 편이라, 그럴 만한 가치를 지닌 인물이 주위에 몇 없기 때문이었다.

화를 낼 바에는 깔끔히 버린다.

그것이 아이리스의 방식이었다. 이를 반대로 해석해 보자면, 지금 아이리스가 짜증을 낸다는 것은 아직 시엔에게 이용가치가 남아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시엔은 벌써부터 이안이 그리워져 죽상을 하고 말았다.

이안 경이었다면 좀 더 당당하게 나섰을 테지.

시엔의 호위기사, 아이린이 소심한 반항을 시도한 것은 그때였다.

“저, 아이리스 전하. 죄송하지만 시엔 전하께서도 따로 일정이 있으신지라…….”

“황명.”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다.

단 두 음절, 아이린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시선을 내리깔게 한 마법의 단어였다.

“루페미온 경, 어느 일정이 황명보다 우선일 수 있죠? 전 아바마마의 특명을 수행 중입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한 줄은 알아서 다행이군요.”

싸늘한 코웃음과 함께, 아이리스는 경멸의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들었어요, 고작 시골 자작가의 차남한테 까불다가 크게 당했다죠? 그 덕에 제 여동생은 아카데미 한복판에서 망신을 당했고, 단 몇 달만에 뜨개질이나 하는 신세라니. 하!”

“어, 언니!”

시엔은 드물게도 울컥해 목청을 높였다.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덜덜 떨고 있던 이전과는 차별화된 반응이었다. 아이리스의 차가운 시선이 자연스레 시엔을 향했다.

아이린은 다소 감동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주군이라고, 도를 넘은 모욕에 대신 항의라도 해주려는 것일까.

반만 맞는 추측이었다.

시엔은 자그마한 주먹을 꼬나쥔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무척이나 화가 난 듯한 모습이었다.

“이안 경을 두고 ‘고작’ 시골 자작가의 차남이라니요! 무려 악신의 권속을 토벌하고 ‘하이 익스퍼트’에 이른 기사를 그렇게 모멸적으로 불러도 되는 건가요?!”

“그래, 그랬지… 그때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최대한의 용기를 낸 반항이었으나, 아이리스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이윽고 아이리스는 한숨을 내쉬며 재차 시엔을 꾸중하기까지 했다.

“시엔, 제발 정신 좀 차리렴… 네가 그 염문설만 잔뜩 떠도는 바람둥이를 좋아하든 말든 관심은 없단다. 하지만 우리 같은 이들에게 있어, 모든 사람은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만은 잊지 마렴.”

“아무리 그래도, 인류를 대표하는 영웅인데…….!”

“아주 쓸모 있는 도구라는 말이구나.”

착, 하고 어느덧 아이리스의 손에 쥐어져 있던 쥘부채가 펼쳐졌다.

일부러 입가를 가린 그 눈빛이 더욱 매서웠다. 아이리스는 냉소적인 어조를 견지해 나갔다.

“우리는 쓸모 있는 도구들이 최대한의 성과를 낼 수 있는 곳에 배치해 주면 되는 거야.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조직과 정보의 힘이 없으면 힘을 쓸 수 없지.”

그것이 아이리스가 보인 마지막 인내였다.

그녀는 다시금 사뿐사뿐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고, 일순 머뭇거리던 시엔은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졸졸 따라나갔다. 건물 바깥으로 나서니 이미 호위 기사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과연 차기 황권에 가장 가까운 이들 중 하나다웠다. 호위의 무장이나 실력이 무시무시했다.

그러든 말든, 아이리스는 시엔에게 눈길만 한 번 흘깃 던졌을 따름이었다.

“……너무 불만스러운 표정 하지 마렴. 내 말을 잘 들으면, 그 웃기지도 않은 짝사랑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말없이 아이리스의 말을 듣고 있던 시엔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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