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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24)화 (524/649)

Chapter 524 - 7. 질투는 나의 힘(24)

내가 눈을 뜬 장소는 아카데미의 외진 곳이었다.

사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이에 관해 묻기도 전에 대마녀가 쓰러져 버린 탓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의문점은 아직 잔뜩 남아 있었다.

리아에 의해 의식을 잃고 기절한 나를 어떻게 구출했는지, 그리고 또 그 이후에 리아는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지 못하는 마당이었다. 대마녀가 나를 어디로 끌고 왔는지 알고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떠오르는 의문들을 꾹꾹 눌러 두기로 했다.

일단 대마녀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쪽이 우선이었다. 그러고 난 뒤에야 궁금한 점을 묻든 말든 하지 않겠는가.

그나마 내가 아카데미의 고학년이라서 다행이었다.

몇 년에 걸친 세월을 아카데미에서 보낸 나였다. 아무리 아카데미가 넓더라도, 고학년쯤 되면 그 지리에 밝아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내 방황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끝났다.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어진 내 몸이 바람을 가르며 쏘아졌다.

그 길의 끝, 나는 어느덧 연금학부의 연구동에 도착해 있었다.

특수 작전을 방불케 하는 잠행이었다.

자제를 낮추고, 숨소리를 죽인 채 나는 최대한 소리 없이 걸어야 했다. 주로 회피를 위해 쓰이던 공간 굴절까지 사용해 남들의 시선을 피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대마녀는 남부 열왕국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먼 옛날, 남부는 소규모 부락과 이름 없는 왕국들이 난립하던 투쟁의 땅이었다. ‘대수림’이라는 천혜의 요새는 외지인의 접근을 용납하지 않았지만, 평화와 번영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

나날이 전쟁만이 이어지던 지옥의 땅.

그들을 덮친 것은 재앙이었다.

‘흡혈귀’라 이름 붙은 마인은 단숨에 대수림의 공포로 떠올랐다. 수천에 달하는 연합군조차 그 괴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모든 이들이 죽음을 각오했다.

수백 년에 이르는 전쟁은 남부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단독으로 흡혈귀에 대항할 전력을 갖춘 집단은 존재하지 않았고, 하물며 남부를 하나로 묶을 구심점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바로 그때, 위대한 마법사가 나타났다.

망국의 귀족 출신이었던 여인은 스스로를 희생해 ‘흡혈귀’를 대수림의 깊숙한 곳에 봉인했다. 다섯 원소를 다루는 그 전무후무한 술식과, 드넓은 대수림의 절반이 소멸할 때까지 이어진 혈투를 목격한 이들은 입을 모아 외치는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마스터가 탄생했다!’

그 후로 여인은 제 이름을 버렸다.

남부 열왕국의 뿌리이자 국사, ‘대마녀’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처럼 상징적인 위인이었다.

얼굴을 붉힌 채, 헐떡이며 신음을 토하는 모습 따위를 보여 줄 수는 없었다. 남부 열왕국의 근간을 뒤흔들 소식으로 비화될지도 몰랐다.

굳이 말하자면, 제국의 황제가 중병을 앓고 있다는 풍문과 비할 만할까.

‘대마녀’는 언제나 강인해야 한다.

나약해지거나 흔들려도 안 됐다. 따라서 병을 앓는 계집아이 같은 얼굴을 보여서도 안 됐다.

그것이 바로 마스터의 숙명이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나의 노력이 무의해질 만한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나는 기어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엠마의 공방으로 숨어드는 데 성공했다.

사실, 진정한 난제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이걸 어쩐다…….”

나는 막막한 심정에 그렇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내 눈앞에는 얼마 전에 정리해 두었던 쪽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

<정체불명의 약물 조제법>

1. 은월초의 씨앗 가루와 빻은 세계수의 잎사귀, 대수림 안개꽃을 각각 3:1:2 비율로 섞는다.

