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23 - 7. 질투는 나의 힘(23)
타인의 기억에 대해서.
이전에는 딱히 고민한 적이 없던 주제였다. 애초에 남의 기억을 두고 왈가왈부 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고민할 가치조차 없었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러한 화두를 떠올리지도 않으리라.
유일한 문제가 하나 있다면, 내 인생은 일찌감치 ‘평범한 삶’이라는 궤도로부터 이탈해 버렸다는 점이었다.
나는 타인의 기억을 엿볼 수 있었다.
아니, ‘타인’이라는 표현은 어폐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 상대는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
고독한 길을 걸어야 했던 어느 사내의 추억.
그 흐릿한 꿈이 양감과 질감을 되찾아 눈앞에 나타났다. 살아 움직이는 이 자그마한 소녀의 정체를, 나는 진작부터 깨닫고 있었다.
‘대마녀’였다.
대륙에 단 셋밖에 없는 마스터 중 하나이자, 미래에서 온 내가 스승으로 모셨던 인물.
무어라 울컥, 하고 차오르는 감정에 나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내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이 감흥 또한 내 몫이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그 잔향만으로도 일순 평정을 잃을 정도는 되었다.
물론 금세 평정을 되찾기는 했다. 의식을 되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자각이 힘들었을 뿐, 이성을 되찾고 보면 내가 울컥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소녀는 무려 ‘대마녀’였다.
수백 년을 살아 온 여인의 눈썰미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 피로하던 낯빛이 은은한 흥미가 번졌다.
“……호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 같은 눈이었다.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모습이 묘하게 위협적이라서, 나는 곧장 몸을 벌떡 일으켜야 했다.
“페, 페르쿠스 가문의 이안이 남부 열왕국의 국사(國師)를 뵙…….”
“신기하구나.”
탁, 곰방대를 털어내며 대마녀는 뜻 모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는 초면으로 아는데, 단번에 날 알아보다니… 혹시 예전에 마주친 적이 있던가?”
지당한 지적이었다.
나는 그 느긋한 어조에 함부로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이윽고 흔해빠진 변명을 토해냈을 따름이었다.
“아니, 그… 예전부터 대마녀 님을 존경하던 차에…….”
“무척이나 존경했나 보구나.”
픽, 하고 헛웃음을 터트리며 대마녀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옷을 툭툭 털며 곰방대를 입에 무는 몸짓에서 어른스러운 느낌이 물씬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혼란스러운 인상을 주는 여인이었다.
말투부터 시작해서, 하는 짓까지 하나하나 연륜이 스며들었는데 정작 그 외모만이 세월을 빗겨가 있다니.
나는 아직 갑작스러운 조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머뭇거리기만 했다. 그러든 말든, 대마녀는 딱히 나를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단지 의미심장한 발언을 남겼을 뿐.
“……날 보자마자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지을 정도면.”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대마녀는 내 낯빛에 일었던 감정의 파문을 제대로 눈치 채고 있었던 듯했다. 나는 어떻게든 이를 해명해 보고자 했다.
“아니, 저… 그건 말입니다……!”
“됐다, 됐어.”
그러나 대마녀는 쓸데없는 짓이라는 듯 왼손을 휘휘 내저었다.
하기야 이미 수백 년 동안 절대자로 군림하던 여인이었다. 비록 세속에서 이름을 날린다 한들, 아직 애송이에 부족한 사내 따위에게 관심을 기울일 이유는 없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무리 오랜 세월을 살아왔어도, 남의 속내를 엿보는 짓 따위는 하지 못하겠거든. 그러니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그만하자꾸나.”
감히 누구 말이라고 토를 달겠는가.
나는 결국 눈치를 살피며 다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죄 지은 강아지 마냥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기를 몇 번.
후우, 하고 기나긴 한숨 소리와 함께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이어졌다.
그 다음 순간.
턱, 하고 기도가 닫혔다. 나는 숨조차 내쉬지 못하고, 일순 빛이 소실한 세계를 망연히 응시해야 했다.
