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14 - 7. 질투는 나의 힘(14)
“흡혈귀한테 당한 거야.”
무정한 단언이었다.
그렇게 간추린 설명을 읊는 소녀의 표정은 심드렁하기까지 했다. 어느 여인의 삶이 끝장났다는 소식을 전할 때 취할 만한 태도는 아니었다.
‘엘시 선배’는 어느새 이파리 하나를 입에 물고 있었다.
폭이 좁고 길다란 풀잎이었다. 그 용도는 알 수 없다지만, 엘시 선배가 한참을 씹고 있다는 점에서 이름 없는 잡초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했다.
심지어 몇 분을 씹었는데도 반절이 채 사라지지 않다니.
어떻게 돼먹은 풀이 저렇단 말인가.
의문점이야 많았으나, 나는 애써 호기심을 꾹꾹 눌러 참았다.
어련히 엘시 선배가 알아서 설명해 주리란 믿음 때문이었다.
또, 저 멀리에서 걷고 있는 두 여인이 신경 쓰이기도 했고.
우리 둘은 바위와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두 여인을 미행 중이었다. 당연히 눈에 띄는 행동은 최대한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대화도 필요한 정보만 교환하는 정도가 좋았고.
내 기대에 부응하듯 엘시 선배는 시큰둥한 어조로 부연설명을 더해 갔다.
“흡혈귀는 타인의 피를 빨아 제 혈족을 만드는 능력을 지니고 있거든. 그렇게 탄생한 흡혈귀의 혈족들은 또 다른 희생양의 피를 빨아 힘을 키워 가지.”
“저 ‘실종자’도 그렇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딱 봐도 오행의 균형이 무너져 있잖아.”
엘시 선배는 당연한 걸 되묻는다는 투로 그렇게 답했지만, 내 눈빛에 어린 의구심은 아직 풀리지 않은 채였다.
그 시선을 마주한 엘시 선배의 머리가 갸웃, 기울기를 더했다.
“뭐, 왜? ‘오행’의 균형이 무너져 있다고.”
“그걸 어떻게 아는데요?”
“넌 왜 모르는데?”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문이 내 가슴에 자그마한 생채기를 냈다.
아무리 빙의를 당했더라도 저 몸뚱아리는 ‘엘시 선배’의 것이었다. 설마 그 엘시 선배가 나를 이처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볼 줄이야.
내가 시무룩해지자 소녀는 그제야 아차차, 하고 제 이마를 짚었다.
“맞다, 맞다… 넌 아직 좆밥 페르쿠스였지.”
“좆밥… 뭐라고요?”
난데없는 모욕에 나는 일순 넋이 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든 말든, 엘시 선배는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정 싫으면 허접 페르쿠스라고 하자. 쯧, 하여튼 사람 귀찮게 한다니깐…….”
엘시 선배의 손가락이 톡톡, 하고 제가 물고 있던 이파리를 두드린 것은 그때였다.
내 눈이 무의식적으로 엘시 선배의 입술을 향했다. 마침 그 앙증맞은 입술은 내 의문을 해소해 주기 위해 달싹이고 있던 참이었다.
“오행이란 다섯 원소를 뜻하는 거야. 천지만물은 이 오행의 균형 아래 유지되고 있지. 각자 특화된 원소가 다를 수는 있어도, 오행의 균형이 깨질 정도는 아니거든.”
“처음 듣는 소리인데요.”
“꼬우면 우리 스승님한테 따져.”
그러니 또 할 말이 없었다.
‘엘시 선배’의 스승은 다름 아닌 대마녀가 아니던가.
잠시 내가 침음을 삼키는 사이, 엘시 선배는 다시금 제가 물고 있던 이파리를 가리켰다.
“그 오행의 균형을 살펴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물건이, 바로 이 ‘세계수의 어린순’이라는 거지.”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내 고개가 주억거리며 끄덕여졌다.
난데없이 엘시 선배가 어울리지도 않는 채식주의를 실천한다 싶었는데, 그러한 사정이 있다면 이해할 만했다.
나는 자연스레 손을 내밀었다.
“그럼 저도 한 개피만 주시죠.”
“없어, 새끼야.”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듯 숨을 토해내며 엘시 선배는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게 구하기 쉬운 물건인 줄 알아? 세계수 인근에서만 구할 수 있는 약초라고. 대개의 학자들은 이 어린순을 가공하는 방법조차 알지 못해.”
“그럼 엘시 선배는 어떻게 구한 겁니까?”
“종일 시장만 쏘다녔지, 임마. 그래야 만나게 해준다면서…….”
그러면서 엘시 선배는 갑작스레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힐끔힐끔 내 낯빛을 훑어보는 꼴이, 내가 그 약속을 지킬지 못내 불안한 모양이었다.
사실 약속도 아니었다.
내가 들어주고 싶다고 해서 들어줄 수 있는 소원도 아니었으니까.
엘시 선배의 ‘후배’를 만나게 해달라던 부탁.
나는 일부러 엘시 선배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좆밥 페르쿠스’라 잘 모르겠는데요.”
“야 이… 흥, 하여튼 속 좁은 건 똑 닮아 가지고.”
그렇게 핀잔을 주면서도, 엘시 선배는 굳이 내게 확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배려일지도 몰랐다.
혹은, 마지막 희망마저 놓고 싶지는 않은 걸지도.
고민할수록 마음만 불편해지는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힐끗 엘시 선배가 물고 있던 이파리를 가리켰다.
“그 이파리는 아직 남아있잖습니까?”
“응? 당연히, 앞으로 1시간은 쓸 수 있는… 설마?”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엘시 선배의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지며, 목청을 높이기 직전.
