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20 - 7. 질투는 나의 힘(20)
“이 세상의 다섯 원소가 이루고 있는 균형이 무너져 내리는 거야…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흥미진진하지 않아? 고작해야 전염병 창궐이나 기후 변화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텐데… 물리적인 세계를 넘어선, 정신의 간섭이 가능해지는 거라고! 그것도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인!”
명백히 광증에 사로잡힌 음성이었다.
세리아는 이제 반문조차 없이 침묵을 지켰다. 그러든 말든,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한 흡혈귀의 권속은 멋대로 미래의 청사진을 읊어대고 있었으니까.
“균열은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되는 거야… 모든 것이 그렇지. 특히, 감정도 그래. 가장 음슴하고 뜨거운 감정은 무엇일까? 드러나지 않을 때는 모르지만, 결코 없앨 수도 없고 불타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 우리 자매들이 공유하고 있는 단 하나의 감정 말이야.”
“그건…….”
“그래, ‘질투’.”
나는 서서히 숨을 죽였다. 아직 때는 오지 않았지만, 늦지 않은 시점에 나설 예정이었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감정이지. 이 결계는, ‘질투’를 증폭시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해.”
흡혈귀의 혈족이 내뱉은 정보들은 대개 쓸 만했다.
하지만 아직 내가 원하는 정보는 말하지 않았다.
셀린의 행방.
내가 주저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했다. 저 흡혈귀의 권속을 쓰러트리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렇게 되면 중요한 정보원을 잃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지금으로서는 세리아가 의문을 제기하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세리아의 관심사는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감정을 증폭시켜? 그럼 균형이 무너진다고?”
“물론, 비단 감정뿐만이 아니야. 이 결계는 아직 덧나지 않은 모든 것을 증폭시키고, 심화시키거든. 예를 들자면… 그래, 인체의 장기 중 하나가 망가진다고 생각해. 그럼 몸이 멀쩡할 수 있을까? 순식간에 합병증으로 고생하게 되겠지. 단순히 설명하자면 그래.”
그렇게 설명을 끝마친 여인은, 다시금 공터의 한복판을 지목했다.
“그 남자의 피를 저 안에 뿌려.”
세리아의 몸이 흠칫 굳었다. 아직 듣고 싶은 말이 더 있는 모양이었지만, 이미 황홀감에 젖은 흡혈귀의 혈족은 누군가의 말을 들어 줄 상태가 아니었다.
“결계의 힘이 미치는 범위는 한정적이지만, 우리가 준비한 마법진은 이뿐만이 아니야. 만일 저 남자의 피가 뿌려진다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지. 그 범위도 이 숲보다는 훨씬 넓을 테고.”
그러면서 여인은 서서히 뒷걸음질을 쳤다.
세리아와 자신 사이에 마법진을 위치시키기 위해서.
여인의 미소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그러면 곳곳에서 갈등이 벌어지겠지? 그 부정의 감정들이 우리의 ‘밥’이 될 거야… 지금까지는 계집애 하나의 감정을 증폭시켜 갖고 놀았지만, 이제야 막 준비가 끝났어. 그런데 마침 네가 적당해 보이는 남자를 데려 온 거지.”
그다지 친절한 설명은 아니었다.
곳곳에 논리의 구멍이 존재했고, 결계의 원리는 아직도 불분명했다. 그나마 명확한 사실은 오직 하나뿐.
흡혈귀들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
그리고 그 희생양 중 하나로 나를 쓰고 싶어 한다는 점뿐이었다.
내 정체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감 하나는 뛰어난 여인이었다.
하기야 이곳으로 오는 길에 나를 두고 ‘냄새’가 난다고 했던가.
흡혈귀의 권속이 되면 이러한 직감이 발달하는지도 몰랐다.
세리아는 미동조차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여인의 제안을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었다.
여인 또한 이를 모르지는 않을 터.
은근한 유혹이 꿀처럼 질척이며 떨어져 내렸다.
“……너, 그 남자 좋아하지?”
그러자 세리아의 몸이 움찔, 하고 떨리며 모처럼의 반응을 보였다.
여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말했잖아, ‘냄새’가 난다고… 짙은 원망과 슬픔의 향기가 나. 너도 소중한 사람한테 빼앗겼구나? 네 사랑을 말이야.”
키득키득.
여인은 웃음을 터트리며 하나 남은 눈동자를 마저 감아 버렸다. 세리아는 슬그머니 내 몸을 땅 위로 내려놓으며 경계의 시선을 유지했다.
이는 일종의 신호이기도 했다.
여인이 세리아를 주목하고 있는 사이, 적당한 시점에 내가 나서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다만 아직 여인으로부터 들어야 할 정보는 많았다.
“걱정하지 마, 그 남자를 건드리지는 않을 거야. 내 말을 믿어… 우리는, ‘자매’잖아? 서로 닮아있는 만큼, 네 마음을 잘 알 수 있거든.”
“그래서 제 친구도 데려가셨나요?”
여태껏 기다려 왔던 질문이었다.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외라는 낯빛을 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이.
“제 친구, ‘셀린 하스터’ 말이에요. 지하감옥에 가둬 두었는데, 일부러 납치까지 하다니… 하스터 양도 당신들의 장난감으로 삼을 생각인가요?”
“으음, ‘셀린 하스터’?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적의를 물씬 풍기는 음색에도 여인은 고개를 갸웃할 따름이었다.
그야말로 금시초문이라는 태도였다.
“그래도, 뭐… 데려갔을 수도 있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자매들이 열심히 활약 중이거든. 다만 이상하네. 지하 감옥까지 갈 수고를 들일 만한 인물이라면, 당연히 나도 이름을 들어보았어야 정상…….”
팍, 하고.
