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22 - 7. 질투는 나의 힘(22)
리아는 어느덧 무릎을 살짝 굽혀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 황금빛 눈동자가 태양처럼 타고 있었다.
“오빠는, 나와 단 둘이 여생을 보내기로 했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 들려오는 소문마다 이상해… 왜 우리 오빠가 자꾸 한눈을 파는 것 같지?”
“그게, 무슨 소리…….”
“너무 걱정하지 마, 오빠.”
달콤한 숨결을 귓가에 불어넣으며, 리아는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욕심이 많지 않아… 우리 둘이 이어졌다는 증거만 있으면 충분해. 그래,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세상이 인정하지 않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증거.”
금빛 눈동자의 깊숙한 곳에서 타는 정체를,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광증, 집착, 애정.
무엇이라고 해도 좋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리아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탐욕’이 아니라 ‘리아’가 이처럼 극단적인 수를 동원할 리는 없지 않은가.
‘흡혈귀의 결계’.
그 영향력은 비단 아카데미 학생에 한정되지 않았다. 이 일대에 머무르고 있는 모든 이들한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절망적인 사실을 하나 내포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
믿어서도 안 된다.
그 누구든, 내 소중한 사람들조차 그 결계의 힘을 피해 갈 수 없으니.
지금의 나를 보라.
짧은 방심의 대가를 치르고 있지 않은가.
“셀, 린…….”
최후의 발악처럼, 나는 옅은 목소리를 토해냈다.
“셀린을, 찾아야 해… 납치를 당했…….”
“그거 알아, 오빠?”
내 애원에도 리아의 낯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도리어 미소를 지우면서, 싸늘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놀라울 정도의 온도 차였다.
“나, 실은 셀린 언니가 마음에 안 들었어. 아주 오래 전부터…….”
그것이 최후.
마지막에 사람 그림자가 보였던 것 같은데.
나는 그처럼 애매한 직감과 함께 눈을 감고 말았다.
**
“……자주 보는군.”
그 메마른 목소리가 뇌리에 울려 퍼지는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 곧장 정신을 차렸다. 주위를 둘러 보니, 내 몸은 검고 어두운 공허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이 또한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던 장소였다.
허공 곳곳에 균열이 일어나 있었다. 그 너머에 비치는 풍경들은, 어느 사내의 기억.
지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땅을 딛고 서자, 단단한 감촉이 발바닥으로부터 전해져 왔다.
빛조자 반사되지 않는 유리를 밟으면 이러한 느낌일까.
내 시선의 끝에는 낯익은 뒷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뒷짐을 진 채, 허공의 균열을 응시하는 그 등이 퍽 쓸쓸해 보였다.
이윽고 무감정한 금빛 눈동자가 흘깃, 하고 나를 돌아보았다.
“어디까지 한심한 꼴을 보여 주어야 만족할 거지?”
그 차가운 힐난에,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흐, 하고 허탈한 웃음소리가 목젖을 치고 흘러 나왔다. 무어라 반박하고 싶은데, 그럴 수조차 없었다.
여동생한테 당하다니.
그것도 상대는 무력이 전무한 일반인이었다. 무언가 약물을 동원했겠지만, 하이 익스퍼트에 이른 기사가 혼절한 뒤 댈 만한 핑계는 아니었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당신 말대로야. 내가 너무 방심했어.”
“일신의 무력이 강해졌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아.”
사내의 말투는 여전히 냉혹했다.
한 점의 자비조차 엿보이지 않는 그 목소리는, 신병을 가르치는 엄격한 교관의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약물, 인질, 혹은 정체불명의 마법까지… 널 위기에 빠트릴 수단은 무수히 많지. 너무 우쭐했군.”
“……그 셋 모두에 당했어.”
드물게도 털어놓는 한탄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느덧 나는 이 사내에게 묘한 친밀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늘어놓지 못했던 한탄을 이어가고 있지 않겠는가.
의외였던 점은, 사내도 내 불평을 일부러 제지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징징대지 말라’ 같은 소리나 들었을 텐데.
어찌됐든 좋았다. 나는 지금 무얼 해야 할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이 담백한 문장이 내게 공포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닌 척했지만, 그동안 나는 내 동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무력이나 지략뿐만이 아니었다.
이 무시무시한 시련 앞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많은 위안이 되었던가.
하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리아마저 저 꼴이 난 마당이었다. 남은 일행들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약물에 의해 기절하고, 소꿉친구는 납치당했는데 행방조차 알 수 없어… 심지어 방심한 탓에 흡혈귀의 주술에 당해? 푸흐, 하하하…….”
나는 그렇게 낯가죽을 두 손으로 훑어 내리면서.
“이런 씨발!”
온힘을 다해 욕지거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병신 새끼, 도대체 뭘 하는 거야! 아직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는데……!”
사내는 놀라지도, 나를 동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묵묵한 시선을 내게 향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오히려 좋았다.
그러는 편이 마음 편했으니까.
