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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11)화 (511/649)

Chapter 511 - 7. 질투는 나의 힘(11)

황당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솔깃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시엔의 흥미를 끌어낸 아이리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탄하기만 했다.

“대마녀께서 아카데미에 방문한다는 소식은 들었니?”

“네, 진작부터 귀가 따갑도록…….”

“그분께서는 이상고온의 원인이 아카데미 내부에 있다고 보셔. 만일 그 원인을 우리가 먼저 찾아낼 수만 있다면, 깊은 인상을 남기겠지.”

“제가 그분의 제자로 들어갈 수 있도록요?”

아이리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제야 대화가 좀 통한다는 듯, 옅은 만족감이 드러나는 몸짓이었다.

“그래, 드디어 우리의 손에 대마녀의 비전이 떨어지는 거야. 얼마나 멋진 일이니?”

“하지만, 제가 반드시 제자가 된다는 보장도 없고…….”

“그렇게 만들면 돼.”

탁, 하고 다시 쥘부채를 접으며 내뱉은 오만한 선언이었다.

“우선은 최대한 정당한 수를 동원해 보고, 그래도 안 된다면 경쟁자들을 차근차근 제거해 나가면 되지. 얼마나 간단한 이야기니?”

“대마녀께서 그 꼴을 두고만 보실까요?”

“세상사에 무관심한 분이시거든. 오히려 그 정도 고난은 이겨내야 한다며 콧방귀를 뀌실지도 모르지.”

“이안 경은요?”

화제는 놀라울 정도로 휙휙 전환되고 있었다.

피차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깊이 논의할 만큼 두 사람이 여유가 넘치는 성격은 아니었다. 도리어 두 자매는 필요한 용건만 간략히 정리하는 편을 선호했다.

시엔의 연회색 눈동자가 싸늘한 빛으로 가라앉았다.

“대마녀께서 오시는 것과, 이안 경이 무슨 상관이죠? 꽤 확신을 가지신 모양인데요.”

“대마녀께서 관심을 보이셨거든. 까닭은 알 수 없지만…….”

“빌테온 오라버니께서는?”

처음으로 아이리스의 말문이 막혔다.

푸른 눈동자가 다시금 시엔을 향했다. 그러나 시엔은 어느덧 예전의 침착한 모습을 꽤 되찾은 뒤였다.

날카로운 눈빛이 아이리스의 낯빛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 아직 동공이 세로로 찢어지지는 않았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든 그럴 용의가 있다는 얼굴이었다.

“언니까지 나설 정도라면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니란 소리잖아요. 그런데 빌테온 오라버니께서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 너무 이상하잖아요?”

“시엔, 제발.”

그 이야기는 하기도 싫다는 듯, 아이리스의 입에서 애원이 새어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1황자 빌테온, 그는 아이리스와 함께 차기 황권을 두고 경쟁하고 있는 사이였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예전에 말한 적 있지? 너와 나는, 그 인간과 본질적으로 달라. 넌 눈뿐만 아니라 심장도 파충류의 것을 타고났어… 그 한량과 네가 잘 어울릴 것 같아?”

“아시잖아요, 언니… 잘 어울리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란 사실을.”

시엔은 일부러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멍청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헤헤, 주고받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어요? 우리가 진짜로 잘 ‘어울리는’ 사이라면 말이에요.”

“……뭘 원하는데?”

코웃음을 치면서도, 아이리스의 반문에는 막힘이 없었다.

이러한 전개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 투였다. 그녀가 알던 여동생의 모습이 조금씩 되돌아오는 것 같아서, 도리어 살짝 기분이 좋아진 듯도 보였다.

그러나 아이리스의 평정이 깨질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건 빌테온 오라버니와도 이야기를 한 번 나눠본 후에.”

아이리스의 입에서 끄응, 하고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시엔과의 협상은 늘 이랬다.

한 번 우위를 점한 시엔은 그 어느 때보다도 끈질기고 뻔뻔했다. 적당한 대가를 내어 주지 않는 이상, 이리저리 줄을 대면서 흥정을 하려 들겠지.

심복으로는 쓰지 못할 여자였다.

그래서 오히려 더 신뢰가 가는 면도 있었지만.

