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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27)화 (527/649)

Chapter 527 - 7. 질투는 나의 힘(27)

사연 없는 무덤은 없다고 했던가.

누구나 핑계거리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어처구니 없는 짓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듯한 이유는 늘 있다.

멀쑥한 미중년이 느닷없이 사랑스러운 소녀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내막에도 사정은 존재했다. 그리고 대마녀는 이를 ‘합리적인 선택’이라 표현하기를 즐겼다.

“어쩔 수 없다. 제국의 검공이 함께 다니면 온 아카데미의 이목이 집중될 텐데, 잠행을 하는 의미가 있겠느냐?”

“아니, 이미 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이목을 끌 텐데…….”

“오호, 꼬마야. 너도 여자가 되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 한 마디에, 나는 곧장 입을 다물고 최대한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전 학생이라 어차피 어딜 돌아다녀도 이상하지 않겠네요.”

“그 말대로다. 또, 너는 보이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지만 검공은 보이지 않아도 그러려니 하는 사람이지. 언제나 기밀 임무를 수행 중이니까.”

일견 듣기에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제3자의 생각에 불과했다. 느닷없이 소녀의 몸뚱아리에 갇힌 사람이 나처럼 낙관적인 감상을 품을 가능성은 적었다.

이윽고 터져 나온 고함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아니, 왜 하필 계집애여야 합니까?!”

지당한 지적이었다.

심지어 그 발화자가 일평생 사내로 살아오다 소녀가 된 인물이라면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대마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질 나쁜 장난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대마녀는 의외로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그야, 나는 수컷의 몸 따위 만지지 않으니까.”

“아니, 수백 년을 살았는데 남자 몸 한 번을 못 봤다고?!”

“그래, 만지기는커녕 본 적도 없지… 내가 왜 그래야 하나? 그래서 만들 수 있는 의체도 암컷뿐이야.”

소녀가 된 검공은 무언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막상 대마녀가 그렇다니 또 마땅한 반론은 내놓지 못했다. 그저 주먹을 그러쥔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검공이 유치한 모습을 보이면 헛웃음이 나왔는데, 어여쁜 소녀의 몸이 되자마자 그러한 감상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단지 연령대에 걸맞은 여인 하나가 내 앞에 서 있을 뿐.

대마녀는 분을 감추지 못하는 검공에게 결정타를 날리기까지 했다.

“이상하군, 이미 협의를 끝마친 사안 아니었나? 혹시 누가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더냐?”

“크윽……!”

정작 칼을 들고 위협한 쪽은 검공이었기에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럼에도 검공은 억울함을 지우지 못해는지 다시금 목청을 높였다.

“계집애로 만든다는 소리는 없었잖소!”

“물어봤으면 설명해 주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야. 하지만 내가 어찌 마스터나 되는 인물을 멋대로 의체에 가둬 둘 수 있겠나?”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아무리 대마녀라 하더라도, 검공은 마스터 중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강자였다. 멋대로 의체에 가둬 둘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해, 검공도 일단 납득은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당장 의체를 벗어던지지 않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제국의 검공쯤 되는 위인이 약속을 무르지는 않겠지? 기대하고 있으마, 의체는 최대한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다시 만들기 꽤 귀찮거든.”

“크으으……!”

주먹을 부들부들 떨던 검공은 그제야 가까스로 호흡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심호흡을 몇 번 하던 소녀의 떨떠름한 눈빛이 슬쩍 나를 향했다.

“……설마, 날 이 꼴로 만들고도 제국을 배신하지는 않겠지?”

“그게 목적이었습니까…….”

결국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어쩐지 순순히 이 상황을 받아들인다 싶더니, 내 부채 의식을 자극하고 싶었던 듯했다.

그렇게까지 날 뺏기기 싫을까.

그래도 집착을 한다면 노인보다는 어여쁜 소녀가 낫지 않겠냐고,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기로 했다.

이 결단이 무슨 파란을 몰고 올지도 모른 채로.

다만 떠나기 전, 나를 붙잡는 목소리가 하나 있긴 했다.

“……착각하지 마라.”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내뱉으면서 여인은 말했다.

“난 아직 널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언젠가 내 비전을 훔쳐 간 사연도 털어놓아야 할게다.”

그 가라앉은 시선을 마주하며, 나는 일순 떠올린 의문을 내뱉을까 망설였다.

고민은 짧았다.

