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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17)화 (517/649)

Chapter 517 - 7. 질투는 나의 힘(17)

대륙에는 수많은 지역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곧 그만큼이나 다양한 문화와 전통이 계승되어 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세부적인 내용이야 문화권마다 천차만별이라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진리도 존재했다.

대부분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윤리관이었다.

이타주의, 공동체를 위한 희생, 혹은 억강부약(抑强扶弱)의 정신 등.

이러한 이념들은 인류 정신의 토대를 구성하곤 했다. 사회의 기초적인 틀을 이룰 만큼 중대한 가치관들이었고, 더불어 이에 뿌리를 둔 몇 가지 가르침 또한 전승되고 있었다.

대륙의 무수한 인구가 공유하는 교훈들이었다.

예를 들어, 사내아이로 살다 보면 무조건 듣게 되는 말이 하나 존재했다.

패가망신을 면하기 위해 남자가 조심해야 할 세 가지.

술, 여자, 그리고 마약이었다.

사실 앞의 두 가지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미 내가 쌓아 온 업보가 너무나 많았으니까.

그렇지만 설마 마지막 조건까지 달성할 줄이야.

나는 이대로 패가망신하고 마는 걸까?

내 머릿속에 암울한 전망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술과 약에 취해 방탕하게 기둥서방 노릇을 하는 미래였다.

성녀는 매일밤 바가지를 긁을 테고, 델핀 선배는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겠지.

엘시 선배는 의외로 희생적인 면모가 있었다. 속이야 상하겠지만, 내 앞에서 일부러 티를 내지는 않으리라.

이처럼 쓸데없는 공상을 이어가던 나는 금단의 깨달음까지 사고가 미치고 말았다.

나쁘지 않은데?

도리어 말하자면 누구나 꿈꾸고 있을 삶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유능하고 어여쁜 아내들을 거느리고, 한량처럼 매일매일을 누리는 인생이라니.

다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불길한 청사진을 뇌리에서 지워야 했다.

남은 여인들까지 생각이 닿았던 탓이었다.

엠마는 나날이 망가져 가는 내 모습을 보며 홀로 눈물을 삼킬 터였다. 더불어 세리아는 매일 밤 검을 쥔 채 밤거리를 배회하겠지.

다름 아닌 나와 하룻밤 유희를 즐긴 여인을 색출하기 위해서.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평온하던 마을이 흉수 불명의 연쇄 살인 사건으로 떠들썩해지는 참사만은 막고 싶었다.

그렇게 나 홀로 낯빛의 명암을 가르던 도중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마치 내 속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듯, 엠마의 단언이 이어졌다.

멋대로 망상에 잠겨 있던 나는 깜짝 놀라서 엠마를 바라보아야 했다.

엠마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호선이 맺혀 있었다. 따스하면서도 단단한 미소였다.

쓸데없는 생각 말라는 듯이.

“어차피 대량으로 조제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배합식이 아니야. 재료를 구하기도 까다로울 뿐더러, 조제 과정도 까다로운 편이거든. 물론 그만큼 효과가 강하기는 하지만.”

“기호품으로 소비할 정도는 아니다?”

내 반문에 엠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전문가의 설명이 덧붙였다.

“그럴 목적이라면 좀 더 효율적인 배합식이 많아. 암시장에 나도는 물건들이 그렇거든.”

흠, 하고 나는 절로 침음을 삼키고 말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에 쓰라고 이 배합식을 건네 주었단 말인가.

결국 이 난국을 헤쳐 나갈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저, 엠마?”

“알겠어, 만들어 볼게.”

내가 무어라 부탁을 하기도 전에, 엠마는 기대하던 대로의 대답을 돌려 주었다.

그토록 내 속내가 알기 쉬울까.

나는 머쓱한 마음을 감추고자 헛기침을 했지만, 엠마의 간질거리는 시선마저 피할 수는 없었다.

“대신 시간이 좀 필요해. 낯선 단약(丹藥) 과정이 많아서, 지식보다는 기술이 필요하거든. 착각하기 쉬운 재료들도 많고… 일단, 재료는 며칠 내로 구해 둘게.”

“고마워, 엠마. 그리고…….”

그렇게 내 입이 감사에 이어 사죄의 말을 읊으려던 찰나.

엠마의 가녀린 검지가 입술에 닿았다. 나는 그 보드라운 살결의 감촉에 일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여인의 손가락은 이처럼 가느다랗고, 또 차갑구나.

이미 수없이 만져 본 손가락이었는데.

입술에 닿으니 또 느낌이 남달랐다. 엠마는 내가 넋을 놓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사과는 하지 말고. 나는, 그보다 많은 것을 네게 받았으니까.”

“빚은 전부 갚았잖아?”

그러면서 나는 보란 듯이 허리춤에 매단 손도끼를 톡톡 두드렸다.

무려 수만 골드의 값어치가 있는 보물이었다.

다시 말해, 내가 엠마를 살리기 위해 바친 마수의 시체보다 가치 있는 물건이란 뜻이었다. 당시 귀동냥으로 들었던 시체의 값은 대략 1만 골드 남짓이었으니까.