난데없이 물기 어린 소음이 울려 퍼진 것은 그때였다. 여인의 넋 나간 시선이 제 망막 위로 퍼져 나가는 핏빛 윤무의 근원을 향했다.
그곳에서는 팔이 하나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본래 육체에 붙었어야 할 신체 부위가 하늘을 비산하는 믿기 힘든 상황.
여인은 제 어깨에서 느껴지는 허전함에 비명을 내질렀다.
“이, 이게 무슨… 끄아아아아아악!”
그러나 여인의 투정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일말의 가능성조차 남겨 두기 싫었던 내 검이 재차 여인의 사지를 절단했기 때문이었다. 정지한 시간 속에서 빗발 친 검격은 무려 세 번.
내가 여인의 몸뚱아리를 걷어차자, 마치 탑이 무너져 내리듯 동강 난 흡혈귀의 팔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사지를 잃은 몸뚱아리는 땅을 제대로 구르지도 못했다. 피를 줄줄 흘리면서, 고통에 찬 비명만이 허파를 쥐어짜며 울려 퍼질 뿐.
기습을 깔끔히 성공시킨 내 입에서 후우, 하고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럼 네게서 얻을 만한 정보는 다 얻었다는 뜻이군.”
“크악, 흐엑… 너, 너 뭐야! 어떻게, 전조조차 없었는데……!”
그 하찮은 의문에 일일이 답해 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흡혈귀의 피를 빨아들이며 서서히 핏빛 흉광을 발하는 마법진을 흘깃 바라보았다. 아직 흡혈귀의 목이 붙어 있는 까닭은 별 것 없었다.
혹시 숨기고 있는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흡혈귀라고 해서 고통에 덜 민감하거나 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세리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무래도 생각할 거리가 많아진 듯했다.
나는 세리아의 상념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암흑교단과 한 패인 흡혈귀부터 조질 예정이었다.
“몇 가지 질문 좀 하자.”
“무슨, 개소리… 내가 먼저 물었잖아! 너 도대체 누구… 아아아아아악!”
이제는 절삭음조차 울려 퍼지지 않았다.
엠마가 선물해 준 손도끼의 예리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일부러 고통을 주기 위해 오러도 두르지 않았는데, 설마 일순 피까지 흐르지 않을 만큼 절단면이 날카롭다니.
그러나 고통은 어디까지나 유예되었을 뿐이다.
어깻죽지가 통째로 잘려나갔는데, 통증을 느끼지 않을 인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인간의 탈을 쓴 괴물조차도.
몸부림 칠 팔다리조차 남아있지 못한 흡혈귀의 몸뚱어리가 바둥거리며 발광을 해댔다. 나는 여인이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복부를 걷어 차 주었다.
커헉, 하고 숨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비로소 여인의 목청이 잠잠해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야. 괜히 더 고통 받을 필요는 없잖아? 일단… ‘셀린 하스터’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진짜로 없나? 그리고 만일 희생자를 납치한다면 어느 곳으로 데려가는 거지?”
“푸흐, 흐흐흐……!”
다만 여인은 순순히 내가 원하는 정보를 건네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러면 곤란한데.
아무래도 절단면이 지나치게 깔끔했던 탓에, 앞으로 엄습할 가지각색의 고통을 과소평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다음부터는 도끼 자루로 으깨 버리면 될 일.
나는 더욱 귀찮아지지 않기를 바라며 스산한 물음을 덧붙였다.
“……왜 웃지?”
“병, 신 새끼… 흐흐흐… 하필이면 내 피를 흘리다니… ‘흡혈귀’한테 피가 어떤 의미인 줄 모르나……?”
그게 무슨 소리냐고, 반문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다리를 번쩍 들었다. 그러나 피의 칼날이 슬쩍 뒤꿈치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내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무리 얕은 상처라지만, 피를 흘렸다는 점이 문제였다. 흡혈귀는 이미 결계를 유지하는 마법진의 촉매가 ‘피’라는 사실을 증언한 바 있었다.
그렇다면 내 최선은 하나뿐이었다.
빠각, 하고 두개골이 으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핏물이 땅에 채 닿기도 전에, 흡혈귀의 권속이 절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은은한 핏빛으로 물든 도형이 난데없이 빛을 뿜어대는 걸 막아내지는 못했다.
그렇게 아차, 하는 찰나 시야가 새하얘지고.
“……?”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상할 만큼 아무런 변화가 없어서, 나는 의아한 시선을 후배에게로 보내야 했다.
마침 세리아는 깜짝 놀라 땅을 박차던 도중이었다. 하지만 내 신상에 아무런 변화가 없자, 세리아 또한 당황했는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나는 세리아에게 물었다.
“혹시, 뭔가 달라진 거 있어?”
“……글쎄요?”
결국 우리 둘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한참 동안이나 그 공터에 머물러야 했다.
일부러 마법진을 훼손하거나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날 밤까지도 나를 비롯한 주변에는 아무런 이상이 감지되지 않았고, 우리 둘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아카데미로 되돌아 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난생 처음 겪는 상황을 마주해야 했다.
“조, 좋아해요. 페르쿠스 선배! 부디 제 마음을 받아 주세요!”
기숙사를 막 나서던 찰나, 후배가 허리를 굽히며 내게 앙증맞은 편지를 건넸다.
나는 얼떨떨한 눈빛을 하며 그 편지봉투를 받아드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 소녀의 마음을 모를 수는 없었다.
판에 박은 듯 전형적인 고백이 아닌가.
다만 나를 당황시킨 요소는 따로 있었다.
바로 그 소녀의 뒤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수십 명의 인파.
대부분은 여인들이었고, 심지어 몇몇은 사내이기까지.
그 노골적인 시선을 마주한 내 등 뒤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 내렸다.
“……이런 씨발.”
경험해 보지 못한 시련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