2. 이후 마력이 풍부한 수원지의 맑은 물로 3분 동안 끓여낸 뒤, 거름망에 걸러 진액을 남긴다.

3. 위의 과정에서 생긴 잔여물은 고온건조한 바람으로 단시간에 말려 보관한다. (※17번 과정에 필요)

4. 진액은 떨어트렸을 때 당장 풀어지지 않을 정도로 뭉근히 졸여낸다.

…(이하 생략)…

——

편지의 뒤편에 남아 있던 조제법을 순서대로 정리한 내용이었다. 최대한 간략히 정리했음에도 무려 문항의 수가 24개를 넘어가고 있는 판이었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렇게 망설이던 내 귓가에, 흐릿한 신음이 와 닿았다.

“크으… 읏, 끄으으으……!”

의식을 잃기 직전이었음에도 대마녀의 몸은 꼼지락거리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얼마나 아프면 저럴까.

결국 나는 짙은 한숨을 토해내고 말았다.

어차피 내게 선택지는 없었다.

할 수 있냐고?

아니, 해야만 했다.

**

대마녀는 실로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오래 전의 기억이었다. 수백 년 전, 아직 소녀가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

어느 날 소녀는 깨달았다.

“너, 천재구나.”

이제는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스승이었다.

어린 시절, 소녀를 처음으로 맡은 마법사는 그렇게 탄성을 내질렀다. 스승이 가르치지도 않은 진도를 단 하룻밤 안에 모조리 숙달하고 나서 들은 말이었다.

‘천재’라니.

소녀는 그 찬사가 유독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객관적이지 않고, 정량적이지도 않은 평가였다. 도대체 ‘천재’의 기준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소녀는 재차 깨달아야 했다.

“넌 천재야.”

“가문의 미래가 네게 달려 있다.”

‘천재’의 기준 따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천재’라 부른다는 사실만은 명확했다. 자세한 기준은 알 수 없었지만, 소녀는 그렇게 ‘천재’가 되었다.

이후, 소녀의 재능을 엿본 이들은 모두 탄성과 찬사를 금치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의 명성은 온 대륙으로 퍼져 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의 동경과 기대를 무겁게 느낄 틈도 없었다. 채 열 살도 되기 전부터 짊어져 왔던 무게가 아니던가.

단 한 번도 기대를 받지 않은 적이 없어서, 소녀는 뭇 사람들의 기대가 얼마나 무거운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다만, 그래.

이따금씩 그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소녀에게는 일곱 살 터울의 언니가 있었다. 유독 소녀를 아끼고 귀여워했던 언니는, 종종 장녀로서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가문의 모두가 나를 차기 가주라 생각해.”

아직 어린 소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어째서 남들의 기대를 감당하기 버거워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토록 큰 고통이라면 어째서 훌훌 털어 버리고 떠나지 못하는지.

어렴풋이 그 해답을 알게 되었을 무렵이었다.

“다음 대의 가주는 너다.”

가주의 선언에, 가신들은 당연한 결정이라는 듯 박수를 쳤고.

소녀는 보았다.

차갑고도 뜨거운 감정으로 얼룩진 언니의 눈에서 떨어지던 핏방울을.

이윽고 세월이 흘러, 그때 보았던 피눈물은 불길이 되어 모든 것을 태워 버렸다.

폐허 속.

소녀는 퍽 외로워지고 말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여태껏 수도 없이 보아 온 악몽이었다. 대마녀의 닳고 닳은 심장은 이제 덜그럭거리지도 않았다.

이제 끝인가, 하고 소녀가 그렇게 자조 어린 탄식을 읊조렸을 찰나.

“……스승님?”

느닷없이 그늘진 세상이 말간 빛으로 물들었다.

대마녀는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기억은, 존재할 리가 없을 텐데.

소녀의 세계는 언제나 어둡고 칙칙했다. 무채색의 세계가 이처럼 찬란히 빛났던 적이 있단 말인가.

