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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12)화 (512/649)

Chapter 512 - 7. 질투는 나의 힘(12)

짧은 전투를 마친 뒤, 노곤한 한때를 보내고 있던 나는 의외의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바로 시엔을 비롯한 정체불명의 일행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둘밖에 없어 보였지만, 나는 알았다. 예민해진 기감이 수십에 달하는 기척을 포착하고 있었으니까.

호위대인가.

숫자뿐만 아니라 실력까지 출중한 이들이었다. 이만한 인재들을 상시 동원할 수 있는 권력자는 제국을 통틀어도 많지 않았다.

내 동공이 자연스레 시엔의 옆에 선 여인을 향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은청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초면이었지만, 그 병약한 안색을 보자마자 문득 뇌리를 스치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제2황녀 아이리스.

황제를 제외하면 제국의 제일 가는 권력자 중 하나였다. 또, 수십에 달하는 실력자를 호위로 거느릴 만한 거물이기도 했고.

나조차도 일순 저 호위망을 어찌 돌파해야 할지 고민이 들었을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몇 초나 필요할까.

무심코 호위대를 제압할 계획을 짜던 내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아직 전투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모양이었다.

유력한 차기 황위 계승자를 겁박해야 할 까닭이 어디 있단 말인가.

쓸데없는 상상이었다. 무엇보다, ‘위협’이 목적이라면 더는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고.

아이리스 황녀는 몸을 바짝 굳힌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보석 같은 푸른 눈동자에서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한숨과 함께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기야,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줄 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어디를 보아도 주검과 살점, 핏자국뿐인 공터라니.

다만 내게도 사연은 있었다.

“이, 이안 경!”

한창 답답해 하던 차에 말을 걸어 준 이가 바로 황녀 시엔이었다.

경악과 염려를 반반 섞은 탄성이 터져 나오더니, 자그마한 소녀 하나가 후다닥 내게 달려들었다.

황녀의 덜덜 떨리는 손이 제 품을 뒤적였다. 그리고 이내 보드라운 손수건이 내 낯가죽을 어루만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정작 내 몸에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여간 호들갑은.

나는 황녀의 과보호에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차마 그 손길을 뿌리치지 못했다. 다만 괜찮다는 뜻으로 한 손을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시엔은 울상을 지우지 못했다. 염려를 함뿍 머금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이곳에, 이안 경께서…….”

“알펜하우저의 쌍둥이를 만났거든요. 원하는 정보가 있어서, 임시동맹을 맺었습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내 사정을 털어놓을 절호의 기회였다.

아이리스 황녀는 아직도 나를 향한 경계의 시선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미치광이 살인마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억울한 평가가 아닐 수 없었다.

향후를 위해서라도 이 피로 물든 첫인상을 씻어내야 하리라.

그래서 나는 곧장 이 참상의 내막을 늘어놓아야 했다.

어쩔 수 없이 피를 본 까닭에 대해서.

*

공터에 막 도착했을 무렵, 내 눈에는 낯선 여인이 비치고 있었다.

말없이 넋을 놓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기분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피부가 다소 창백하다는 느낌을 주는 여학생이었다.

내가 찾고 있던 인물이 틀림없었다.

불과 몇 분 전에 루나 선배로부터 입수한 인상착의와 일치하고 있었으니까.

야밤에 외출한 뒤 연락이 끊겼던 학생 중 하나였다. 이름은 ‘아델라’로, 며칠 전에 돌아온 이후에는 낮에 외출하는 빈도가 급격히 줄었다고 했던가.

‘실종자’.

나는 그 낱말이 주는 불길한 어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납치 및 개조는 암흑교단이 즐겨 쓰는 수법이었다. 수천 년 동안이나 제 정체를 들키지 않을 궁리만 하던 곳이었으니, 제 끄나풀을 감쪽같이 숨겨둘 수단이야 차고 넘치겠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당장 나만 하더라도 여동생을 바꿔치기 당한 적이 있었다. 아니, 일단 둘 다 내 여동생은 맞으니 어폐가 있는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다 복잡한 가정사를 떠올리고 만 내 낯빛이 우울해졌다.

돌이켜 보면, ‘탐욕’도 다가올 사건에 대해 언질을 준 적이 있었는데.

이제 와서 고민해봐야 소용 없는 주제였다.

그보다는 눈앞의 단서를 쫓는 편이 합리적이리라. 고민을 끝마친 내 걸음걸이가 이윽고 낯선 여학생을 향했다.

“……?”

의문을 담은 시선이 나를 되돌아왔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내가 다가오고 있는 꼴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일부러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하려 애를 썼다.

“안녕, 네 이름이 ‘아델라’니?”

“아, 네… 제가 바로 아델라예요.”

그러면서 아델라는 힐끗 내 망토색을 살폈다.

