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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21)화 (521/649)

Chapter 521 - 7. 질투는 나의 힘(21)

돌이켜 보면, 그날은 아침부터 묘한 느낌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유독 덥하고 습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며칠 내내 후덥지근하던 날씨는 기세가 한풀 꺾이기는커녕 나날이 제 권역을 더해 가고 있었다.

치명적인 이상 기후였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다가오면 슬슬 추수를 준비해야 했다. 이처럼 수확을 앞둔 시점에 찾아온 폭염이 달가울 턱이 없었다.

이미 제국에서는 여러 구제책을 고심하고 있는 듯했다. 오죽하면 황제가 아카데미에 머무르는 동안 몇몇 석학들과 후속 대체를 논의했겠는가.

그럼에도,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전날보다 기온이 완연히 높아져 있었다. 아무리 인간의 힘으로 가늠키 힘든 것이 천기(天氣)라지만, 이토록 노골적인 변화는 묘한 위화감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직감이 확신이 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세안과 채비를 마치고 문밖을 나선 직후.

“……뭐야, 이건.”

나는 무심코 탄성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문앞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꽃부터 시작해서, 가지각색의 편지 봉투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몇몇 쪽지들에서는 섬뜩한 핏빛 글자가 엿보였다.

그 내용은 쪽지마다 상이했다.

‘목숨을 바쳐 사모해요, 이안 선배.’

‘죽어 버려.’

‘달과 별을 볼 때마다, 그날의 일이 떠올라요. 귀향제를 기억하고 계신가요?’

‘당신의 운이 어디까지 계속될지, 궁금하지 않나요?’

‘세상의 이치란 한결같아서, 뜨거운 것은 차가운 것을 탐하기 마련입니다. 그 욕망에 있어 성별이라는 생물학적 한계는 때로 존재하지 않죠.’

‘우쭐하지 마, 내가 먼저 좋아했었어. 그녀는 너 따위가 탐해도 될 여자가 아니야.’

몇 줄의 글귀를 읽어 낸 내 손이 자연스레 쪽지를 북북 찢었다.

이윽고 한숨과 함께 짜증 어린 혼잣말이 이어졌다.

“지랄 났네…….”

내 심정을 일축하는 한 마디였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느닷없이 기숙사 문앞이 편지와 쪽지로 도배되더니, 심지어 그 내용조차 서로 상반되다니.

일순 내 뇌리 속으로 스치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언제였더라, 귀향제를 앞두었을 무렵이었다.

미래에서 온 ‘나’는 황녀 시엔을 공개적으로 도발했다. 그 이후, 내 평판은 나락까지 떨어졌고 나를 비롯한 주변인을 향한 폭행까지 이루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당시와 달리 여론이 둘로 갈렸다는 점이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만큼이나 옹호하는 사람도 많아 보였다. 그래도 이전과 같은 일방적인 따돌림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은가, 싶었을 무렵.

내 눈에 땅에 널브러진 또 다른 쪽지의 내용이 눈에 띄었다.

‘선배, 마음에도 없는 여자들을 상대하느라 힘드시죠?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 여자들을 없애 버리면, 제가 그 자리에 설 수 있겠죠?’

‘못난 인간들을 일일이 상대하는 건 귀족의 수치에요. 왜 아직도 급이 낮은 이들을 옆에 두고 있나요? 아아, 당신을 위해 내가 나설 수밖에 없나요?’

흐, 하고 내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그렇게 쉽사리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었다.

나는 곧장 땅을 박차고 다급히 기숙사를 나섰다. 곳곳에서 나를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보다는 내 지인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편이 먼저였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내 소중한 사람들을 노릴 수 있다니!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헐레벌떡 층계를 내려가는 내 뇌리에 전날의 광경이 스쳤다.

흡혈귀가 안배해 두었다던 그 ‘결계’.

그것이 어떠한 영향을 미쳤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찰나의 방심이 설마 이러한 결과를 불러올 줄이야.

내가 아니라 강해졌더라도, 대중의 악의를 이겨낼 도리는 없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몇날며칠이고 옆에 두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유일한 해답은 이 사태를 어서 해결하는 것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내 두뇌로 짜낼 수 있는 지략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럴 때 찾아가 볼 만한 사람은 단 둘뿐이었다.

우선 내 친구 ‘레토 아인스턴’, 말할 것도 없이 내가 가장 신뢰하는 책략가.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황녀 시엔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꽤 영리한 편이었으니까.

물론 그 길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조, 좋아해요. 페르쿠스 선배! 부디 제 마음을 받아 주세요!”