그늘 진 세상 속에서 연녹색 눈동자가 홀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채 서서, 흘깃 등 뒤로 던진 시선이 그토록 냉혹하고 차가울 수 있을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마력이 밀도를 지닌 액체가 되어 폐부를 가득 채웠다. 단지 존재감만으로도 이만한 위압감, 이조차도 본신의 힘에 비하자면 지극히 작은 파편에 불과했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이성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내 동공이 멋대로 확장되며, 어둑해진 시야를 도해하기 시작했다.
열핏 묘한 소리가 내 귓전을 스친 것도 같았다.
“호오.”
그렇게 내 망막이 은빛의 오러로 불타기 직전.
꾸욱, 하고 주위의 마력이 더욱 거칠게 내 심장을 조여 왔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비명이라도 내지르고 싶었지만, 숨조차 쉴 수 없는 마당이었다.
그러한 자유가 내게 허락될 턱이 없었다.
흐으, 흐으.
두 손으로 목을 움켜쥔 내 몸뚱아리가 다시금 땅바닥에 엎어졌다. 괴로워하는 내 몸뚱어리 위로 태연자약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오행의 균형이 무너졌어… 그래봐야 이 일대에 한정된 이야기이긴 하다만, 균열은 언제나 더욱 커질 위협을 숨기고 있는 법이지. 흐름이란 걷잡을 수 없는 물길, 이미 기울어진 저울을 어찌 되돌려야겠느냐.”
저벅, 저벅.
대마녀가 걸음을 내딛는 소리가 고막을 즈려밟았다. 아무런 죄의식도 느껴지지 않는 걸음걸이였다.
“당연히, 무게추를 빼야겠지?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마… 세상은 두터운 천과 같아서, 그 위에서 모든 흐름이 만들어지지. 그런데 그 천 위에 무거운 돌 하나가 올라가게 된다면?”
모든 흐름이 그 돌을 중심으로 모이게 된다.
배운 적도 없는 지식이 뇌리를 폭우처럼 두들겼다. 벌써부터 이어질 대마녀의 말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리고 그 돌이 너다.’
“그리고 그 돌이 너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숨이 막히고, 의식이 흐려질수록 오감은 더욱 예민해져 갔다. 날카롭게 벼려진 촉각의 끄트머리에서, 알아서는 안 될 지식들이 흘러 들어왔다.
대마녀는 살짝 상반신을 숙이고 있었다. 무감정한 속삭임이 귓전을 적셨다.
“…….너무 원망하지 말거라.”
바로 그때였다.
시야가 쪼개지고, 쪼개지고 쪼개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한 실선으로 공간이 분해된 후에야, 나는 깨달았다.
나를 묶고 있던 무형의 흐름을.
이후에는 본능에 충실했을 따름이었다.
허공에 새겨지는, 은빛의 열상.
그야말로 일직선, 느닷없이 솟구친 손도끼가 기나긴 실선을 그리자 대마녀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느덧 두어 걸음 물러난 대마녀의 몸에는 자그마한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지만.
비로소 나는 헐떡이며 가슴을 두들길 수 있었다.
산소를 잔뜩 들이켜도 괴로운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이후로도 몇 초 동안이나 호흡을 진정시킨 후에야, 나는 제정신을 되찾았다.
안개 낀 내 시선이 말없이 대마녀를 향했다.
얼떨떨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던 여인은, 그제야 옅은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과연, 네 잘못이 아니었구나.”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나였다. 무어라 볼멘소리를 낼 기운조차 남아있지 못했다.
다만 콜록거리며 숨을 들이켰을 뿐.
“이만한 음모를 꾸밀 만큼 교활한 인간들은, 죽기 직전까지 제 본심을 내보이지 않지… 워낙 사안이 중대했던 터라, 네게 몹쓸 짓을 저질렀다. 어른으로서 사과하마.”
