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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19)화 (519/649)

Chapter 519 - 7. 질투는 나의 힘(19)

향긋한 체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들썩거리며 몸이 흔들릴 때마다 푹신한 감촉이 전해져 왔다. 나는 일부러 힘을 쭉 뺀 채 기절한 척을 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세리아의 어깨 위에 얹어진 채로.

몸이 반으로 접힌 터라, 세리아가 걸음을 내딛으면 내 몸 또한 한 차례 들썩일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부드럽고 탄력 있는 세리아의 흉부가 내 상반신에 부닥쳤다.

그간 성녀 때문에 잊고 있었던 사실이 하나 떠올랐다.

세리아, 몸매 좋았지.

다소 민망한 상황이었지만 불평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차라리 상반신이라서 다행이지, 만일 하반신이 세리아의 정면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대참사가 벌어질 뻔했다.

사실 지금도 ‘참사’라 칭해도 손색이 없었지만.

내 몸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팔 하나로 내 허리춤을 바치고 있는 세리아의 낯빛이 유독 뜨거웠다. 아무리 성인 남성을 들쳐메고 있더라도 힘에 부칠 턱이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세리아도 부끄러운 것이다. 하기야, 그러지 않아도 남녀관계에 서툰 세리아였으니.

나에 대한 집착과 신체 접촉은 별개의 문제라 여기고 있으리라.

그나마 다행인 사실이 하나 있다면, 세리아가 장하게도 어떻게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지리멸렬하던 사회성이 이만큼 성장하다니.

나는 속으로 감동의 눈물을 삼키며, 세리아와 맹인 흡혈귀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도 완전히 죽인 건 아니지? 그럼 맛이 없잖아~”

“네, 네? 아… 그럼요!”

“그런데 나도 아직 남자를 물어본 적은 없는데, 너 의외로 엉큼하구나?”

눈을 감고 있어도 내 기감은 시야처럼 명확했다.

지금 막 권속의 눈꼬리가 휘었다는 사실마저 감지해낼 정도였다. 세리아는 그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아, 아? 그, 그렇죠……?”

“난 눈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꽤 잘 생긴 남자인가 봐? 냄새가 나거든, 냄새가… 여자를 울린 냄새.”

키득거리면서, 흡혈귀의 권속은 차디찬 미소를 머금었다.

“아주 나쁜 놈들이지. 그렇지 않아? 사랑해 줄 것도 아니면서, 이래저래 간만 보고… 결국 여자만 불쌍해지잖아.”

“그, 그거언…….”

흘깃, 하고 세리아가 내 눈치를 살피기도 잠시.

어느덧 세리아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맞는 말이죠.”

“꺄하하! 과연 우리 자매, 잘 아는구나!”

“네, 그럼요… 왜 자꾸 다른 여자한테 여지를 주는 걸까요? 그냥, 나만의 선배로 남아 있어도 될 텐데…….”

자고로 공감은 대화에 있어 최고의 윤활유나 다름없었다.

더듬거리며 어색한 티를 숨기지 못하던 세리아가 이처럼 막힘없이 말을 이어가다니.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었으나, 나는 어쩐지 뼈마디를 파고드는 한기를 느껴야 했다.

세리아, 내 편 맞겠지?

이러한 걱정을 뒤로 한 채 세리아와 흡혈귀는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어갔다.

“맞아, 맞아! 나도 사실 남자 때문에 고생을 한 적이 있거든. 공교롭게도 친구랑 한 남자를 좋아하게 돼 버려서…….”

“진짜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세리아는 흡혈귀의 이야기에 강한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식은땀이라도 흘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내가 죄인이었으니까.

“그럼, 덕분에 고생을 좀 했지. 친구와는 어색해져 버리고, 그 남자는 우유부단해서 금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심지어 우리 셋, 용병으로 오래 일한 사이라서 더 곤란했어.”

여러모로 세리아의 공감을 살 만한 요소가 많은 과거였다.

우유부단한 남자, 연적이 된 친구, 그럼에도 동료라서 함부로 관계를 파탄내지 못하는 사정 등.

이제 세리아는 꼴깍꼴깍 마른침까지 삼켜 가며 몰입하고 있었다. 호기심이 가득 담긴 재촉이 이어졌다.

“그, 그래서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 함께 의뢰를 수행하고 있는데, 위험한 마수를 만나 버렸어. 그러다 이 눈이…….”

톡톡, 하고 초점이 맞지 않는 제 눈가를 두드리는 여인의 입가에 처량한 미소가 맺혔다.

“이 눈이, 맛이 가고 만 거야. 그 이후에 내가 좀 실의에 빠져 있었거든? 뭐어, 솔직히 말하자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수준이었지…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잘 챙겨주던 남자도 점점 지쳐 가더라고.”

“그, 그런……!”

“너무하지 않아? 나름대로 동료를 지켜 보려고 희생한 건데, 점점 날 멀리하더니 그 년이랑 붙어 다니고… 마치 세상이 날 끝도 없는 구덩이 속에 몰아넣는 기분이었지.”

“너무해요!”

완전히 흡혈귀의 입장에 몰입해 버린 세리아는 그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주먹을 쥔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들끓는 감정 탓에 나를 받치고 있는 팔에도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어,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 사람을 위해 입은 상처잖아요! 심지어 사람이 나약해진 틈을 타, 웬 암캐년한테 연인을 빼앗기다니… 너무 잔인해요.”