이름도 모를 후배의 고백은 시작에 불과했다.

“무슨 소리를… 페르쿠스 경, 그 음침해 보이는 여자는 무시하시죠. 제 얼굴을 한 번쯤 본 적은 있겠죠? 다름 아닌 귀향제 날에…….”

“쯧쯧, 계집들이 말은 많아서는.”

온갖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해일처럼 나를 덮치고 있었다.

한동안 넋을 놓고 있던 나는 끄응, 하고 신음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어야 했다.

“이안 페르쿠스, 부디 우리 둘만의 시간을 만들지 않겠나? 조잘대기만 하는 여자들에게는, 그대도 염증이 났을 터…….”

“좀 닥쳐, 호모 새끼야.”

“……뭐?”

“아아, 천박해! 시끄러워! 제발 다들 좀 조용히……!”

옹기종기 모여 있던 사람들은 제멋대로 고성을 내지르며 다툴 때까지는, 그야말로 금세.

싸구려 도색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꼭두새벽부터 벌어진 소란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웅성거리는 소리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뭐야, 저 새끼?”

“난봉꾼이라는 소문이 진짜였나 보네. 쯧쯧, 저딴 놈한테 넘어간 여자들만 불쌍하지…….”

“흥, 하급 귀족 주제에 운이 좋았던 모양이더라고요.”

“어쩐지… 하지만 뿌리 없는 가문답게 제 물건 관리는 제대로 못하나 보네요? 푸흡, 아하하!”

비난과 조롱.

“너, 너… 본 적 있어! 작년에는 루소 선배한테 매달렸었지? 그냥 연상이라면 헬렐레 하는 창녀였구나?”

“무, 무슨 헛소리를! 이미 한참 전에 접은 마음인데!”

“싸구려 가문 출신답게 사랑도 싸구려인가 보네요. 풉.”

“한 번만 더 내 가문을 모욕하면……!”

질투와 살기.

어느 쪽이든 감당하기 힘든 감정들이었다.

분위기는 이미 험악해질 대로 험악해진 뒤였다. 당장 칼부림과 돌팔매질이 이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내게 이까짓 문제에 신경 쓸 여유는 남아있지 못했다. 황실의 비원, 셀린의 실종, 흡혈귀의 음모까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을 결정적인 단서가 부재하고 있었다.

이처럼 중차대한 시점에 시시콜콜한 사랑 고백이니, 시기와 질투 따위는 내게 어떠한 감흥조차 주지 못했다.

다만 곤란하고 짜증이 날 뿐.

이러한 내 심정도 모르고 갈등은 슬슬 극에 달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날붙이가 그 서늘한 검신을 내보인 것이 신호였다.

“감히, 그따위 모욕을 일삼고도 살아남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

“당신들이야말로, 내 숭고한 사랑을 모욕해?!”

“좋아요, 좋아요. 쓰레기는 미리미리 정리해 두는 편이 좋을 테니… 그럼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페르쿠스 경과 이야기를 나누는 걸로……!”

그렇게 나란한 살의들이 서로 무도회를 열기 직전.

나는 더는 참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캉, 하고 검 한 자루가 허공으로 비산했다.

모두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이었다.

콱, 하고 명치에 팔꿈치가 틀어박히자 여인 하나가 토막 난 신음과 함께 까치발을 들었다. 이윽고 검을 쳐낸 손도끼가 다시금 내 손에 붙잡히며 추진력을 되찾았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쇄도.

상대들은 차마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제대로 된 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멍청한 낯빛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캉, 캉!

초승달 같은 궤적을 따라 날붙이 몇 자루가 하늘을 날거나, 땅바닥에 처박혔다. 이윽고 숨 넘어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컥, 윽, 악!

연격은 소리보다도 빨랐다. 투척한 손도끼가 내 손에 되돌아 왔을 무렵, 명치와 뒷목을 움켜쥔 학생들의 몸뚱어리가 짚단처럼 우수수 땅 위로 쏟아져 내렸다.

두 발로 지상을 딛고 선 이들은 없었다.

오직 저 멀리에서,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나를 바라보는 구경꾼들만이 남아있을 뿐.

후우, 하고 나는 숨을 고르며 그들에게 가라앉은 시선을 보냈다.

“더 할 말 있는 사람?”

화들짝 놀란 구경꾼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미친 새끼, 누군가 혀를 내두르며 던진 욕설만이 은은히 그 자리에 맴돌았을 따름이었다.