내 손이 저 너머에서 사이좋게 걷고 있는 두 여인을 향했다.
‘실종자’와 엠마.
우리의 목적은 저 둘을 쫓는 것이었다.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곳까지.
결국 엘시 선배는 목젖까지 치달은 욕지거리를 꿀꺽 삼켜야 했다.
“……너, 진짜 그러지 마라. 나 임자 있는 몸이야.”
“그 풀잎 반토막 내서 주면 되잖습니까? 누가 물고 있던 부분 달랬나.”
“그러다 우리 ‘후배’가 오해라도 하면? 앙? 네가 책임이라도 질 거야?”
누가 첫 연애 아니랄까 봐.
남자친구한테 지극정성인 그 마음만은 알아주어야 했다.
그 눈꼴 시려운 광경에 나는 무심코 내 동료 엘시 선배가 그리워지고 말았다. 그리고 성국에서 한창 고생 중일 성녀와, 북부에 남은 델핀 선배까지도.
물론 아카데미에도 내게 소중한 사람은 둘이나 더 남아 있었다.
세리아와, 그리고 또 하나.
내 낯빛이 문득 어두워졌다.
“……그럼 하나만 알려 주시죠. 저 둘 중에서, 오행의 균형이 무너진 쪽은 누구입니까?”
“왜?”
정녕 의문이라는 듯, 엘시 선배는 나를 흘깃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너, 저 둘 중에 아는 사람 있냐?”
“오른쪽에, ‘엠마’라고 있습니다. 제 소중한 동료 중 하나예요.”
그럼에도 엘시 선배의 궁금증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일순 미간을 좁혔던 엘시 선배의 입에서 묘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처음 듣는… 흐음, 아니야. 그러고 보니, 어디서 본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됐으니까, 어떻습니까?”
당연히 내 관심사는 아니었다.
나는 혹여 순진한 엠마가 악랄한 사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을까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둘 중에 누가 무너졌습니까. 둘 중 한 사람만 무너진 거 맞죠?”
“아이 참, 뭔가 떠오를 것 같았는데… 그래! 저 옆에 있는 여자만 무너져 있네.”
다행이었다.
슬슬 오솔길은 끝으로 이르러, 공터에 닿기 직전이었다.
거사를 치르려면 이 틈에 치르는 편이 좋았다.
내가 허리춤의 손도끼를 만지작거리자, 엘시 선배는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어쭈, 힘 쓸 생각 만만이시구만?”
“딱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나는 땅을 박차나고 나가기 전에, 엘시 선배를 돌아보며 물었다.
“흡혈귀에게 당한 사람이, 원래대로 돌아갈 가능성이 존재합니까?”
아주 중대한 물음이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 앞으로의 내 방침 또한 재고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일전에 나와 전투를 벌인 아델라야 상대가 선공을 했다지만, 지금은 구도가 정반대였다.
흡혈귀의 권속은 위험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위험요소를 엠마의 곁에 둘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당연히 제거해야 한다.
하지만 흡혈귀의 권속을 되돌릴 수단이 존재한다면?
무분별한 살생은 자제해야 했다.
좀 더 힘들더라도 제압을 최우선으로 하는 수밖에.
이를 모를 엘시 선배가 아니었다.
드물게도 엘시 선배는 곧장 답을 내놓지 못했다.
머뭇거리면서, 입술을 여닫기를 한참.
결국 고심 끝에 나온 결론은 고작 두 음절뿐이었다.
“……없어.”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도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일부러 나는 몸을 숨기지 않고 저벅저벅 걸음을 내딛었다. 저 앞에서 느긋이 걷고 있던 두 여인을 따라잡을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계획대로였다.
갑작스레 피를 보면 심약한 엠마가 깜짝 놀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니 최대한 엠마를 떼어놓은 뒤, 흡혈귀의 권속이 된 ‘실종자’를 제거한다.
그렇게 재차 계획을 점검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문득 나는 ‘실종자’의 뒷모습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실종자 명단까지 샅샅이 훑어본 나였다. 물론 머리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라, 간단한 인상착의와 성을 제외한 이름 위주로 외우긴 했지만 말이다.
내 기척을 먼저 눈치 챈 쪽은 엠마였다.
적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의 고개가 뒤를 향하더니, 이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 이름을 부르짖었다.
“이안!”
나는 늘 그렇듯이 옅은 미소와 함께 엠마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하지만 이윽고 그 옆에 서 있던 여인이 고개를 돌리자.
몇 달 전의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금빛 머리카락, 아카데미 제복으로도 숨기지 못하는 풍만한 곡선과 그 도도하고 재수 없는 표정까지.
한 번 보를 타 넘은 기억의 물길은 이내 뇌의 혈관 곳곳을 채워 넣었다.
당연히 이름은 모를 수밖에.
성밖에 기억하지 않고 있던 상대였으니까.
그리고 금빛 머리카락 따위야 세상 어디에나 있는 색이 아니던가.
흠칫 몸을 굳힌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상대 또한 나를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호흡을 멈췄다. 그렇게 침묵이 흐르기를 몇 초.
엠마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아하하… 두 사람은 구면이지? 사실, 그 이후로 많이 친해졌거든.”
먼저 정신을 차린 쪽은 금발의 여인이었다.
화들짝 제정신을 되찾은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네요, 이안 경.”
“네, 그렇군요…….”
나는 멍하니,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루페시아 영애.”
기묘한 인연에 대해 생각했다.
엠마의 뺨을 후려친 대가로 내게 팔다리를 절단 당했던 여인.
나는 또 다시 그녀를 토막 날 운명에 처했다.
그것도 엠마의 친우가 된 여인을.
실로 기구한 인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