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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18)화 (518/649)

Chapter 518 - 7. 질투는 나의 힘(18)

그동안 세리아는 억울한 취급을 감내해야 했다.

주로 증오해 마지않는 언니, 델핀의 일방적인 주장 탓이었다. 실질적인 가주 노릇을 하고 있던 델핀은 세리아에게 중차대한 임무를 맡긴 바 있었다.

‘이안을 꼬셔라.’

평생 동안 남자친구는커녕 친구조차 몇 없었던 세리아였다. 당연히 무슨 수를 써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유르디나의 가신으로서 가주의 말을 거역할 도리는 없었다.

무엇보다 세리아가 내심 바라던 일이기도 했고.

그렇게 각오를 다지고 가문을 떠난 세리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과를 보고하는 자리를 가져야 했다.

굳이 북부로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제국 곳곳에는 유르디나의 심복들이 위치하고 있었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가주와 실시간으로 소통이 가능했으니까.

델핀에게 올리는 첫 번째 보고는 세리아의 새로운 보물과 함께 시작되었다.

황녀 시엔이 건네 준 한정판 이안 인형.

이를 목도한 델핀은 한참 동안이나 침묵을 지켜야 했다. 그러든 말든, 세리아의 들뜬 목소리는 눈치 없이 자랑을 이어갈 따름이었다.

끝내 델핀의 눈꺼풀이 질끈 닫혔다.

“잠깐, 잠깐만… 세리아, 다시 이야기해보렴?”

“네?”

이 암캐가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 그러지?

세리아는 이처럼 순수한 의도를 담아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이 악마 같은 여자가 제 성과를 가로채기라도 할까 봐 경계를 가득 담은 눈빛을 하고서.

두통을 이기지 못한 델핀의 손이 제 이마를 짚었다.

“설마 그까짓 인형 하나 때문에, 무도회에서 춤출 기회를 넘겼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 그까짓 인형이라뇨!”

울컥하는 마음을 이겨내지 못한 세리아의 목청이 절로 높아졌다.

그럴수록 델핀의 표정은 더욱 암담해질 뿐이었지만 말이다.

“이 세상에 단 셋밖에 존재하지 않는 한정판이라고요! 참고로 이 옷깃의 세밀한 묘사가 참 좋은데, 핏자국이 묻은 방향까지 계산해 낸 점이 특히…….”

“……내가.”

중얼중얼 말을 이어가던 세리아의 목소리가 멎은 건 그 무렵이었다.

입술을 짓씹으며, 델핀이 괴로운 음색을 토해내고 있었다.

세리아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 언니가 저토록 후회하는 얼굴을 할 수 있다니?

“내가 너를 잘못 키웠구나. 너무 신경을 못 썼어… 설마, 이렇게까지 못났을 줄이야.”

그 노골적인 비난에 세리아의 표정이 일순 멍청해졌다.

“모, 못난이?”

“그래, 못난이… 넌 연애에 무지하다 못해 말하는 감자 수준이야. 굳이 한 낱말로 정의하자면. ‘못난이 감자’라 할 수 있지.”

난데없이 ‘못난이 감자’가 되고 만 세리아는 더욱 울컥한 얼굴이 되었다.

주먹을 쥔 세리아가 무어라 반박을 하려던 찰나.

“아무래도 넌 내가 가르쳐야겠어.”

굳은 결의를 담은 어조였다.

이러한 얼굴을 한 델핀의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세리아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무언가 불쌍한 것을 바라보는 원수의 시선에 욱하는 마음이 앞서기도 했다.

그래, 원수.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델핀은 가진 자로서 살아왔고, 세리아는 모든 것을 빼앗겨 왔다. 원하던 검, 원하던 친구, 심지어는 제 어머니까지.

사실 쫓겨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았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세리아는 자연스레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병환으로 일찍 어머니를 여윈 델핀의 후계자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하여, 유르디나 후작이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으리란 사실을.

그래서 더욱 화가 났는지도 몰랐다.

그날처럼 소중한 사람을 잃을 것만 같아서.

이안의 도움으로 수렵제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일평생 동안 소녀를 괴롭히던 악몽이 갑작스레 사라질 리는 없었다.

그렇게 서서히 제 심정을 되짚어 가던 세리아의 입가에 싸늘한 조소가 떠올랐다.

“뭘 가르치시려고요? 천박한 몸뚱어리를 굴려 남자를 유혹하는 방법?”

“그래.”

하지만 델핀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하기만 해서. 세리아는 도리어 당황해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델핀은 이미 마음은 굳힌 기색이었다.

“잊었니, 세리아? 유르디나가 추구하는 것은 승리야. 정정당당한 승리든, 비열한 승리든 승리는 무조건 옳다고… 그런데 넌 지금 뭘 하고 있지? 그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소꿉친구를 제외하고, 우리 중에서 가장 먼저 서방님과 인연이 닿은 쪽은 너였잖아?”

