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28 - 7. 질투는 나의 힘(28)
비명을 내지른 황제는 이미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동공이 이를 방증하고 있었다. 만일 검공이 먼저 뛰쳐나가지 않았다면, 대륙 권력의 정점이 마룻바닥에 엎어지는 대참사가 발생했으리라.
과연 검의 끝을 보았다는 무인다운 순발력이었다. 일순 나조차도 신형을 놓쳤을 정도였으니까.
유일한 오점이 하나 있다면, 당장 황제가 쓰러질 뻔한 원인을 제공한 이도 검공이라는 사실뿐.
소녀의 입에서 다급한 어조가 흘러 나왔다.
“폐하,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래도 황실의 일원이라고, 공무 중에는 공대를 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작 황제는 그 변화를 깨달을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숙부께서, 우리 제국 황실의 기둥이 그럴 리가 없어… 설마 그렇게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되고 싶은 욕망을 숨기고 계셨다니……!”
“……조카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으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진원지는 당연히 검공이었다. 낯빛에는 아직 웃음이 걸려 있었지만, 이를 악무는 폼이 범상치 않았다.
폭발 직전이다.
이를 직감한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괜히 황족 간의 다툼에 끼고 싶지는 않았다.
황제를 보좌하던 젊은 여인 또한 나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마음인 듯했다. 진작 자리를 피하려다 나와 눈이 마주쳐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예감은 곧 현실이 되었다.
“심지어 이안 경과 단 둘이 방에… 아아, 시엔… 못난 아비라 미안……!”
“글쎄, 아니라니까!”
귀까지 새빨개져서 내지른 일갈.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그 여파에 휩쓸린 소형 가구들이 박살이 날 지경이었다. 이처럼 난리를 몇 번 치르고 난 뒤에야 나와 검공은 황제의 맞은편에 앉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대마녀께서 숙부를 소녀로 만드셨다는 소리군요?”
“그래, 설마 내가 자진해서 이 꼴이 됐겠냐? 중부의 이상 고온과도 관련된 문제라니 어쩔 수 없이 들어준 거지… 쯧, 넌 도대체 이 숙부를 뭐라 생각하는 거냐.”
황제를 납득시킬 때까지는 몇 분이나 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고도 황제는 아직 의심의 시선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평정을 온전히 되찾지도 못했는지, 찻잔을 든 손이 미세한 떨림을 보였다.
그리고 황제는 숙부의 눈치를 보겠다고 제 의문을 숨기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그는 명실상부 대륙의 정점이 아닌가.
“정말입니까?”
“그렇다니까! 애초에, 어리고 예쁜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내놈이 그리 많을 성 싶으냐?!”
흐음, 하고 황제는 짙은 침음을 삼켰다.
내심 검공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 판단한 듯했다. 그렇다고 또 미심쩍은 기색을 완전히 지운 것은 아니었지만.
“숙부께도 은밀한 취향 하나쯤은 있을 테니까요.”
“……진심이냐?”
“한창 대륙을 떠돌던 시절에도 염문설은 없어, 매일 밤 검만 바라보고 있으니 어찌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숙부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일진대…….”
이제는 검공 쪽이 할 말이 없어질 차례였다.
검공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애써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살짝 홍조를 띤 얼굴이 무안한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나마 변명거리는 있는 모양이었다.
“황족의 씨를 함부로 뿌리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아무리 그래도… 후우, 됐습니다. 하여튼 잘 됐군요.”
황제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머리를 돌렸다.
어차피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사실 잘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소녀가 된 삼촌을 대신 나를 대화 상대로 낙점했다.
“이안 페르쿠스, 그대의 고생이 많겠군. 또 다시 빚을 지게 되어 미안하네.”
“아, 아닙니다! 모두가 고통 받고 있는데 어찌 채무 관계가 있겠습니까.”
바짝 긴장해서 아무렇게나 내뱉은 소리였다.
그러나 황제는 의외로 내 말이 마음에 든 듯했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노인의 손이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실로 기사의 귀감이 될 만한 발언일세. 그러나 내가 감사를 표하는 부분은 다르네.”
“……네?”
나로서는 고개를 갸웃할 만한 고백이었다.
아카데미를 포함한 제국 중부는 유례없는 이상고온에 시달리고 있다. 한창 수확을 준비 중인 농가의 피해가 크다는 소식도 들은 참이었다.
더불어 ‘흡혈귀’와 그 혈족은 존재 자체가 인류의 적이라는 마인 집단이 아닌가.
당연히 방기하고 있을 문제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내 말은 겸양이 아닌 진심이었단 소리였다.
이를 모를 황제가 아닐 텐데.