세리아의 호응에 흡혈귀는 후후, 하고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제 상처를 털어놓아 나름 홀가분해진 태도였다.

정작 세리아는 장본인보다 더욱 흥분해서 다음 이야기를 채근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죠? 그 남자가 죄를 뉘우치고 다시 돌아왔다든가…….”

“먹었어.”

우뚝, 하고.

별 것 아니라는 듯 내뱉어진 답변에 세리아의 표정이 망연해졌다.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기껏해야 멍청해진 반문뿐.

“……네?”

“먹었다고, 내가. 그럼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있잖아? 울면서, 피를 빨았는데… 아아, 황홀했지. 슬픔이 극에 달하면 쾌감이 된다는 사실, 알고 있어?”

세리아가 입을 다문 사이에도 흡혈귀는 꺄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순박하기 그지없는 웃음소리였다.

“고기도 먹었지. 생살은 좀 질기긴 했지만… 잡내도 심하고, 그래도 열심히 참았어. 그럼 영원히, 영원히 함께할 수 있으니까… 특히 심장을 뜯어먹었을 때는 눈물이 나오더라니까? 그리고 그, 뭐였더라? ‘암캐’라고 했던가?”

짝, 하고 손뼉을 마주치는 여인의 낯빛에는 어떠한 이상도 감지되지 않았다.

지극히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중에는 울고불며 빌더라고… 그래도 멈추지 않았어. 내가 당했던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으니까. 우선 두 눈을 뽑아서 입 안에 처넣었지. 그러더니 비명을 내지르면서 반항하더라? 그래서 아무 물건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구멍에 박아댔어… 그러다 고막이 찢어져 버렸나 봐. 귓구멍에 면도칼을 쑤셔넣던 중이었거든. 나중엔 내 말도 못 알아듣더라고.”

머리를 긁적이면서 토해내는 높낮이가 단조로웠다.

그래서 더욱 기괴했다.

세리아마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킬 지경이었다. 최대한의 이해심을 발휘하더라도,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소리는 아니었다.

여인의 발걸음이 멎은 것은 그 무렵이었다.

느닷없이 마력의 파동이 느껴지더니, 일대의 공간이 일렁이며 새로운 광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이 익스퍼트에 이른 내 기감마저 속일 수 있을 만큼 정교할 술법이었다.

하루이틀 동안 준비한 수작질은 아니리라.

이윽고 코끝을 찌르는 달콤한 향기가 더욱 강해졌다. 나조차도 일순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강렬한 냄새였다.

그 한복판에서, 세리아는 말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 실감했어. 사실, 대부분의 문제는 힘이 있다면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감사하니? 우리의 시조께서 이러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이 냄새.”

오랜 침묵 끝에 내뱉은 한 마디였다.

진중히 가라앉은 그 목소리에 흡혈귀의 혈족은 이어가던 말을 멈추었다. 흘끗 세리아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서 의문이 느껴졌다.

하지만 세리아의 정신은 이미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떠난 지 오래였다.

“맡아본 적이 있어요. 어린 시절에…….”

“흐음, 어린 시절이라니? 우리가 오랜 준비를 하긴 했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을 준비하지는 않았을 텐데.”

흡혈귀의 권속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 이상 신경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다만 공터의 한가운데를 가리켰을 따름이었다.

음산한 기운이 물씬 풍기는 지점이었다.

“뭐, 됐어, 어차피 이제 도착했으니까… 저 가운데에 ‘밥’을 두면 돼.”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또 다시 튀어 나온 날카로운 어투였다.

슬슬 흡혈귀의 권속도 의심을 느끼는지 살짝 낯빛이 굳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반문에는 짜증스러운 기색마저 어려 있을 지경이었다.

“……뭐가?”

“저 가운데에 두면, 선배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습니다.”

흐음, 하고 또 다시 울려 퍼지는 신음.

슬슬 흡혈귀의 권속도 노골적인 의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세리아의 어조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도리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흡혈귀의 권속을 노려보았을 뿐.

픽, 하는 웃음이 터져 나올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너, 우리 자매가 된 지 얼마 안 됐구나? 냄새에서는 시조의 은혜가 물씬 풍겨 오는데… 아하, 시조가 잠입하시고 새로 혈족으로 삼은 아이니?”

“대답해 주세요.”

다소 버릇 없는 말투에도 여인은 금세 여유를 되찾았다.

‘냄새’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흡혈귀의 혈족에게 확신을 주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아마도 ‘자매’를 제외한 타인이 모방할 수 없는 특징 중 하나인 듯했다.

그럴 만도 하지.

세리아는 진짜배기 흡혈귀의 혈족이었으니까.

그 진실을 모르는 것은 이곳에서 오직 세리아뿐이었다. 사실, 세리아는 이미 그러한 문제를 일일이 신경 쓸 만큼 여유로워 보이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세리아가 인내의 한계를 맞이하는 일은 없었다.

그보다도 전에 여인의 설명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너도 곧 배우겠지만, 이 세상은 오행(五行)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지. 화(火), 수(水), 목(木), 금(金), 토(土)… 심지어 인체의 장기마저 각 원소에 대응할 정도야. 이는 비단 물질 세계뿐만 아니라, 정신과 감정도 마찬가지지.”

“그렇다는 말씀은?”

“만일 오행의 균형을 일부러 깨트린다면?”

음험한 미소를 지으면서, 여인은 그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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