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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16)화 (516/649)

Chapter 516 - 7. 질투는 나의 힘(16)

벌판은 황량했다.

사내의 무의식은 늘 이랬다. 우울하거나 암울하다는 감상조차 들지 않는, 삭막하고 건조한 풍광.

그 한복판에서 금빛 눈동자가 홀로 빛나고 있었다.

감정의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는 시선이었다.

건조하다 못해 말라비틀어졌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메마른 수건조차도 이보다는 더 촉촉하리라.

그러나 나는 알았다.

이제 사내의 심장은 누더기처럼 너덜거리고 있었으나, 한때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태양처럼 뜨겁게 뛰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신과 운명, 세상을 모두 원망했던 사내였다.

이처럼 망가지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으리라.

물론 저 사내가 내 연민 따위를 바랄 리는 없었다.

황무지에 홀로 남은 바위 위에 걸터앉아서, 그는 재차 싸늘한 의문을 내뱉었을 따름이었다.

“무슨 속셈이냐고 물었다만.”

짙은 피로가 배인 음색이었다.

마치 내가 사내의 망중한을 방해하기라도 했다는 투였다. 종일 무의식의 심처에 틀어박혀 과거나 회상하는 신세면서 말이다.

이전에 비해 가까워지긴 했지만, 여전히 마주하기 까다로운 사내였다.

내 입에서는 절로 퉁명스러운 반문이 새어 나왔다.

“무슨 속셈이냐니?”

“그러지 않고서야 네가 이곳을 찾아올 리가 없지. 또 무슨 헛짓거리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슬쩍 팔짱을 끼면서, 사내는 묵직한 목소리로 단언했다.

“나는 마음씨 좋은 사제가 아니다, 애송아… 네가 징징거리고 싶을 때마다 들어 주는 사람이 아니라고.”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반박을 내뱉어야 했다.

“무슨, 내가 언제 징징거렸다고……!”

“얼마 전에.”

그 날카로운 지적에 내 말문이 턱, 하고 막히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있었다.

사내의 말마따나, 당장 얼마 전에도 그러지 않았던가.

“울고불면서 애원하지 않았나? 뭐라 했더라, 이제 그만두고 싶다고?”

“아니, 그건……!”

뇌리를 덮치는 기억의 파도가 있었다.

산상법정에서 나는 수백 번의 죽음을 경험했다. 말이 ‘수백 번’이지, 누구든 단 한 번밖에 겪지 못할 고통을 수없이 반복한 꼴이었다.

당연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한계에 달한 내가 울고불고 했던 기억, 있긴 했다.

하지만 너무 치사하지 않은가.

누구라도 견뎌내지 못할 상황이었다. 궁지에 몰려 있던 시절을 굳이 끄집어 내어 무안을 주다니.

나로서는 억울한 마음에 시치미를 떼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그때고!”

흥, 하고 코웃음 소리가 내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비웃음조차 건조한 사내였다. 나는 결국 창피한 마음에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려야 했다.

사내의 말이 옳기는 했다.

내게 일부러 마취약을 흡입해 혼절하는 취미 따위는 없었으니까.

이처럼 예외적인 행동에는 대개 마땅한 사유가 뒤따르는 법이었다.

사내는 제 추론을 하나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내 힘이 필요해졌나?”

“아니, 아직.”

“혹은 엿보아야 할 기억이 있다든가?”

“그것도 아닌데.”

“그럼 뭐지?”

싸늘한 안색을 지우지 않으면서, 사내는 무심히 되물었다.

“우리가 한담을 나눌 정도로 친해진 기억은 없는데 말이지.”

“물어볼 게 있어.”

흐음, 하고 사내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 나왔다.

그는 명백히 이상하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잊었나? 내가 줄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야. 그리고 결정적인 단서를 줄수록, 내가 사건에 개입할 여지는 적어지지.”

“지난번에 많이 아껴둔 걸로 아는데.”

“그래, 그렇지. 하지만 의미 없이 날려도 좋을 정도는 아니야.”

칼 같은 거절이었다.

그 단단한 어조만 보더라도 협상의 여지는 없어 보였다. 사내는 슬쩍 시선을 돌리며 무관심을 표했다.