“그, 그건…….”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차마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한 세리아는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이전에 비해 다소 사나워지긴 했지만, 세리아는 여전히 세리아였다.

태생적인 본성을 온전히 벗어던질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해, 유르디나 성 한복판에 ‘영원한 처녀’ 동상을 세워 버리기 전에… 참고로 받침돌에는 ‘내 여동생, 세리아를 기리며’라고 새겨 놓을 테니까.”

세리아는 무언가 억울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유르디나 가문에서 가주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여타의 귀족 가문들이 그렇듯이.

결국 그날 이후로 세리아는 강제로 하루 1시간 이상을 수정구 앞에 앉아 있어야 했다.

델핀이 가르쳐 주는 기술은 남사스럽기 그지없었다.

애교를 부린다든가, 우연을 가장해 신체를 접촉시킨다든가, 일부러 거리감을 줄여 상대를 설레게 만든다든가.

무엇 하나 낯설지 않은 내용이 없었다.

그렇게 수치심을 꾹 참고 지내기를 며칠.

더는 견딜 수 없다 싶었던 세리아는 제 유일한 친구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셀린 하스터.

이안의 소꿉친구이자, 세리아보다 이안을 오래 알고 지낸 몇 안 되는 여인이었다.

또한 세리아의 연적이기도 했고.

다만 두 사람이 서로를 각별히 생각한다는 점은 분명했다. 셀린과 세리아는 유독 붙어 다니기도 했으며, 수련도 함께하며 우정을 쌓았다.

그래서 세리아는 믿었다.

델핀과 성녀, 심지어 엘시까지 이안과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던 도중이었다. 무언가 뒤처져 있는 두 사람이었던 만큼, 정보를 교환하다 보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고.

하지만 그러한 기대를 품고 찾아간 친구의 거처는, 이미 선객이 다녀간 뒤였다.

기묘한 풍경이었다.

셀린은 암흑교단과 모종의 계약을 맺은 죄로 자택에 구금된 상태였다. 당연히 입구를 지키고 있는 위병이 있어야 하는데, 산 자의 기척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들어가 볼 필요조차 없었다.

늦었구나.

실종이었다. 그 예상대로, 셀린이 머무르고 있어야 할 지하 감옥에는 회색의 머리카락이 몇 가닥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상한데.

세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암흑교단이 모종의 개입을 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순 없지만, 셀린은 이미 몇 번인가 세리아에게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보이던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

그 진술이 사실이라면, 회색 머리카락이 남아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때부터였다.

묘한 직감이 세리아를 이끌기 시작했다. 남들에게도 알려 추적을 개시해야 한다는, 그 간단한 판단조차 내리지 못할 정도였다.

이안을 만나고, 혹독한 훈련의 성과를 확인하고.

평소라면 가슴이 두근거려서 제대로 하지도 못했을 짓이었다. 도중에 얼굴이 새빨개져서 혀나 깨물고 말았겠지.

그럼에도 무언가 이상했다.

달구어진 바늘이 척추를 관통하는 짜릿한 쾌감, 질척거리면서도 싸늘한 감정이 심중에서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이윽고 길은 이어져 숲의 은밀한 장소.

어느덧 이안은 심각한 낯빛을 한 채 세리아의 뒤를 쫓고 있었다. 홀린 듯이 걷던 세리아의 걸음이 멎은 것은, 묘하게 달콤한 향이 진동하는 장소였다.

그곳에서 세리아는 보았다.

“……앙?”

회색의 머리카락, 푸른 눈동자.

“너, 뭐야?”

어린 시절 잃어버렸던, 어머니를 떠올리게끔 하는 색채를.

**

세리아가 이상하다.

그 사실을 눈치 챌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세리아와 함께 몇 번이고 사선을 넘은 경험은 폼이 아니었다. 동료의 이상을 깨닫는 건 기본 소양 중 하나였다.

오늘따라 세리아는 유독 붙임성 있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은근슬쩍 내 옷소매를 쥐거나, 애교 섞인 말투를 하기까지.

결정적인 발언은 그 다음에 나왔다.

“하스터 양을 면회하러 갔는데, 실종됐다고 들어서요. 그러다 이안 선배를 마주쳤으니 하스터 양에게는 따로 감사를…….”

처음에는 몰랐다.

세리아라면 으레 할 만한 대사였던 탓이었다. 집착이라고 해야 할지, 광증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감정이 유독 증폭되어 있던 그녀였다.

이상한 반응을 보이더라도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되짚어 보니 이상하지 않은가.

셀린을 찾으러 왔는데 딱히 셀린을 향한 관심이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암흑교단의 계약자가 실종되었는데 아카데미가 너무 조용했다.

말이 되나?

또 세리아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묘한 확신을 가진 자만이 지닐 수 있는 태도였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나는 또 하나의 사실을 떠올렸다.