맑은 호수처럼 뜨인 망막 위로 새하얀 구름이 해일처럼 스쳐 지나갔다.

낯선 풍경이다.

저 멀리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낯빛을 한 사내와, 새침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돌리고 있는 소녀였다.

“스승님, 도대체 무슨… 혹시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기묘했다.

그 이상한 물음에, 소녀는 무심코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말았다.

“흥, 악몽은 무슨? 끽해야 약 시간이 된 거겠지. 내참, 이래서 나이가 무섭… 히이이익?!”

딱, 하고 손가락을 퉁기자 허공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건방진 제자를 훈계하기 위한 벌이었다. 그래봐야 짜릿한 통증밖에 일으키지 않겠지만.

파르르 몸을 떠는 소녀를 보며, 대마녀는 애써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이윽고 헛기침과 함께 근엄한 목소리를 흘리면서.

“……진작 깨 있었다, 둘째야.”

아마도 소녀가 바라마지 않았던 일상이었다.

그리고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새하얗게, 새햐앟게.

모든 기억을 지워 가면서.

*

대마녀는 헐떡이며 눈을 떴다.

흥건한 식은땀과 부릅떠진 두 눈이 그녀의 경악을 대변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지?

악몽은 이상하지 않았다. 마도의 극의를 깨우치기 전까지, 몇 번이나 보아왔던 기억이었으니까.

하지만 뒤이은 꿈은 명백히 이상했다.

대마녀는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풍경이었다. 수백 년을 살아오며 제자를 몇 번 들이기는 했으나, 이처럼 애틋하고 그리운 마음을 품은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왜.

이처럼 가슴은 두근거리는지.

대마녀는 오랜만에 맥동하는 심장 위로 조심스레 손을 포갰다.

‘행복’이라고?

그따위 감정 따위는, 내게 허락되지 않았을 텐데.

난데없는 깨달음이 뇌리를 스친 것은 그때였다.

온몸이 개운했다.

극에 달한 통증에 끙끙대던 이전과는 영 딴판인 몸 상태였다. 화들짝 놀란 대마녀의 눈이 제 몸 곳곳을 훑어 내렸다.

이윽고 여인의 눈이 닿은 곳은, 제 머리맡에 놓인 향로였다.

그곳에서 희미한 약 냄새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너무나 낯익은 향취.

“……어떻게?”

멍하니 내뱉어진 의문과 함께, 대마녀의 몸이 서서히 일으켜졌다.

대마녀가 늘 곰방대에 넣고 다니는 약이었다. ‘흡혈귀’라는 괴물을 대수림 깊숙한 곳에 봉인하기 위해서, 대마녀는 제 몸을 결계의 핵으로 삼아야 했다.

그 대가가 이 꼴이었다.

진통성 마약이 없으면, 상상을 초월하는 통증에 일상 생활도 유지할 수 없는 가련한 삶. 이러한 운명에 처한 대마녀가 부작용도 없고, 제 육체에도 알맞은 마약을 개발하게 된 건 필연이었다.

그래, 아무도 몰라야 하는 조제법인데.

공방의 구석진 곳에 사내 하나가 엎어져 있었다. 나름대로 피로를 이겨 보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향로에 향을 피웠으니 나른해지는 몸을 이겨 내기는 힘들었을 테지.

그 앞에 자그마한 쪽지가 놓여 있었다.

<정체불명의 약물 조제법>

전문가조차 도전하기를 꺼려 하는 복잡한 과정이었다.

워낙 독특한 연단법을 접목한 탓에, 오랜 시간 숙련되지 않으면 따라하기도 고된 조제법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사내는 해냈다.

대마녀의 눈이 말없이 탁자 위에 엎어진 사내의 얼굴을 향했다. 초면일 텐데, 어딘가 친숙한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거리기를 한참.

대마녀가 가까스로 내뱉은 첫 마디는, 파르르 떨리는 시선과 함께하고 있었다.

“……이안 페르쿠스.”

너, 도대체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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