“단서는 이미 충분히 주어졌다. 그 이후는 네가 하기 나름…….”

“흡혈귀에 당한 이들을 되돌릴 방법은 없나?”

의외의 질문이었던 탓일까.

막힘없이 이어지던 사내의 말이 끊겼다. 의아하다는 시선이 다시금 나를 향했다.

“정말 없는 거야? 필요하다면 미래의 정보를 줘도 좋아.”

사내는 한참 동안이나 대답이 없었다.

단지 입을 꾹 다문 채로, 조용히 내 낯빛을 살필 뿐이었다. 그러기를 얼마쯤.

드디어 열린 사내의 입술 사이로 짜증스러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또 오지랖이군.”

“사건 해결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칠 문제야.”

“어련하실까.”

그렇게 내 주장을 일축하면서, 사내는 진지한 낯빛으로 조언했다.

“진심으로 조언하는데, 그딴 수단을 찾을 시간에 ‘흡혈귀’를 찾아내는 편이 더 나을 거다. 희생자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당신이 대수림에서 수련하던 시절의 기억.”

내 응수에 또 다시 사내의 말문이 막혔다.

무슨 말을 하는지 두고 보겠다는 듯, 사내는 침묵을 지키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때 ‘사매’라 부르던 여자 말이야, 엘시 선배 맞지?”

“그렇다면?”

“그 ‘사매’가 엘시 선배에게 빙의했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를 사실이었다.

은근히 사내는 내가 무얼 하고 지내는지 알고 있을 때가 많았다. 지난번에 성자와 맞붙던 도중에도 내게 힘을 빌려주겠다고 제안했을 정도였으니.

허나 지난 며칠 동안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사내의 낯빛에 인 균열만 보더라도 알 만했다. 사내는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한동안 고민에 잠겼다.

잠재적인 결론을 내릴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괴로운 한숨을 토해냈다.

“……이래서 레토 이야기를 잘 들어뒀어야 했는데.”

“그 엘시 선배가 무언가를 아는 것 같았거든.”

사내는 여전히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상정 외의 사태에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헷갈리는 듯했다. 그는 시선을 이리 돌렸다가, 저리 돌렸다가. 끝내는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사내가 망설이는 동안 나는 엘시 선배와의 지난 대화를 떠올렸다.

흡혈귀에게 당한 희생자를 되돌리는 방법?

엘시 선배는 ‘없다’라고 분명히 말했다. 하지만 그 답변이 나올 때까지의 간극이, 나는 꽤 마음에 밟혔다.

나중에나 깨달은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당신도 ‘대마녀’를 스승으로 두고 있었잖아. 흡혈귀를 가두고 있는 결계나, 흡혈귀에 대해서도 잘 알 수밖에…….”

“……괜찮아 보이던가?”

망설임의 끝.

가까스로 사내가 내뱉은 반문이었다. 주어는 생략되어 있었으나, 그 저의를 파악하지 못할 내가 아니었다.

일시적으로나마 사내와 추억을 공유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차오르는 호기심을 삼키며 말해야 했다.

“그래. 원망도, 미련도 없어 보였어.”

그리고 또 다시 침묵.

사내의 입술이 달싹일 때까지는, 몇 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알고 있을 수밖에 없지.”

아직 제 결단에 확신을 가지지 못했는지,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며 내뱉은 말이었다.

그의 눈빛에서 복잡한 심경이 느껴졌다. 그래봐야 흐릿한 기색에 불과했지만, 심장이 마모된 것처럼 행동하던 평소와는 현격한 격차가 있는 모습이었다.

그에게도 아직 '감정'이라 부를 만한 것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잠깐.

“’사매’의 연구 주제였으니까.”

이어진 사내의 고백에, 나는 그대로 사고가 정지하고 말았다.

'사매'의 연구 주제라니.

그럼 엘시 선배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단 소리가 아닌가.

혹은, 말 그대로 가망이 없거나.

*

헐떡이면서 눈을 뜨자, 맹렬한 통증이 두개골을 두드렸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기억들이 흐릿한 장면을 망막과 고막에 새겨 넣었다.