세리아의 어머니는, 흡혈귀의 혈족이다.

북부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불현듯 등줄기를 달구었다.

내 입은 자연스레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말없이 세리아의 뒤를 따르기를 몇 분.

이따금씩 내게 달라붙던 세리아는 어느 시점부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멍하니, 멍하니 걸음을 옮겨서 아카데미 남쪽에 위치한 숲으로 향했을 따름이었다.

그 경로가 이상하기는 했다.

동일한 위치를 빙빙 돌거나, 직선으로 걸어가도 좋을 길을 일부러 우회하거나.

하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단 한 마디도 불평을 토해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세리아가 그처럼 이상한 행보를 보일 때마다, 주위의 대기가 시시각각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온도, 습도, 심지어는 코끝을 간질이는 냄새마저도 제멋대로 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행진의 끝.

나는 어느덧 숨을 죽인 채,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앙? 너 뭐야?”

은은한 꽃향기가 퍼진 공터였다.

그 인위적인 향취가 코끝을 찌를 때마다 내 정신이 흐릿해졌다. 무언가 위험한 기체가 이 주위에 퍼져 있다는 사실은 명백해 보였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회색의 머리카락, 푸른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단발과 오른쪽 눈을 지나간 흉터가 평탄하지 못했던 과거를 말해주고 있었다.

흡혈귀의 혈족.

무언가를 직감한 나는 제발 세리아가 정신을 차리지 못 하기를 기대했다.

괜히 이성을 되찾았다가는 더욱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세리아는 내 기대를 무참히 배신하고 말았다.

“어, 어라……?”

넋을 놓은 의문성이 소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세리아를 휘감고 있던 요사스러운 분위기가 단숨에 가라앉았다. 두리번거리며 상황을 파악해 보려 애를 쓰는 걸 보니, 아무래도 기억이 애매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비밀리에 은근한 기파를 쏘아 보냈다.

제발 얌전히 있으라는 뜻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세리아가 그 신호만은 알아들었다는 점이었다.

움찔, 하고 몸을 떤 세리아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도대체 무슨 대응을 보여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는 기색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여태껏 본 적도 없던 흡혈귀의 혈족을 처음으로 목도한 판이 아닌가.

무언가 정보를 뽑아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역시 고문밖에 답이 없나?

그렇게 내가 허리춤으로 슬그머니 손을 옮겼을 찰나.

“대답 안 해? 너, 누구냐고 내가 묻… 어라?”

불행인지, 다행인지.

흡혈귀의 혈족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그녀가 주의를 돌린 틈에 재빠르게 기감으로 주변 일대를 훑어 보았다.

보이지 않는다.

최소한 셀린은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 더더욱 정보가 절실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러나 과연 천신께서는 우리를 굽어보고 계신단 말인가.

“뭐야 너도 자매였구나? 진작 말하지! 착각할 뻔했잖아, 아하하!”

흡혈귀의 혈족은 그렇게 넉살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이내 굳어 있는 세리아의 어깨 위에 팔을 걸쳤다.

누가 보아도 친밀감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세리아가 움찔거리며 무어라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래서, ‘밥’은 데려왔어? 다들 기다리고 있는데…….”

생경한 화제에 세리아의 몸이 다시 얼어붙었다.

제대로 된 사정조차 파악하지 못한 마당이었다. 당장 흐릿해진 기억을 되살리기도 힘든 마당에, 이처럼 이해하기 힘든 질문을 받다니.

아직 흡혈귀가 의심의 기색을 거두기도 전이었다.

내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보아 온 세리아의 사회성을 생각해 보았을 때, 적절한 임기응변을 취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결국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꽥.”

지극히 인위적인 소리를 내뱉으며, 나는 혼절한 척 눈을 감고 쓰러졌다.

솔직히 말해 실패할 확률이 더 높은 도박이었다. 암흑교단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에 내 이름이 퍼져 나간 마당이었다. 내 신분이 노출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다만 내가 믿고 있는 구석이 하나 있긴 했다.

“흐음…….”

이내 푸른 시선이 샅샅이 내 전신을 훑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세리아는 슬그머니 제 손을 검 손잡이로 가져갈 뿐이었다.

상대가 날 위협하면 당장이라도 죽이겠다는 듯.

다행스럽게도, 세리아의 이러한 각오가 실행으로 옮겨지는 일은 없었다.

“……좋아, 양질의 먹이인데? 우리 자매들이 기뻐할 거야!”

왜냐하면, 흡혈귀의 혈족은 왼쪽 눈마저 흐릿했으므로.

그리고 나는 하이 익스퍼트.

시체 흉내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세리아 또한 최선을 다해 내 의도에 응해 주고자 노력했다.

"네, 네헥… 으으… 네!"

무심코 혀를 씹고 말았지만 말이다.

누가 뭐래도, 세리아는 세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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