내 망토는 붉은색이었으며, 아델라의 망토는 갈색이었다. 이는 곧 아델라가 내 후배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갈색 망토는 2학년의 상징이었으니까.

반말에도 불구하고 아델라가 내게 예를 갖추는 이유였다.

나는 최대한 무해한 인상을 주기 위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물론 내 기감은 이미 한계까지 곤두선 뒤였다.

아델라의 전신을 샅샅이 훑어 보았으나, 아직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그야 당연했다. 그토록 어설픈 위장이었다면, 진작에 주변 사람들이 눈치 챘겠지.

하지만 아델라의 지인들은 별다른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알펜하우저의 쌍둥이조차 반신반의하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종자’들이 때아닌 폭염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이 난제는 이제 내 몫이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해도 마땅한 답이 도출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흔해빠진 인삿말을 던지는 수밖에 없었다.

“왜 혼자 있어?”

“……네?”

아델라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괜히 내 죄악감을 자극하는 순박한 얼굴이었다. 다시 되짚어 보니, 여자를 꼬셔 보려는 바람둥이의 전형적인 말투가 아니었나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내친김이었다.

나는 낯가죽에 철판을 깐 채 문답을 이어갔다.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길래… 나도 마침 혼자라서, 뭘 하고 있나 싶었거든.”

“아하하…….”

그러자 아델라의 낯빛에 서린 감정이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경계였지만, 이제는 호기심이었다.

이 사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더 꺼낼지 궁금해하는 기색이었다.

정작 난생 처음 시도해 보는 짓거리에 내 입꼬리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나는 최대한 아델라의 기대에 부응해 보기로 했다.

“우선 외로운 건 맞아?”

“글쎄요, 선배가 하기 나름 아닐까요.”

아델라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일단 합격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어설픈 작업질에 넘어가 준 아델라에게 내심 감사를 표하며, 그 옆에 조심스레 착석했다.

나무 그루터기는 의외로 넓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도 넉넉할 만큼.

그 이후에는 간단했다.

마음의 벽을 살짝 허문 아델라가 대화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낯간지러운 침묵이 이어질 때면 어김없이 아델라가 대화를 주도해 주었다.

“이안 페르쿠스 선배시죠?”

“응? 아, 그렇긴 하지.”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답했다.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본격적인 유명세를 치르기 시작한 지도 몇 달 되지 않은 탓도 있었다.

아델라도 아카데미에 재학 중일 테니, 당연히 날 알아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좀 부끄럽기도 했다. 마치 이름값을 이용해서 아델라를 꼬신 것만 같아서.

내 본의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델라는 의외로 짓궂은 면이 있었다.

“듣기로는 소문난 난봉꾼이라는데, 사실이에요?”

“음, 그건 다소 오해가 있는데…….”

“에이, 오늘 보니 맞는 것 같은데요.”

이제 내가 어색한 미소를 지을 차례였다.

저지른 죄가 있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바람둥이는 아니라면서 처음 보는 후배를 꼬시다니.

이보다 설득력 없는 소리가 있을까.

아델라는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자꾸만 나를 놀려댔다.

“혹시 나라마다 여자를 하나씩 두고 있는 거예요? 성국에는 성녀님, 제국에는 라이넬라 선배… 그럼 남부 열왕국은 누구지?”

“글쎄.”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는 너는 어떤데?”

“네?”

“상심한 얼굴 하고 있었잖아. 무언가 고민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혹시, 연애 문제라든가.”

내 물음에 아델라는 푸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귀여운 짓을 보기라도 했다는 듯.

“너무 고전적인 수법 아니예요? 위로하는 척, 상처 입은 여자를 낚아챈다…….”

“난 널 돕고 싶은 거야.”

그 한 마디가 신호였다.

아델라는 입을 꾹 다문 채로, 나를 멍하니 응시했다.

“정말 요즘 별일 없었어? 무언가, 견딜 수 없이 끈적한 감정이 끓어오른다든가.”

“……무슨 소리예요?”

“낯선 여자의 환영이 보일 수도 있고. 그때는 함부로 대답하면 안 돼, 네 영혼이 넘어가 버리거든.”

“아하하, 이안 선배…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신다. 제가 왜 그러겠어요?”

그럼에도 나는 흐음, 하고 묘한 소리를 내며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아델라는 어안이 벙벙하다는 낯빛을 하고 있었다. 내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듯.

내 망막 위로 다시금 아델라의 모습이 맺혔다.

“아델라, 너 말이야…….”

그러면서 내 상반신이 살짝 기울었다. 사내의 손길이 뺨을 스치고 지나가자, 아델라는 움찔 몸을 떨며 어깨를 움츠렸다.

내 손에는 여인의 머리카락이 몇 가닥 붙잡혀 있었다.

갈색의 머리카락 중 유달리 눈에 띄는 색채.

“……원래 머리카락이 회색이었니?”

그리고 아델라의 호흡이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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