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26 - 7. 질투는 나의 힘(26)
마스터는 각국의 힘을 상징한다.
그들의 존재는 단순히 ‘강자’라는 개념으로 설명이 불가능했다. 그들은 일종의 수호신이자 구심점으로서 살아가고 있었다.
제국의 검공은 황실을 수호한다.
성국의 성자는 성도 시엔델을 지키며, 대마녀는 대수림에 도사린 거악(巨惡)을 억제하고 있었다.
이러한 구도는 오랜 시간 유지되어 왔다. 심지어 새로운 마스터가 등장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황궁을 수호하던 ‘대현자’가 모습을 감춘 시점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성자와 대마녀보다도 오랜 시간을 살아오던 노마법사는 검공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일국에 마스터가 둘 이상 소속되어 있다면, 균형이 붕괴되고 말 테니까.
그만큼이나 마스터의 존재는 특별했다. 당연히 그 후계를 정하는 문제 또한 온 대륙이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대마녀가 제자를 모집한단 소식에 각국의 유력자가 아카데미를 찾아온 것이다.
누구나 제 가문에 소속된 이들이 대마녀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다 비전이라도 전수받는다면, 그 깨달음의 파편만으로도 발전을 도모해 볼 만하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유르디나 가문의 비전 검술을 들 수 있었다. 그들이 자랑하는 ‘금사검(金獅劍)’조차 먼 옛날 마스터가 건네 준 깨달음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풍문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대전제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남아 있었다.
대마녀의 제자가 된다는 것.
그것은 다시 말해, 남부 열왕국의 다음 수호자가 된다는 뜻이었다.
협상의 여지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이 조건에 동의하지 않는 이를 대마녀가 제자로 뽑을 턱이 없었으니까.
비전이나 깨달음을 다소 공유할 수는 있겠지만, 남부 열왕국의 ‘구심점’이라는 상징을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이러한 단점은 얼마든지 감수할 만했다.
무려 차기 마스터가 될지도 모르는 기회다. 이를 놓친다면 바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만일 그에 준하는 대안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면 말이다.
제국의 마스터가 남부 열왕국의 마스터를 습격할 때까지는 몇 초도 필요하지 않았다.
“어르신, 우리 이야기 좀 합시다!”
쾅, 하고 문을 걷어차면서 외친 말이었다.
아무리 단단한 재질이라도 마스터의 각력을 견뎌 낼 소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짧은 폭음과 함께 처참히 구겨진 문짝이 쩔그럭거리며 불쾌한 소음을 일으켰다.
나는 그저 검공의 뒤에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래도 되나?
당장 대마녀의 처소에 도달하는 동안 우리를 만류한 이들이 수십이었다. 대부분은 남부 열왕국에 속한 귀족들로, 대마녀를 수행하기 위해 파견된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눈이 돌아간 검공 앞을 그 누가 가로막는단 말인가.
다진 고기가 되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자리를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검공은 친절하게도 상대가 그러기도 전에 모조리 기절시켜 버렸지만 말이다.
검을 뽑을 필요도 없었다.
검공이 칼날처럼 벼려진 살기를 살짝 드러내자마자, 대부분의 수행원들은 오줌을 지리며 그 자리에 기절해 버렸으니까.
언제 보아도 괴물 같은 강함이었다.
다만 바짝 긴장한 나와 달리, 검공은 기세 좋은 걸음걸이로 나아가고 있었다. 안락 의자에 몸을 축 늘어트린 대마녀를 향해서.
대마녀도 여유가 넘치기는 마찬가지였다.
“꽤나 거친 인사로구나, 검 미치광이 꼬맹아… 내 진작에 그 버릇을 고쳐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흥, 그게 벌써 몇십 년도 더 된 이야기 아니오? 정녕 한 판 붙여봐야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시겠소?”
“세월의 흐름은 이미 뼈에 사무치도록 실감하고 있는 참이다. 당장 내 앞에서 시건방지게 눈을 부라리는 꼬맹이가 서 있지 않느냐? 옛날이었다면 고개도 들지 못했을 텐데… 쯧, 세월이 참으로 무상하구나.”