“황실의 비원도, 셀린의 행방도, 아카데미에 잠입한 흡혈귀의 음모도… 감도 못 잡았는데, 벌써부터 뒤통수를 맞아?! 진짜, 한심해서……!”
“답답한가?”
난데없이 던진 물음이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문 채로, 무슨 소리냐는 시선을 보냈다.
여전히 사내의 금빛 눈동자는 무심하기만 했다. 감정의 편린조차 엿보이지 않아서, 그 저의 또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실수를 하지. 신은 인류에게 완벽을 허락하지 않았거든… 나는 그걸 ‘한계’라고 부른다. 인간은 누구나 한계를 가지고 있어.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무너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지.”
고저조차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어조였으나, 나는 무심코 깨닫고 말았다.
그러한 결론을 내릴 때까지, 사내가 얼마나 아프고 다쳐야 했을지.
그래서 입술을 달싹일 뿐,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나뿐만이 아니야… 모두가 그랬어. 사매도, 성녀도, 심지어 내 스승조차도… 그런데 설마 너만이 예외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오만하기 짝이 없군.”
“그건……!”
“애송아, 둘 중 하나만 해라.”
피로한 낯빛을 하면서, 사내는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다시금 허공의 균열을 향했다. 그곳에서는 온갖 장면들이 뒤섞이며 재생되고 있었다.
“한계를 인정할 테냐? 혹은, 여태 그래 왔듯 또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뛸 거냐… 선택은 네 몫이다. 이 세계는, 너의 세계지 나의 세계가 아니니까.”
나는 그 차가운 조롱에 울컥, 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주저앉아 있던 내 몸이 절로 우뚝 섰다. 입술을 짓씹으며 한참이나 말을 고르던 내 입이 열릴 때까지는, 몇 초의 말미가 더 필요했다.
“……그렇다면 당신의 ‘사매’는?”
흠칫, 하고.
사내의 여유롭던 태도에 균열이 일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금 흘깃 뒤를 향했다.
닳고 닳아서, 이제는 먼지조차 남지 않은 삭막한 눈동자.
그러나 어째서일까.
나는 그 안에 흐릿한 감정이 일렁이고 있다고 느꼈다.
“당신의 ‘사매’는, 내 ‘사매’가 아니잖아… 그러니 당신이 감당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왜 보지 않으려 하지?”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나?”
“보고 싶잖아.”
직설적인 한 마디였다.
그러자 사내의 낯빛에 눈에 보일 정도의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그의 눈썹이 꿈틀이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사내가 먼저 시작한 판이었다.
내가 먼저 멈추어야 할 의리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보고 싶잖아. 그렇게 헤어졌는데… 당연히 보고 싶겠지! 그런데 왜 애써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웃기는 소리.”
내 날카로운 지적에도 사내는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코웃음을 치면서, 내 추론을 일축하려 들었다.
“애송아, 내 기억을 좀 엿봤다고 기고만장해진 모양인데… 내가 걸어 온 길은 그보다 몇 배는 거칠고 길다. 추측이야 자유라지만, 내 마음을 함부로 가늠하려 들지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하지만 그조차도 잠시.
다시금 내뱉어진 내 목소리에, 사내는 침묵을 지켜야 했다.
“그날의 기억, 그날의 심정…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몰라. 그렇잖아?”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이내 사내는 기나긴 한숨을 토해내며 눈을 감았다.
“……좋아, 피차 잘못했다고 치지.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항복 선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무언가 안타까운 마음에 말을 이어가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사내가 지나칠 수 없는 조언을 건넸던 탓이었다.
“좀 더 단순히 생각해라.”
“……뭐?”
뜬금없는 소리에, 나는 그렇게 짤막한 의문성을 토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메마른 목소리를 덧붙여 나갔다.
“모든 사건은 이어져 있어. 그리고, 조력자를 잃었다면 새로 구하면 그만이겠지. 예를 들어, 그래… 흡혈귀의 결계로도 제어가 불가능한 강자들.”
“그게 도대체 누구…….”
“왔군.”
그리고 쿵, 하고.
세계에 강진이 일었다. 나는 깨질 듯한 두통에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더는 대화를 나눌 여유조차 없었다.
사내는 괴로워하는 나를 보며, 어딘가 쓸쓸한 한 마디를 남겼다.
“……잘 해드려라.”
꿈의 끝.
의식이 느닷없이 부상하고, 헐떡이며 눈을 뜨고, 폐부를 가득 채우는 약 냄새.
그늘진 잔디밭 위에 내 몸뚱어리가 눕혀져 있었다.
내 망막 위로 정체불명의 연기가 꾸불거리며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근원지를 찾아 보려다가, 이내 시선을 마주치고 말았다.
피로에 젖은 연녹빛 눈동자.
나는 그 탁한 색조를 보자마자, 무심코 하나의 감상을 품고 말았다.
스승과 제자는 닮는 법이구나.
“……일어났느냐?”
남부 열왕국의 국사.
대수림의 수호자이자, 다섯 원소의 지배자.
‘대마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