그러면서 대마녀는 서서히 허리를 굽혔다. 한 손을 반대편 가슴에 올리는 그 자세는, 남부 열왕국에서 전통적으로 사죄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웃어른으로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 표시였다. 그렇다고 해도 죽음의 위기에 몰렸던 경험을 보상 받을 수는 없겠지만, 어쩌겠는가.
사실 이만한 사선은 몇 번이고 넘어왔던 나였다.
결국 내 입에서는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차피 죽일 생각은 없었다니까, 뭐.
“……괜찮습니다. 사안이 그만큼 중대한 사안이니까요.”
더불어 나도 어서 이 사태를 해결하고 싶기도 했고.
목적을 위해서는 자존심을 굽힐 때도 있어야 했다. 대마녀쯤 되는 조력자를 사소한 앙심으로 잃을 수는 없었다.
그래, 그렇게 끝났어야 했는데.
“다만, 묻고 싶은 내용이 하나 더 있는데 말이지…….”
나는 그 가라앉은 목소리로부터 묘한 압박감을 느꼈다.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감정의 깊이였다. 비록 물리적으로 실체화되지는 않았지만, 심리적인 위협 자체는 내 숨통을 틀어막던 당시의 배 이상이었다.
다시금 허리를 꼿꼿이 핀 대마녀가 물었다.
“네놈, 뭐냐?”
무슨 소리냐고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대마녀가 의심이 가득한 눈빛을 하며 재차 물어 왔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내 비전을 알고 있지? 아니, 알고 있는 수준이 아니야… 실전에서 다룰 정도로 숙련되려면 오랜 수련이 필요했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한 걸음, 대마녀가 내게 다가왔다고 느낀 찰나.
내 턱이 어느덧 대마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내 얼굴을 휙휙 돌리며, 유심히 나를 훑어보는 그 눈빛이 어딘가 위험해 보였다.
마치 난해한 수수께끼를 마주한 마법사와 같은 낯빛이었다.
그리고 마법사란 족속은, 수수께끼가 있다면 반드시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법.
내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 내렸다.
“그, 그거헌……!”
“한 톨의 거짓도 섞지 않는 편이 좋을 거다.”
성대를 긁고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사나웠다.
그럴 만도 했다. 마스터의 비전이란 일평생을 일구어 온 결실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것을 도둑 맞았으니, 대마녀가 어떤 심정일지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고민이었다.
사실대로 털어놓는다면?
무슨 헛소리냐며 나를 당장 죽이려 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혹은, 그럴싸한 거짓말을 늘어놓는다면?
수백 년을 살아 온 현인 앞에서 감히 거짓부렁을 읊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 살해를 당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
이변이 발생한 것은 그때였다.
“잘못 보았을 리가 없어… 아무리 전력이 아니라지만, 내 결(結)을 풀 수 있는 기술은 해(解)가 유일해. 일부러 무리까지 한 보람이… 으읏?!”
흠칫, 하고 감전이라도 당한 듯 대마녀의 몸이 움찔했다.
느닷없는 변화였다.
대마녀조차 이를 예상하지는 못했는지, 동그랗게 뜨인 눈동자에서 경악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여인의 낯빛이 창백히 질릴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크으… 윽, 끄으……!”
비틀, 비틀.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아내던 여인의 몸뚱어리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깜짝 놀란 쪽은 비단 대마녀뿐만이 아니라서, 나는 눈을 부릅뜬 채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러한 의문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대마녀의 몸이 풀썩 땅 위로 엎어졌다.
한도를 초과한 통증에 그 몸이 절로 바르르 떨렸다. 마른 걸레에서 물기를 짜내듯, 대마녀는 제 몸뚱어리를 비틀며 신음을 짜냈다.
“어, 어째서… 크읍, 벌써어어……!”
나는 이후에도 한참을 머뭇거렸다. 무얼 어째야 할 줄 몰라서, 아픔에 신음하는 대마녀를 방치하기를 얼마쯤.
불현듯 어느 기억이 내 뇌리를 벼락처럼 치고 지나갔다.
그래, 이거라면.
나는 곧장 대마녀의 자그마한 몸을 들쳐멘 채 헐레벌떡 내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