그렇게 혀를 차면서, 대마녀는 자연스레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어쩔 수 없이 대화에 임한다는 티가 팍팍 나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 설마, 이만한 무례를 저지르고도 아무 일도 아니란 말은 하지 않겠지?”
“몰라서 물으시오?”
검공은 맹수처럼 목울대를 긁으며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악물어진 잇새로 달구어진 숨소리가 새어 나올 정도였다.
“아무리 제자가 급하더라도 정도가 있지, 남이 점 찍어둔 애를 데려가려 해? 염치는 개나 준 거요?”
“하, 난 또 뭐라고.”
대마녀는 피식, 하고 코웃음을 치며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생글거리는 미소가 묘하게 검공을 비웃는 모양새였다.
“아직 네놈의 제자도 아니잖느냐? 그럼 내가 탐 좀 낼 수 있지, 누가 칼이라도 들고 협박이라도 했다더냐?”
“그것 참, 무척 끌리는 선택지요.”
그러면서 검공은 슬쩍 제 허리춤의 검을 보여 주었다.
황제가 하사한 검은 제국이 지닌 최고의 신물 중 하나였다. 그 새하얀 검집 위에 새겨진 금빛 용이 황실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만한 명검은 필연적으로 주인을 가린다.
다시 말해, 저 검은 검공을 제외한 그 누구도 지닐 수 없다는 뜻이었다. 자연스레 검공을 상징하는 무구가 될 만했다.
하지만 대마녀는 그 실력 행사를 암시하는 신호에도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이미 검은 잔뜩 겨누고 있지 않느냐? 애초에 피할 수도 없는 종류로… 설마 내가 이 정도로 뜻을 거두리라 착각했느냐?”
“그럼, 진짜 한 판 하자고?”
살짝 자세를 낮추며 검 손잡이에 손을 얹는 폼이, 검공은 진심으로 보였다.
새파란 살기가 불씨처럼 타오른다.
슬슬 검공의 분노가 위험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다. 이제라도 내가 나서야 하나, 라고 생각했을 찰나.
“저 꼬마의 뜻은 물어봤느냐?”
“……뭐?”
그 짧은 물음에, 검공은 몸을 흠칫 떨며 자세를 흐트러트렸다.
대마녀는 여전히 태연한 미소를 짓고 있던 참이었다.
“저 꼬마의 뜻은 물어봤냐고 물었다만? 당연히 선택은 저 아이의 몫이 아니냐. 저 아이의 미래니까.”
“흥, 이놈은 태생부터 제국의 귀족이요. 대답이야 뻔한……?”
자신만만하던 검공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질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말없이 검공의 시선을 피했던 탓이었다.
검공의 눈이 부릅떠지고, 몸을 부르르 떠는 장면이 차례차례 내 망막 위를 스쳤다.
어쩐지 이어질 전개가 벌써부터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렇게 내가 눈을 질끈 감은 직후.
“네, 이노오오오옴! 이안 페르쿠스, 설마 제국을 배신하겠다는 거냐?! 그러고도 네가 제국의 귀족이냐?!”
검공이 길길이 날뛰는 소리가 쩌렁쩌렁 고막을 강타했다.
어찌나 화가 났는지 목소리에 기파가 담겨 있을 정도였다.
덜그럭거리며 온갖 가구들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절대자의 분노는, 하이 익스퍼트에 달한 나조차도 감당하기 힘든 면이 있었다.
나는 두 귀를 틀어막고 싶은 욕망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귀족과 평민을 불문하고, 제국의 모든 신민은 황실의 은혜를 입은 몸! 그렇게 배은망덕하게 굴 테냐?!”
“쯧쯧… 그러니까 제국이 안 된다는 게지.”
검공의 고성이 멈춘 것은 그 무렵이었다.
노인의 핏발 선 눈을 마주하며, 대마녀는 검지를 까딱이녀 혀를 차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용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깟 의무와 명예만 운운하는데 누가 제국에 충성을 바치고 싶겠나? 아무리 명예로운 기사라도 배를 곪으며 검을 들 수는 없는 법… 당연히 의무에 어울리는 보상을 주어야지.”
“끄응… 그, 그건…….”
