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15 - 7. 질투는 나의 힘(15)
침묵은 언제나 무겁다.
묵직해진 공기가 폐부를 짓누르며 사고를 방해했다. 나는 머뭇거리면서, 손아귀를 쥐락펴락 했다.
도끼 자루를 쥐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처럼 내 굳은 결심이 흔들릴 때까지 필요한 시간은 고작 몇 초에 불과했다.
루페시아 영애.
솔직히 말해, 껄끄러운 상대였다.
개인적으로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던 탓이었다.
몇 달 전의 루페시아 영애는 비열하고 잔인했다. 단지 엠마가 평민이라는 이유만으로 폭언과 폭력을 행사했고, 이에 분노한 나는 루페시아 영애와 그 일당을 응징했다.
무려 일행의 팔다리를 모조리 토막 내면서.
루페시아 영애가 먼저 잘못하긴 했지만, 내 대응이 과했다는 점도 부정하기는 힘들었다.
이를 빌미로 시엔은 나를 퇴학시키려 들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루페시아 영애는 끝내 나를 용서했다.
몇 번이고 병실에 찾아 온 엠마의 정성에 마음이 동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듣지 못했는데, 설마 엠마의 절친한 벗 중 하나가 되어 있을 줄이야.
고마웠다.
그래서 나는 차마 날붙이를 뽑아들 수가 없었다.
그저 움찔거리면서, 이를 악물었을 따름이었다.
죽여야 하는데.
내가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루페시아 영애는 헛기침을 하며 살짝 내 시선을 피했다.
아직 나에 대한 공포가 온전히 지워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마침 잘 됐네요, 엠마.”
“응, 응?”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엠마가 루페시아 영애한테 반말을 쓰고 있다니.
나를 제외한 귀족들에게는 언제나 깍듯이 공대를 했던 그 엠마가 말이다.
그만큼이나 서로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두 여인이 서로 속닥거리는 소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기껏 준비한 물건이잖아요? 기회가 있을 때 얼른 줘 버려야죠.”
“하, 하지만 좀 더 좋은 분위기가…….”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인데, 무슨 분위기까지 따져요? 그러지 말고 얼른 주기나 해요… 얼른!”
결국 엠마는 쿡쿡, 제 옆구리를 찌르는 루페시아의 재촉에 못 이겨 엉거주춤 내 앞으로 나섰다.
그 와중에도 내적 갈등을 반복하고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다시 보니, 엠마는 등 뒤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붉어진 낯빛이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저, 이안? 그러니까… 조금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준비한 게 있는데.”
“어? 아, 응…….”
이쯤 되니 나도 도저히 검을 뽑아들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루페시아 영애는 나중에 처리해도 된다.
엠마의 눈앞에서 절친한 친구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며, 움찔거리던 손에 힘을 풀었을 무렵이었다.
눈을 질끈 감은 엠마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가녀린 두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은, 시린 예기를 품은 날붙이였다.
손도끼.
자루부터 고급스러웠다. 날은 또 어찌나 예리한지, 광채마저 방울져 떨어진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홀린듯이, 나는 침묵 속에서 그 손도끼를 받아들었다.
묵직하면서도 가벼웠다.
일견 모순된 진술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 손도끼는 그러한 역설을 실현해내고 있었다. 가볍고 튼튼한 소재를 쓰는 동시에 무게 중심을 잘 잡았다는 뜻이었다.
이름 난 장인의 작품이리라.
당연히 한 푼 두 푼 할 물건은 아니었다. 최소한 1만 골드, 아니 그 배 이상을 주더라도 구하기 힘든 명품이었다.
너무 놀라면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지금의 내가 딱 그 꼴이었다.
고작해야 얼빠진 목소리만을 잇새로 흘렸을 뿐.
“어디, 어디서 구한 거야……?”
“그동안 모아 둔 돈이 조금 있었거든.”
‘조금’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식비가 없어 버섯을 따러 다니던 엠마였다. 그동안은 재료비 때문에 그런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니었다.
엠마는 그렇게 돈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 보답을 하기 위해서.
다만 의문은 아직 남아 있었다.
아무리 엠마가 돈을 열심히 모았다 해도 이만한 금액이 모일 리는 없었다. 수만 단위의 골드는 어지간한 귀족 가문도 동원하기 힘들어하는 규모였다.
당연히 평민 하나가 근검절약을 해서 모을 수 있는 금액은 아니었다.
이러한 의구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소되었다.
“사실, 대부분은 시엔 전하께서 지원해 주시긴 했는데… 마침 네 손도끼가 생각나더라고.”