황제는 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예전에 말하지 않았나? 내 딸, 시엔을 대마녀의 제자로 만들어 달라고.”
“아, 아아! 그 말씀이시군요. 그야, 황실의 비원과 관련된 이야기라 하셨으니…….”
“용혈(龍血)에 들어본 적이 있나?”
연달아 던져진 물음에 나는 눈을 감은 채 고민에 잠겼다.
‘용혈’이라.
들어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용혈 문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또한 용혈과 관련이 깊지. 자네, 예전에 ‘용의 정혈’을 받은 적이 있지?”
내 고개가 지체 없이 끄덕여졌다.
제국 황실의 비전 영약, ‘용의 정혈’.
쉽사리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만큼 효과가 좋긴 했지만, 이를 내가 입수할 경로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바로 ‘수렵제’의 우승.
나를 비롯해, 당시 수렵제에 참가했던 동료 전원이 각 1병씩을 수여받은 적이 있었다. 정작 나는 술을 먹고 엎어진 틈에 복용을 끝마친 뒤였지만 말이다.
황제는 이에 대한 비화를 털어 놓았다.
“그 재료 중 하나가 순도 높은 ‘용혈’일세. 진짜배기 황족의 피를 오랜 시간 정제한 물건이지… 그리고 이를 재가공한 용의 정혈이 있어야만, 용혈 문자를 부여할 수 있네.”
어쩐지, 써보지도 않은 약이 사라져 있다 싶었다.
아마도 ‘그’가 용혈 문자를 부여하기 위해 사용했겠지.
어차피 내가 썼어도 그보다 합리적인 용처는 찾지 못했을 터였다. 도리어 감사해야 할 일이라, 나는 굳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읊지는 않았다.
대신 조심스레 황제의 말에 맞장구를 쳤을 뿐.
“그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당대의 황제뿐이지. 용혈 문자가 괜히 제국 황제의 대리인을 상징하는 게 아니야… ‘용혈 문자’를 부여 받는 순간, 그 생사여탈권이 부여자한테 주어지거든.”
난데없이 튀어 나온 황실의 비밀이었다.
나는 일순 그 정보의 무게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얼빠진 시선을 검공에게로 돌렸다.
품위 있게 차를 홀짝이던 검공의 확인사살이 이어졌다.
“……그 말대로다. 용혈 문자는 일종의 체질을 바꾸는 개념에 가깝거든. 피를 새로 정제한다고 할까? 그 과정에서 부여자에게 많은 권한이 넘어가게 되지. 생사여탈권은 물론이고, 현 위치까지도 알 수 있으니까.”
“아니, 그럼…….”
“황제가 믿고 맡길 수밖에 없는 구조지. 단, 네놈은 예외였던 거야.”
한동안 머뭇거리던 나는 결국 침묵을 택하기로 했다.
나로서는 이러한 정보를 왜 내게 건네주는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 의문을 해소해 준 이는 황제였다.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 사실이었을 테지… 어떤 식으로든, 용혈 문자를 부여한 이와 접점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었나?”
찻잔을 탁, 하고 내려놓으면서 황제의 시선이 지긋이 나를 향했다.
잠깐 넋을 놓고 말았지만,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 사이에 모든 계산을 끝마쳐 둔 것이다.
아무리 귀중한 정보라도 상대가 입수한 뒤라면 가치가 없다. 오히려 이러한 기밀을 공유함으로써 은근한 압박을 줄 수 있었다.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비밀이란, 일종의 족쇄로 작용하기도 하니까.
다만 황제는 굳이 나를 옭아맬 생각까지는 없어 보였다.
“……하여튼, ‘용혈’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그렇네. 황족은 누구나 이 ‘용혈’을 지니고 있지. 하지만 때때로 이 ‘용혈’을 유독 진하게 타고난 아이들이 태어나네.”
“시엔 전하.”
반사적으로 떠오른 이름이 여과 없이 내 성대를 두드리며 뱉어졌다.
“시엔 전하가 그렇습니까?”
“그래. 말하자면, 피 자체가 우리 같은 일반인과는 달라… 그리고 너무 과한 재능은 저주가 되기도 하지.”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은 황제는 이윽고 제 상반신을 등받이에 기댔다.
얼핏 보기에도 피로해 보이는 낯빛이었다.
“기나긴 마도의 역사를 통틀어도, 그만한 재능을 가진 자는 지극히 드물었어. 나는 내 딸이 자신의 힘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따지고 보면, 내가 물려 준 피니까.”
“그래서 대마녀께서 스승이 되어 주시길 바라는 거군요.”
“맞네. 황실의 비원이니, 뭐니… 부질 없는 소리야. 사실 내 본심은 그렇네.”