얼핏 듣기에도 옳은 말이었다.
본래부터 말재간이 없었을 것이 분명한 검공이 쉽사리 반론을 꺼낼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한참을 끙끙대던 검공은, 은근슬쩍 내 눈치를 살피며 헛기침을 했다.
“……어쩔 수 없구나! 그렇다면 내 소중한 조카손녀 중 하나를 주마. 시엔이 어떠냐?”
“아니, 예전에 이미 했던 이야기 아닙니까?”
“그럼 둘? 아이리스, 시엔! 둘은 어떠냐. 내 조카손녀 중에서는 미색이 제일 뛰어난 아이들인데……!”
늙은 남자의 집착은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추한 면이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황실을 통째로 넘겨줄 듯한 검공의 기세에, 나는 그만 시선을 돌려 버리고 말았다.
“응? 너도 대수림에서 평생을 썩기는 싫지 않느냐. 그래도 예쁜 아내 여럿 끼고, 황실에서 화려한 인생을 즐기는 편이 여러모로……!”
“그만, 그만.”
나를 대신해 검공은 만류한 쪽은 대마녀였다.
검공은 이제 눈물마저 그렁그렁 해져서 내게 매달리려던 참이었다. 만일 대마녀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그만하라고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대마녀도 설마 검공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듯했다.
그러니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이마를 짚고 있지 않겠는가.
기나긴 한숨이 흘러 나왔다.
“아니,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놈이 무슨… 그만! 내가 졌다. 협상을 하자꾸나.”
“……협상?”
그 제안이 솔깃했는지, 검공은 곧장 울먹거리기를 멈추고 대마녀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그 눈동제에는 기대감마저 서려 있었다.
“그래, 협상. 마침 내가 저 꼬마한테 맡길 일이 있었는데, 네가 좀 도와주는 편이 어떠냐?”
“아니, 그게 무슨 해괴한 소리요?”
“그러면서 네 실력을 보여주면 되겠지. 그럼 꼬마가 네게 혹할 가능성이 더 커지지 않겠느냐?”
“……흠.”
검공은 대마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 여긴 듯했다.
옅은 침음을 흘리면서, 그는 혼잣말을 웅얼거렸다.
“조카 녀석의 호위야, 뭐… 그 정도면 충분할 테고. 잠깐 숨을 돌리는 정도라면…….”
나는 이 일련의 사태를 보며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어떻게 될까 싶었는데, 설마 대마녀가 검공의 협조를 얻어내는 데 성공할 줄이야.
대마녀는 상상 이상으로 검공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위엄 넘치는 외모와 ‘검공’이라는 명성에 가려진 그 유치한 본모습을!
이윽고 검공은 대마녀가 예상하던 그대로의 대답을 내놓았다.
“뭐, 까짓 거… 마침 아카데미가 어수선하다 느끼던 참이었습니다. 노인 공경 한 번 하는 셈 치죠.”
말투마저 예전과 마찬가지로 공대로 돌아간 뒤였다.
이쯤 되면 검공의 화는 모두 풀렸다고 봐도 무방할 듯했다. 나는 그렇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아직 대마녀는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수상쩍은 미소를 머금으며, 은근한 어조가 이어졌다.
“그런데 말이다, 사실 조건이 하나 더 있다만…….”
“……?”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 연극은 검공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어리둥절한 나와 검공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고, 몇 분 후.
내 앞에는 난생 처음 보는 소녀가 서 있었다.
기품 있는 암청빛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떨어져 내렸다. 아카데미 1학년의 제복을 입은 소녀의 푸른 눈동자는 별빛을 박아 넣은 듯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눈을 부릅뜬 채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반면 대마녀는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를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을 끅끅대던 대마녀는, 이윽고 검지로 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푸흡, 꺄흐흐… 어떠냐, 검 미치광이야? 오랜만에 젊은 육체로 돌아간 기분은?”
그제야 칙칙한 낯빛을 하고 있던 소녀의 입이 열렸다.
“……이런 씨발.”
난생 처음 보는 이 사랑스러운 소녀의 정체.
그건 바로 젊은 여자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검공’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대마녀의 수작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