내 눈이 흘깃 허리춤에 매달린 손도끼를 향했다.
나는 딱히 무장에 관심이 많지 않았다. 그야 좋은 무장을 쓰면 좋긴 좋겠지만, 나는 전장에서 혼절하거나 중상을 입고 기절한 적도 부지기수였다.
기껏 비싼 값을 주고 구매한 무장을 그렇게 잃기는 싫었다.
그래서 손쉽게 교체 가능한 기성품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하이 익스퍼트’고, 어지간한 상대한테는 당하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욕심을 부려도 괜찮을까.
엠마는 여전히 쑥쓰럽다는 듯 내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 마음에 들어? 난 그렇게 비싼 물건을 사본 적이 없어서, 에리가 도움을 줬거든.”
“……에리?”
“아, 리에리 루페시아! 누구인지는, 알지?”
내 시선이 자연스레 엠마의 시선을 쫓았다.
그 끝에는, 헛기침을 하며 애써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려는 루페시아 영애가 자리하고 있었다.
“흠흠, 얼마 전까지 약초나 캐던 평민이 뭘 알겠어요? 귀족된 의무로서, 다소의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나는 한참을 침묵했다.
죽여야 하는데.
죽여야만 하는데.
그렇게 되뇌이면서도, 내 손은 차마 엠마의 손을 놓지 못했다.
기어코 내가 짜낸 한 마디는 우스갯소리에 불과했다.
“……그런데 왜 검이 아니라 손도끼야? 내 주무장은, 검인데.”
의외의 질문이었는지 엠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두 눈을 깜박이기를 얼마쯤, 이윽고 엠마의 뺨에 어여쁜 봉숭아빛이 떠올랐다.
“검은, 좀 비싸서… 아하하…….”
과연 엠마다운 이유였다.
그렇게 쓴웃음을 깨물면서도, 나는 흘러넘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엠마를 살짝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엠마의 호흡이 멎었다. 나는 그 틈에 진심을 담아 여인에게 말했다.
“고마워, 엠마. 이따 단 둘이서 보자… 공방으로 찾아갈게.”
“……으, 응?”
내 말을 들은 엠마는 드물게도 멍청한 소리를 냈다.
떨리는 숨결과 휘둥그레 뜨인 눈동자가 엠마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복잡해질 대로 복잡해진 나는, 우선 한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이따 봐.”
재차 내뱉어진 내 제안에, 엠마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삐걱이는 걸음걸이가 걱정스러웠다. 팔과 다리의 호흡이 맞지 않아, 루페시아 영애조차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나와 엠마를 유심히 살필 지경이었다.
하지만 내가 무슨 짓을 했겠는가.
루페시아 영애는 엠마의 재촉에 못 이겨 걸음을 옮겼고, 이내 공터에는 나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내 손에는 아직 손도끼가 들려 있었다.
늦지 않았다.
이대로 뒤를 쫓아, 손도끼를 던져 끝장을 내버린다.
살인쯤이야 이미 몇 번 해봤다. 몇 년 동안 동고동락한 친구도 얼마 전에 목을 벤 참이었다.
그래, 해야만 하는데.
팍, 하고.
내던진 손도끼가 지반에 틀어박혔다. 마치 장인의 혼을 담은 무구는 다르다는 듯, 지반을 파고드는 소음조차 얼마 느껴지지 않는 투척이었다.
이윽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낯가죽을 훑어 내려야 했다.
이죽이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따라붙은 것은 필연이었다.
“아하, 누구신가 했더니 여자친구였어? 우리 ‘허접 페르쿠스’, 능력도 좋아라… 저렇게 헌신적이고 예쁜 아이를 꼬셔 버렸네?”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사실대로 털어놓자면 끝도 없을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변명 대신 침묵으로 일관하기를 택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놀리기를 멈출 엘시 선배가 아니었다.
“그리고 기세등등하게 나서더니, 뭐? 뒤쫓아 가지 않아도 돼? 저러면 놓칠지도 모른다?”
“루페시아 영애가 머물 곳은 뻔하니까요. 그리고, 또…….”
그렇게 핑계를 이어가던 내 말문이 다시금 닫혔다.
고민 끝에 흘러나온 한 마디는, 결국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할 나약한 소리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왜 나한테 물어 봐?”
뻔뻔스러울 만큼 시원한 대답이었다.
엘시 선배는 팔짱을 낀 채로, 주지의 사실을 입에 담았다.
“선택도, 후회도 네 몫이야. 행여나 남에게 미룰 생각은 하지 마.”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나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엘시 선배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어딘가 머나먼 곳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그래도, 뭐. 너한테도 남아 있긴 하구나.”