그제야 나는 쯧, 하고 혀를 차면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발목을 붙잡을 의외의 인물이 아직 하나 남아 있었다.

“……오빠!”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내 눈이 흘깃 등 뒤를 향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

새하얀 원피스 너머에서도 도드라지는 굴곡은 소녀의 발육 상태가 양호하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병약해서 빼빼 마른 몸이었는데, 새삼스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의 정체를 눈치 챈 내 낯빛에 화색이 떠올랐다.

“리아!”

그러나 오늘따라 리아의 안색이 조금 이상했다.

두 손으로 치마를 쥔 채, 다급하게 달려오는 폼부터가 그랬다. 리아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느 누가 감히 내 여동생을 건드린단 말인가.

나는 한달음에 달려 리아를 품에 안고 한 바퀴 빙글 돌렸다. 그리고 헐떡이며 숨을 고르는 리아의 등을 토닥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어야 했다.

“괜찮아, 리아? 도대체 무슨 일이야?”

“오, 오빠… 이, 이상한 사람들이 가게를 습격했어.”

분노인지, 당혹감인지.

나조차도 정체를 모를 감각에 의해 몸이 뻣뻣이 굳어 버렸다. 리아는 숫제 울먹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오빠의 이름을 연호하던데… 모르겠어, 무서워… 대부분은 여자들이더라고. 아, 아아! 그리고 아카데미 제복을 입고 있었던 것 같은……!”

“이런 씨발.”

나는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욕설을 내뱉으며, 곧장 허리 언저리로 손을 옮겼다.

설마, 염려하던 사건이 곧바로 벌어질 줄이야.

그때였다.

묘한 의문이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시점이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심지어 나는 여동생을 사랑해 마지않는 오빠였다. 느닷없는 사태에 정신이 없는 와중, 리아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고 하면 내 이성이 마비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움튼 자그마한 의문은 이내 언어로 옮겨졌다.

“……리아, 너 맞지?”

그러자 리아는 무슨 소리냐는 듯 두 눈을 깜박였다.

언제 보아도 사랑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이미 나는 한 번 속은 전적이 있었으니까.

“너 말이야,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거야? 너와 이목구비가 동일한 여자가 돌아다니고 있는데……!”

“아아, 진짜!”

리아는 내 주장을 다 들어주지도 않았다.

단지 까치발을 들더니 쪽, 하고 내 입에 입을 맞추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면서 리아는 짐짓 화가 났다는 듯 볼을 부풀렸다. 그래봐야 볼에 떠오른 옅은 홍조를 숨길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이제 됐지? ‘오랜만이야’라는 뜻이야! 세상에 오빠한테 이래 주는 여동생이 어디 있어?”

흠, 하고 나는 과연 그렇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처럼 망설임 없이 입을 맞출 만큼 오빠를 사랑하는 여동생은 리아밖에 없겠지.

이보다 완벽한 증거는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리아를 믿지 않으면 도대체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애매하기도 했고.

리아의 입술이 스치고 지나간 곳에서는 은은한 단맛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입술 어림을 손으로 만지작대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뭐야, 이 달달한 냄새는?”

“오빠를 위한 특별 선물.”

훗, 하고 리아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답했다.

어련하시겠지.

나는 리아를 향한 의심을 거둔 채, 다시 한 번 걸음을 재촉하기로 했다.

사실 이미 리아와 접촉하는 찰나에 기감으로 전신을 훑어본 뒤였다. 솔직히 말해 나도 내 여동생 둘을 완벽히 구분해 낼 자신은 없었다.

유일한 구분법이 있다면, 그것은 리아의 몸 구석구석을 기감으로 훑어보는 것뿐.

다행스럽게도 리아의 전신을 훑는 동안 어딘가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더불어 그 내부까지 투명이 들여다보였으니, 일단은 안심해도 좋았다.

그래, 믿자.

모두를 의심만 해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각오를 다지고 한 걸음을 내딛었을 찰나였다.

팍, 하고.

뇌리를 송곳처럼 찌르는 벼락이 있었다. 그 강렬한 두통에 일순 내 미간이 찌푸려졌을 정도였다.

나는 신음을 흘리며 어떻게든 몸을 가누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갓 태어난 사슴처럼 다리를 후들거리던 내 몸뚱어리가 어느덧 철푸덕 땅 위로 엎어지고 말았다. 의식이 흐릿해지는 와중에도, 나는 그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래 봐야 답은 오직 하나.

의문을 담은 내 눈빛이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리아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너… 무, 무슨 짓을…….”

“이게 다 오빠 때문이야.”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끈적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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