대가만 확실하다면 시엔이 계약을 위반할 리는 없었다. 무언가가 ‘오고가는’ 사이란 이처럼 끈끈할 수밖에 없었다.

“너 진짜…….”

“그보다 ‘이상고온의 원인’이라뇨? 일대의 기후를 바꿀 정도라면, 보통이 아닐 텐데.”

어느덧 아이리스와 시엔의 동행은 오솔길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뒤따르던 호위기사들조차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래봐야 주위에 은신하고 있는 제국 첩보부 요원이 있을 테지만, 아이리스가 최대한 기척을 숨기려 한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더는 남의 눈에 띄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적절한 환경이었다. 아이리스는 결국 한숨과 함께 내막을 털어놓았다.

“……나도 자세한 원리는 몰라. 단지 대마녀께서 지나가듯이 언급했을 뿐이고, 그 외에는 단서는 존재하지 않거든.”

“그럼 어떻게……?”

“아카데미 내의 모든 사건을 조사했지.”

담담한 어조였으나, 그 한 마디가 함의하고 있는 바는 남달랐다.

아카데미 내의 모든 사건을 조사한다.

글로 쓰기는 쉬웠다. 하지만 그 한 문장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비용이 필요했다.

얼핏 계산기를 두드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무려 수만 명이 상주하는 아카데미 안에 돌던 모든 소문을 조사해야 헸겠지. 얼마나 많은 인력과 금전이 필요했을지, 가늠조차 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를 단기간에 동원해낼 수 있는 권력과, 결단을 망설이지 않는 추진력까지.

과연 차기 황권을 두고 다툴 만한 인재다웠다.

시엔의 경탄을 담은 시선이 아이리스를 향했다. 정작 아이리스는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 태연한 낯짝을 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이제 알겠니? 이게 바로 조직의 힘이야. 네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이안 경조차도 우리의 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그래서 ‘도구’라는 거야.”

느닷없는 타박이었다.

시엔은 무심코 욱해서 무어라 반론을 지껄이고 싶었지만, 이내 분을 삭이며 입술을 삐쭉이는 수밖에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이안 경을 언제 봤다고 이토록 멋대로 폭언을 쏟아낸단 말인가.

시엔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퉁명스러워졌다.

“……그래서, 성과는 있으셨나요?”

“당연히 있었지. 지금 그 결실을 확인하러 가는 길이야.”

드물게도 우쭐한 심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말투였다.

시엔은 의아한 눈빛을 하면서도 굳이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얌전히 기다리고만 있어도 아이리스가 줄줄 읊을 정보가 아닌가.

그리고 시엔의 추측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

“아카데미에는 내 심복이 머무르고 있거든. 알펜하우저의 쌍둥이, 과연 수완이 좋기는 해… 금세 아카데미 내에서 돌던 묘한 소문을 찾아냈더구나.”

“소문이라니요?”

“몇몇 학생들이 밤에 자취를 감추었다 돌아온다는 소문.”

자신만만한 목소리였으나, 시엔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기색이었다.

야밤에 자취를 감추었다 돌아오는 학생들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심야의 밀회를 즐긴다든지, 혹은 음주가무를 즐기러 간다든지.

이유야 무수히도 많았다. 이를 ‘이상현상’으로 규정하는 것조차 떨떠름할 만큼.

물론 이러한 청춘의 생리를 모를 정도로 아이리스는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창 아카데미를 다니는 중인 네게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 하지만 그 밤새 행방이 묘연했던 이들이 공통적인 변화를 보인다면?”

“흐음, 변화라…….”

“낮에 외출하는 비중이 현저히 줄었다고 하더구나. 설령 외출을 하더라도, 그늘진 곳을 좋아해서 이렇게 초목이 무성한 숲을 선호한다고.”

시엔의 표정은 여전히 아리송하기만 했다.

사실 의혹 수준에 불과한 이야기였다.

한여름이나 다름없이 푹푹 찌는 날씨가 이어지는 최근이었다. 당연히 낮에 외출하기 싫을 수도 있었고, 나가더라도 그늘이 드리워진 곳에 머무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이를 과연 ‘수상한 행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한 불신이 담긴 시선에도 아이리스는 옅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괜찮아, 어차피 우리가 둘러볼 곳은 한참 남아있으니까. 오늘은 네가 그 ‘눈’을 써서 그 아이의 동향을 살펴 주길 바라서 데려온 거야.”