따라서 엠마가 내게 부채 의식을 느낄 까닭은 어디에도 없었다. 만일 내가 투자자였다면, 이보다 남는 장사를 한 적은 드물 터였다.

그럼에도 엠마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을 따름이었다.

“아니야, 목숨보다 소중한 걸 받았거든.”

“그게 뭔데?”

“그게 뭐냐면…….”

자연스레 이어지던 엠마의 목소리가 갑작스레 멎었다.

그 안온한 낯빛에 연분홍빛 안개가 스물스물 피어오르고 있었다.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엠마가 수치심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도대체 무슨 대답을 하려고.

내가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내자, 엠마는 헛기침을 하며 살짝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이내 결심한 듯 눈을 질끈 감기까지.

여인의 상반신이 살짝 기울며 서로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아주 짧은 간극을 두고, 달콤한 숨결이 귀를 적신다.

엠마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짜낸 목소리란, 고작해야 한 마디에 불과했다.

“……바, 바로 너.”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전하는 여인의 얼굴은 이미 터질 듯이 붉어진 뒤였다.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내 입에서는 픽, 하는 헛웃음이 흘러 나왔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나는 서서히 물러나는 엠마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대로 잡아당겼다.

그 결과는 뻔했다.

엠마는 어어, 하는 사이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게 되었다. 이러한 전개를 예상조차 하지 못했는지 숨소리마저 멎은 채였다.

이제는 내가 속삭일 차례였다.

“나도 네 존재에 감사해, 엠마.”

힘 주어 여인을 끌어안으며 던진 말에, 엠마는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단지 스르르 눈을 감고 내 품에 몸을 맡겼을 뿐.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나는 엠마와의 시간을 즐겼다.

**

공방을 나서는 내 품속에서 낯선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속질의 열쇠가 부닥치며 내는 소리였다. 떠나는 나를 배웅하며, 엠마가 마지막으로 전해 준 선물이었다.

“……내 공방 열쇠야.”

그렇게 말하는 엠마의 낯에는 은은한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나와 함께했던 애정 행각의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다.

“우리도 그… 여, 연인 관계니까. 일단은.”

그러니 언제든 자유롭게 찾아오라는 말이었다.

마법사와 연금술사의 공방은 특히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그곳에는 그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연구 자료와 온갖 비전들이 숨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공방의 열쇠를 받는다는 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내 모든 것을 바쳐도 좋을 만큼 상대를 신뢰한다는 뜻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엠마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홀가분한 마음으로 공방을 나선 지가 몇 분.

내 마음은 다시금 무거워지고 말았다.

아직 수많은 난제들이 잔존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루페시아 영애라든가, 흡혈귀의 덜미를 잡을 수단이라든가.

사건은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해결해야 할 의문이 적체되기만 할 뿐이니, 나로서는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기대해 볼 만한 부분은 미래에서 온 ‘엘시 선배’의 존재였다.

흡혈귀에게 당한 희생자를 본래대로 돌릴 방법을 연구해 왔다는 여인이 아닌가.

무언가 비밀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추론은 합리적이었다. 특히 흡혈귀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당시 묘한 침묵을 지킨 점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 또 다시 엘시 선배를 찾아가 봐야 하나.

이러한 상념에 빠져 있던 차였다.

저 멀리에서, 회색의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흡혈귀의 혈족이 지니는 상징 중 하나였다. 더불어 그 아래로 비치는 푸른 동공이 잘 세공된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일순간 나는 달을 떠올리고 말았다.

모든 사내들이 그럴 터였다. 대낮의 태양 아래를 걷고 있음에도, 스스로 한파와 어둠을 몰고 다니는 요사스러운 미모를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와 소녀의 눈이 마주친 순간.

“……선배!”

내 후배, 세리아의 낯빛이 단박에 밝아지며 화사한 미소가 해처럼 떠올랐다.

해맑은 목소리를 내지른 소녀가 종종걸음을 치며 내게 다가왔다. 진지하기 그지없던 표정은 이미 폐지처럼 구겨져 쓰레기통에 처박힌 지 오래였다.

그리고 세리아는 내게 다가오자마자, 자연스레 내 소매를 붙잡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이내 스산한 호선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다른 여자 냄새가 나지?”

“다른 여자를 만났으니까.”

내 지극히 당연한 답변에 세리아는 곧바로 볼을 부풀리며 물었다.

“누군데요?”

“말하면 해코지 할 거잖아.”

“아아아아! 누군데요오오…….”

“애교 부려도 알려 줄 생각 없다.”

내 강경한 태도에 세리아는 풀이 죽은 듯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그 모습이 워낙 귀여워 흔들릴 뻔했지만,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리 그래도 세리아에게 엠마의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대신 나는 말머리를 돌리기 위해 또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었는데?”

“아, 그거요.”

그러자 세리아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하스터 양을 면회하러 갔는데, 실종됐다고 들어서요. 그러다 이안 선배를 마주쳤으니 하스터 양에게는 따로 감사를…….”

“제발, 진작 말해……!”

내게는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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