“뭐가 말입니까?”
“내 ‘후배’의 모습.”
괜히 볼을 긁적이면서, 엘시 선배는 새침하게 눈을 돌렸다.
“자랑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내 후배도 그랬거든… 상냥하고, 또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해서.”
과거의 어느 지점을 헤집던 소녀의 입가에 흐, 하고 헛웃음이 맺혔다.
허탈한 웃음소리였지만, 그 안에서는 은은한 단내가 풍기고 있었다.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고 있다는 뜻이리라.
“내가 아니면, 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까 싶었는데… 그 후에도 잘 지냈겠지?”
차마 대답을 하기 힘든 말이었다.
잘 지냈냐고?
이제는 내가 엘시 선배의 시선을 피할 차례였다. 대신, 주의를 돌리기 위한 짓궂은 질문이 이어졌다.
“그런데, ‘허접 페르쿠스’라고요?”
“응, 그런데?”
엘시 선배는 여전히 무슨 문제 있냐는 태도였다.
그 태평한 낯짝이 살짝 짜증이 나서, 나는 더욱 독한 마음을 먹고 엘시 선배를 괴롭히기로 했다.
“그럼 그 ‘후배’는 뭡니까?”
“……뭐?”
“뭐라고 불렀을 것 아닙니까. 설마 후배님, 어쩌니 하지만은 않았을 거고.”
내 지적에 엘시 선배의 낯빛이 서서히 창백해졌다.
허점을 노출한 사냥감의 얼굴이었다.
물론, 엘시 선배도 내게 저항을 하기는 했다.
“으, 응? 그렇게 불렀는데? 야, 우리 사이에 무슨 애칭이…….”
“그럼 그 ‘후배’한테도 물어봐야겠네요.”
그러자 꾹, 하고 엘시 선배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푸른 눈동자가 갈팡질팡하며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이쯤에서 결정타를 날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일 서로 이야기가 맞지 않으면, 제가 착각했을 수도 있잖습니까. 그러니까…….”
“……쿠스.”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
하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 워낙 자그마한 음량이라 나조차도 제대로 분간하기 힘든 대답이었다. 내가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내자,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던 엘시 선배가 폭발했다.
“’내 사랑 페르쿠스’라고 불렀다, 이 새끼야! 오글거리냐? 병신 같아? 그럼 어쩔 건데, 개자식아!”
“아니, 그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너, 너 진짜 그러는 거 아니다… 응? 내 순정을, 응? 막 이용해서, 그렇게 그렇게……!”
결국, 나는 이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엘시 선배에게 사죄의 말을 읊어야 했다.
엠마가 모든 준비를 끝마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
몇 시간 후, 공방에서 나를 맞이한 엠마는 무언가 달라진 모습이었다.
“……와, 왔어?”
일단 제복 차림이 아니었다.
얇은 천이 하늘거리며 은근히 속살을 비치는 재질이었다. 엠마도 이러한 차림은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던지, 내 시선을 잘 마주치지 못했다.
입을 옷이 없었나.
나중에 몇 벌 사줘야겠다.
나는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엠마에게 말했다.
“엠마, 혹시 지난번에 만들어 둔 약 남아있어?”
“으, 응? 무슨 약?”
엠마는 오늘따라 허둥지둥하는 모습이었다.
내게 반문하는 목소리조차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지만, 일단 할 일이 남아있던 참이었다.
용건부터 처리하는 편이 옳았다.
“페르쿠스 영지로 떠나기 전에 부탁했던 거. 그, 몇 방울만 먹어도 혼절한다는…….”
“아, 아아! 그거 말이지?”
엠마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헐레벌떡 약품 진열대로 향했다.
본래라면 그 독극물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해야 정상인데.
그러한 의문을 제대로 품기도 전, 엠마는 진열대에서 꺼내온 자그마한 병을 내게 건넸다.
“이, 이거야… 그런데 왜?”
“고마워, 엠마.”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엠마에게 그렇게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보자.”
그리고 약병의 뚜껑을 따고, 그대로 내용물은 목 안으로.
풀썩,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내 의식이 흐릿해졌다.
“세상에… 이, 이안? 이안?! 지금, 무슨 짓을… 어, 어떡해!”
엠마의 경악성을 배경으로 말이다.
이후로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정신을 차린 내 앞에는, 낯익은 금빛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피로한 눈빛을 한 흑발의 사내.
“……무슨 속셈이냐, 애송아.”
미래에서 온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