내 입에서 짤막한 물음이 흘러 나왔다.

“왜 그렇게까지 부정하십니까?”

주어조차 없는 질문.

나조차도 무얼 묻고 싶은지 분명하지 않은 의문이었다. 그럼에도 대마녀는 한동안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참 뒤에야, 가까스로 짜낸 목소리가 고막을 간질였을 뿐.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으니까.”

힐끗 앞장 서 걷고 있는 검공의 뒷모습을 바라본 대마녀는 담담한 고백을 털어놓았다.

“우리는 모두 운명의 죄수거든, 꼬마야.”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한참 뒤에도 그럴 테지.

마지막 작별 인사를 끝마친 내 걸음걸이가 검공의 뒤를 쫓았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유독 피로해 보이던 대마녀의 눈빛이 걸렸다.

내가 엿보았던 미래에는, 그렇게까지 암울해 보이지는 않았어서.

어느 사내를 닮은 눈이었다.

**

“시선이 불볕처럼 뜨겁구나… 한창 때의 나도 이만한 인기를 누려 본 적이 없거늘.”

나와 함께 교정을 거닐며 던진 말이었다.

암청빛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소녀는 얼핏 보기에도 고귀한 태생으로 보였다. 윤기 있는 머릿결부터 보드라운 피부까지, 어딜 보더라도 고생하며 자란 외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호쾌한 걸음걸이와 시큰둥한 태도는 어딘가 남성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피부가 저릿거릴 정도의 살기.

흡혈귀의 술식에 의해 이성이 마비된 이들조차 함부로 접근하지 못할 만했다. 하품을 내쉬며 두 손으로 머리 뒤를 받치고 있는 이 소녀는, 사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수준의 강자였으니까.

제국의 검공.

단 셋밖에 없는 마스터가 이런 꼴을 하고 있으리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그저 안달이 난 시선으로 나와 소녀를 노려보는 수밖에.

덕분에 한결 편해지기는 했다. 과연 대마녀가 협조를 구할 만하다는 뇌리를 스쳤다.

한동안 멍하니 소녀의 외모를 감상하던 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그래서, 어디를 가고 있는 겁니까?”

그러자 의욕 없는 푸른 눈동자가 슬쩍 나를 향했다.

아무리 그래도 단 몇 분만에 소녀의 몸뚱어리에 갇힌 마당이었다. 천하의 검공이 넋이 나갈 만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더욱 어조를 조심하며 물었다.

“앞장 서 걷고 계시잖습니까. 목적지가 따로 있는 것 아닙니까?”

“내 방.”

소녀는 그러면서 제 허리춤에 매달린 새하얀 검집을 톡톡 두드렸다.

나는 그제야 아아, 하고 탄성을 터트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금빛 용이 새겨진 순백의 검집.

검공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무구였다. 아직까지는 소녀의 검집까지 주목하는 이들이 없었지만, 이후에도 저 검을 들고 다닌다면 여러 문제가 발생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여분으로 준비해 둔 검을 가지러 가는 것일 테지.

내가 그렇게 별 말 없이 검공의 의견을 따라가려고 마음 먹었을 때였다.

“영광으로 알아라… 내 방까지 온 녀석은 몇 없으니까.”

그 한 마디에, 주위에서 쏘아지던 시선의 온도가 달라졌다.

“성녀님과 사귀던 게 아니란 말이야?”

“라이넬라 선배도 아닌 모양이네. 여자는 얼마든지 있나 보지?”

“하지만, 처음 보는 애인데…….”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질수록 내 이마에 맺힌 땀방울도 커져만 갔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이었다.

상대가 제국의 검공이라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생판 모르는 소녀의 외양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마침 아카데미는 흡혈귀의 술식으로 나를 향한 감정이 증폭된 상태.

이 소문이 어떻게 퍼져 나갈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순식간에 판단을 끝마친 나는 조기진화를 시도했다.

“아니,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말씀을……!”

“그럼 나 혼자 가란 말이냐? 여기까지 와서?”

하지만 내가 미처 계산하지 못한 변수가 하나 있었다.

바로 검공의 기분이었다.

느닷없이 소녀가 된 검공의 심기는 무척이나 불편해 보였다. 사소한 지적에도 짜증을 팍팍 낼 정도면 알 만했다.

여자가 되어서 기분 나쁜 사람한테, 여자니까 행실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꺼낸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이러한 내 마음도 모르고, 검공은 자꾸만 투덜거렸다.