"그럼 당신이 남긴 글귀는 뭐지? 도대체 무슨 의도로 써놓은 거야?"

"유용한 배합법."

사내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느닷없이 소환된 첫사랑의 존재에도 그의 동요는 짧았다. 대화가 몇 번 오고가기도 전에 그는 이미 완전한 평정을 되찾은 뒤였다.

“언젠가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지. 절대로 잊지 말도록.”

묘한 여운을 남기는 말이었다.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절대’ 잊지 말라니.

내가 그러한 의문을 채 입에 담기도 전이었다.

일순, 세계가 흔들린다.

쿵, 하고 축이 무너진 건물처럼 시야가 기울었다. 파열음과 함께 낯익은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이안, 이안… 괜찮아?! 어, 어디… 이 근처에 약이 있었는데……!]

모든 것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직감한 나는 다급히 용건을 입에 담아야 했다.

“……당신 ‘사매’가!”

난데없는 이변에도 사내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무심한 눈길로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목젖을 치고 올라오는 구역질을 가까스로 삼키며 외쳤다.

“당신 사매가, 당신을 보고 싶어해.”

그때였다.

쿵, 하고 다시 한 번 세계가 무언가에 충돌하듯 뒤흔들렸다.

더는 견디지 못한 내 몸이 땅 위로 엎어졌다. 어떻게든 사내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흔들리는 시야는 그 자그마한 자유마저 내게 허락치 않았다.

다만 귀에 들려오는 것은 사내의 종잡을 수 없는 목소리뿐.

“글쎄…….”

침음도, 한숨도 아닌 메마른 음색.

사내는 그 어조만큼이나 싸늘한 답변을 남겼다.

“나는 보고 싶지 않은데.”

이에 대해 내가 무어라 논평을 남기기도 전이었다.

자그맣던 균열은 이윽고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세상이 유리창처럼 깨져 나갈 때까지는 순식간이었다.

정신을 차리니, 나는 약 냄새가 진동하는 침대 위에 눕혀져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울먹이는 엠마의 상이 망막에 맺혔다. 그제야 전후 사정을 파악한 내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다소 안타깝기는 했지만, 어쩌겠는가.

울고 있는 엠마 앞에서 감히 원망의 말을 읊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눈물을 펑펑 쏟는 엠마를 품에 안고 한참이나 달랬을 따름이었다.

위로, 포옹, 그리고 입맞춤이 이어진 뒤에야 엠마는 가까스로 울음을 그칠 수 있었다.

내가 자그마한 쪽지를 꺼내든 것은 그 무렵이었다.

“엠마.”

“……으, 응?”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았던지, 엠마는 훌쩍이는 소리를 삼키며 그렇게 답했다.

내가 심하기는 했나.

하지만 기왕 내친김이었다.

나는 곧장 엠마에게 쪽지를 건넸다. 그곳에는, 사내가 편지 뒤편에 적어놓은 글귀가 옮겨져 있었다.

“혹시, 이 배합식에 대해 알고 있어? 내 주위에는 전문가가 너밖에 없어서…….”

아직 엠마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 있던 차였다.

내 검지가 엠마의 눈물을 대신 훔쳤다. 이러한 내 손길은 자연스레 받아들이면서, 엠마는 말없이 쪽지 안의 글귀를 내려다 보았다.

엠마의 낯빛이 가라앉을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홀리기라도 한 듯 쪽지의 글귀를 내려다보는 엠마의 눈빛이 한없이 진지해졌다. 그 매력적인 입술이 달싹이기를 몇 번.

엠마는 짙은 신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너무 낯선 배합식이라서 잘 모르겠어. 재료도 굉장히 희귀한 것뿐이고, 나도 얼마 전에 대량으로 재료를 매입하면서 구한 약초들이거든. 다만, 일단 내 예상대로라면…….”

“예상대로라면?”

괜한 긴장이 어린 목소리에, 엠마는 심각한 어조로 응해 주었다.

“……마약 조제법 같은데? 그것도 꽤 독한.”

그 말을 들은 나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

언젠가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랄하고 있네.’

아무래도 미래의 ‘나’는, 나를 범죄자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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