그제야 나는 황제의 미안하다는 말을 이해했다.
“못난 아비로서의 부탁일세.”
슬픈 미소를 지으며, 황제는 그렇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건넸다.
“우리 딸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어린 시절부터 상처가 많은 아이야… 대마녀라면, 그 힘을 다룰 방도를 알고 계실 걸세.”
대마녀를 도우면 당연히 내게도 발언권이 생기게 된다.
이미 대마녀가 공언한 바 있듯, ‘제자 선발’ 과정에 입김을 불어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시엔을 밀어 달라는 뜻이겠지.
잠시 망설이던 나는, 각오를 다지며 말했다.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다만, 당장 흡혈귀의 혈족이 얼마나 되는지도 정보가 없는지라 확언은…….”
“아, 그거.”
마침 생각났다는 듯, 황제는 제 품에서 몇 장의 서류를 꺼내 놓았다.
명단이었다. 그 옆에는 아카데미 내의 특정 건물까지 쓰여져 있었다.
내가 묘한 표정을 짓자, 노인은 장난스레 한 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보고를 듣고 싹 다 잡아놨네. 마음대로 취조하도록.”
내가 할 일이 순식간에 줄어드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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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장 걸음을 옮기면서도, 얼떨떨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이렇게 쉬워도 됩니까?”
“그럼 뭐냐?”
내 본질적인 의문에 답하는 검공의 태도는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하품을 내쉬는 폼이 꽤 여유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깟 정보 수집과 요인 확보가 어렵기라도 해야 한단 소리냐? 황제가 아카데미에 있고, 제국 첩보부가 담벼락 그늘 속에 숨어 있는데?”
“하지만, 암흑교단이 그렇게 쉽사리 꼬리를 잡힐 리가…….”
“그러니까 네가 잘 해야지.”
그러면서 검공은 씨익, 하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야성적이면서도 매력적인 미소였다.
“심문은 우리의 몫이 아니야. 첩보부는 지금 지난 며칠 동안 실종된 전원의 행적을 조사 중이다. 그러다 보면 정보는 나오겠지만, 결정적인 정보는 직접 캐내야겠지.”
“심문도 첩보부가 더 잘하지 않겠습니까?”
“진짜배기 흡혈귀의 혈족을 분간해 내기가 힘들어. 평민들까지는 어찌저찌 해보겠는데, 이렇게 많은 귀족들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다.”
하기야, 제국 첩보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핀들스턴 가문도 귀족 가문이었다.
마땅한 혐의도 없이 수십에서 수백이나 되는 귀족을 탄압하기는 힘들었다.
그럼에도 검공은 딱히 걱정이 되는 기색은 아니었다.
“하지만, 네가 예전에 보고한 적 있지? 흡혈귀들이 유독 네게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고… 또, 흡혈귀의 술식으로 인해 네게도 변화가 생긴 참이다. 기대를 걸어 볼 만은 해.”
“그래도 안 되면요?”
“그럼, 손 대야지. 별 수 있나?”
무엇에, 라는 멍청한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수백에 달하는 학생들은 안위가 내 손에 달린 셈이었다.
그렇게 내가 한창 고심에 잠겨 있을 때였다.
“앗, 이안 선배!”
소녀 하나의 목소리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시선을 살짝 뒤로 돌리니, 그곳에서는 밤하늘을 닮은 암청빛의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특유의 연회색 눈동자까지.
제5황녀 시엔.
오랜만에 마주쳤지만, 언제 보아도 반가운 후배였다. 이윽고 내가 반색하며 손을 흔들려던 찰나.
내 뇌리를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가만, ‘심문’이라?
그렇게 내가 잠시 멈칫한 사이, 시엔은 생긋 미소를 머금으며 내 앞에서 공손히 상반신을 굽혔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요즘 이안 선배의 명성으로 귀가 따갑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대경한 쪽은 내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검공이었다.
눈을 부릅뜬 소녀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는 광경은 꽤 볼 만했다.
일단 외모가 좋았으니까.
“아니, 시엔! 황족이 어찌 함부로 허리를 굽힌단……!”
“……그래서, 이안 선배.”
그러나 검공의 분노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내뱉는 황녀의 목소리가, 유독 차갑고 날카로웠던 탓이었다.
조카손녀에게 난생 처음 받아보는 대접일 테지.
검공은 그만 충격을 받고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쩌적, 하는 소리가 들려와야 할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그러든 말든, 시엔은 연회색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물었다.
“이 계집애는 누구예요?”
그 눈빛은 명백히 적의로 물들어 있어서.
검공은 울상을 짓고 말았다.
가을은 소녀에게 가혹한 계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