“흥, 책임감이 없구나. 나를 이 꼴로 만들어 놨는데, 이제 와서 동행은 필요 없다? 넌 나를 뭐라고 생각……!”

“아, 알겠습니다! 가죠!”

결국 나는 눈물을 삼키고 소녀의 맞장구를 쳐 주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 갑시다… 방이든 뭐든!”

“마땅히 그래야지.”

그제야 소녀는 기분이 풀어졌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를 본 행인들이 또 다시 수군거리는 소음을 일으켰으나, 검공은 태생부터가 황족이었다.

그깟 인간들이 무어라 떠들듯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결국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털레털레 검공의 뒤를 따라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검공의 방을 향하는 도중에는 별다른 제지가 없었다.

이를 두고 검공은 퉁명스레 설명을 덧붙였다.

“네 출입 허가는 진작에 낸 지 오래다. 언제 긴급한 보고를 올리러 올지 모르니까.”

“어르신의 신분은 확인하지 않네요?”

“제국 첩보부의 신원을 누가 확인하냐? 상대가 고위 간부라면, 목숨을 바쳐야 할 텐데.”

당연하다는 듯 이어진 문답이었지만, 제국 첩보부의 어둠을 잘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했다.

고위 간부의 신원을 아는 것만으로도 죽어야 한다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그리고 신원 확인의 의미가 없기도 하지.”

은근한 자부심을 드러내면서, 소녀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누가 감히 날 해하겠느냐? 만일 그 정도의 상대라면, 애초에 저 아이들에게도 역부족이겠지.”

오만한 말이었다.

그리고 한 치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은 진실이기도 했다.

과연, 소녀가 되었어도 마스터는 마스터였다.

그 말투와 몸짓에서 묻어나오는 여유와 자긍심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차라리 이러는 편이 내가 상대하기도 편했다.

물론 안일한 생각에 불과했다.

검공의 방에 도착한 나는 한참 동안이나 검공의 검 자랑을 들어야 했다. 그의 방에는 무려 수십 자루의 명검이 자리하고 있었고, 처음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구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랑이 길어도 너무 길었다.

그렇게 미친 척이라도 하고 두 귀를 틀어막을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폐, 폐하… 아무리 그래도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인물도 함께 있는데!”

“괜찮네, 이안 경이 있지 않나? 그래도 제국이 많은 빚을 졌는데, 온 김에 차나 한 잔 하면 좋겠지.”

나와 소녀의 몸이 삽시간에 굳어 버렸다.

“아니, 왜 하필 이 시간에 폐하께서……?”

“……땡땡이 치려는 거야.”

넋을 놓고 털어놓은 진실이었다.

검공은 당황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조카 녀석, 원래 일하다 지치면 차 한 잔 한다는 핑계로 자주 일정을 빼먹거든… 마침 네 핑계를 댈 수 있겠다 싶어 찾아온 거지!”

“그, 그럼 어떡하죠? 일단 그 검부터……!”

그때였다.

소리조차 없이 문이 열리고, 이윽고 노인 하나가 방 안에 들어섰다.

동그랗게 뜨인 두 쌍의 눈동자가 얼어붙은 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던 황제는, 이내 내 옆에 선 소녀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이안 페르쿠스, 오랜만일세… 그리고 그 옆은……?”

이윽고 황제의 시선이 소녀가 품에 안은 검에 멎었다.

제국 최강의 상징, 인정 받은 주인이 아니라면 차마 손을 댈 수조차 없다는 신검.

그것이 처음 보는 소녀의 품에 안겨 있었다.

황제는 일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픽, 하고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을 정도였다.

“하하하! 요즘 무리를 좀 해서 그런가, 눈이 침침해서 헛것이 보이는 듯한데…….”

하지만 아무리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현실이 달라질 리는 없었다.

눈을 감았다, 고개를 돌렸다, 그러기를 한참.

소녀의 얼굴이 시시각각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더는 수치를 참을 수 없었던 검공은, 결국 제 정체를 실토하고 말았다.

“조, 조카야…….”

그 한 마디를 들은 황제의 표정은, 그래.

차라리 한 폭의 예술 작품에 가까웠다.

이 세상의 모든 경악과 공포를 뒤섞어 놓은 인물화 말이다.

작품명은 '절규'.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방 안에 기나긴 꼬리를 남기며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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