“저 앞에 있군요? 그 ‘실종’되었다는 피해자 중 하나가.”

아이리스로부터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암묵적인 시인이었다. 시엔은 오랜만에 제 눈가를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앞으로는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하지만 그동안 남몰래 몇 번 써오기도 했고, 이만한 중대사안이라면 이안 경도 시엔을 탓하지는 않을 터였다. 눈에 띄지 않는 이상을 감지할 때 ‘용의 눈’만큼 유용한 능력은 얼마 없었으니까.

그때였다.

걸음을 옮기던 두 여인의 몸이 빳빳이 굳어버린 것은.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그 원인은 오솔길의 끄트머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이 비릿한 철분의 냄새가 함의하는 바는 하나뿐이었으니까.

피 냄새.

두 여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그리고 아이리스가 수신호를 보냄과 동시에, 주위에 포진해 있던 호위 인원들이 속속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명백한 경계 태세였다.

가장 안전한 선택은 이대로 호위 병력 중 하나를 앞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리스와 시엔은 일부러 현장을 향하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혹시 몰랐다.

발견된 직후의 현장이야말로 가장 많은 정보를 보존하고 있었다. 이를 눈썰미 좋은 두 여인이 살펴볼 수만 있다면, 의외로 결정적인 단서를 얻을지도.

한 걸음, 한 걸음.

두 여인의 몸이 앞을 향할 때마다 코를 찌르는 혈향도 더욱 강렬해졌다. 그에 맞추어 두 여인의 긴장감 또한 절정을 향하고 있었다.

팍, 팍.

날붙이가 살갗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저 너머에서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혈향의 진원지를 앞둔 두 여인이 숨을 죽였다.

순서는 단순했다.

호위대가 진입한 직후, 두 여인이 그 보호를 받으며 난입한다.

그 계획은 한 치의 오차조차 없이 이루어졌다.

다만 고려하지 못했던 점이 있었다면, 두 여인을 기다리고 있는 사내의 존재였다.

웅덩이를 이룬 피가 개울처럼 흐른다.

살점의 언덕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은 사내의 몸은 피투성이였다. 머리를 흠뻑 적신 피가 한 줄기의 땀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을 정도였다.

정작 그 몸뚱어리에 부상의 기미 따위는 보이지 않음에도.

그는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하고 있다가, 난입한 두 여인을 보며 호의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내의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며.

아이리스는 얼어붙은 채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단지 멍하니 사내가 만든 참상을 응시했을 따름이었다.

시체, 시체, 시체.

사람과 마수, 그리고 정체불명의 살점 덩어리가 뒤섞인 풍경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가장 끔찍한 장면 중 하나는, 그중에서도 아직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주인을 잃은 팔 하나가 꿈틀거리며 서더니, 손가락을 다리처럼 꼼지락거리며 아이리스에게로 달려들었다.

몸을 흠칫 굳힌 아이리스가 뒷걸음질을 치기 직전.

팍, 하고 핏물이 대지에 흩뿌려졌다.

키에에에에에-

단두대처럼 내리꽂힌 손도끼가 멋대로 움직이는 팔을 멈춰 세웠다. 그러고 나서도 한동안 버둥거리던 주인 잃은 팔은, 이윽고 처량한 신음 소리와 함께 힘이 빠져 버렸다.

그렇게 모두의 이목이 사내에게 집중되었다.

검은 머리카락, 금빛 눈동자, 그리고 허공을 부유하는 손도끼까지.

그 정체를 짐작할 만한 단서는 너무나도 많았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은, 도대체 그가 왜 이곳에 있는가.

그리고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이에 대한 사내의 해답은 간단했다.

“괴물이더군요.”

흐, 하고 헛웃음을 삼키며, 사내는 재차 제 결론을 강조했다.

“실종자들 말입니다… 괴물이 되어 있었어요, 당신들의 예상대로.”

시골 자작가의 차남치고는 꽤 오만불손한 말투였으나, 어째서인지.

아이리스는 감히 눈앞의 사내를 꾸짖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수수께끼 하나가 해결되었다.

사내 하나의 손에 의해서, 너무나 간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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