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29 - 7. 질투는 나의 힘(29)
다툼을 좋아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전쟁을 업으로 삼으며, 칼날에 피 묻히기를 우습게 여기는 용병들조차 마찬가지였다. 칼싸움, 맨손 박투, 심지어는 사소한 말다툼마저 피로감을 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 않은가.
당연히 나 또한 그 예외는 되지 못했다.
몇 번이나 사선을 넘으며, 수많은 강적을 토벌해 온 나라도 싸움은 싫었다. 도리어 말하자면 싸움이 싫기에 이처럼 고생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시금 평화를 되찾고 싶었으니까.
누가 뭐래도 나는 ‘평화주의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즘들어 내 최대의 고민거리는 따로 있었다.
어떻게 하면 여인들의 다툼을 멈추게 할 수 있나.
아니, 가능은 한 것인가?
믿고 있던 델핀 선배조차 은근히 세리아를 괴롭히고 있는 마당이었다. 성녀나 엘시 선배에 이르러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처럼 여러모로 고심을 거듭하던 나였으나, 눈앞의 광경을 보고 나서는 헛웃음을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봐도 초면인데…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계집일까요? 왜 이안 경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있죠?”
“아, 아니… 오해란다, 시엔. 난 말이지……!”
“혹시 이안 경 좋아해요? 주제 넘어라… 그리고 언제 봤다고 반말이에요? 저 알아요? 자신 있어요?”
검공은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시엔의 공세를 견디지 못했다.
차라리 검이라면 몰라, 혀로 하는 싸움에서 시엔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옆에서 볼 때는 병아리가 지렁이를 쪼아대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일단 짐짓 볼을 부풀린 채 허리춤에 두 손을 얹은 시엔부터가 그랬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픽, 하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당하고 있는 쪽은 감상이 다른 듯했다.
내 웃음소리에, 검공은 분기탱천 해서 외쳤다.
“우, 웃어? 이안 페르쿠스, 네 이놈! 당장 시엔을 만류하지 않고……!”
“그리고 뭐에요, 그 이상한 말투? 하, 무슨 할아버지라도 되시나 봐요?”
어느덧 황녀의 말투는 조롱조로 바뀌어 있었다. 설마 아무렇게나 내뱉은 추측이 진실의 일면에 닿고 있다는 상상은 하지 못하겠지.
되려 시엔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두 손을 양옆으로 펼치고 어깨를 으쓱이기까지 했다. 실로 황당무계하다는 낯빛이었다.
“흥, 설정은 잘 잡았네요.”
“아, 아니.. 설정 같은 게 아닌데…….”
“그럼 뭔가요? 할아버지 말투를 쓰는 소녀라니… 정신병 아니면 연기밖에 답이 없잖아요? 혹시 믿을 만한 사제를 소개시켜 드릴까요?”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사실 검공은 정신병에 가까운 상태라 할 수 있었다. 정신과 육체가 일치하지 않는 상태를 그렇게 정의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해결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정신에 알맞은 육체를 되찾던가, 정신이 육체에 적응하든가.
물론 둘 중 어느 쪽도 당장은 택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지만.
내가 그렇게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황녀는 이제 아르릉거리며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고, 검공은 더욱 당황해서 내게 애절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제발 도와 달라는 뜻이었다.
“흥, 안타깝지만 이미 늦었어요! 이안 경의 곁은 애완동물 자리까지 이미 가득 찼다고요! 그러니까, 이상한 설정 따위는 집어치우고……!”
“너무 그러지 마시죠, 전하.”
내 담백한 만류에 황녀는 비로소 이성을 되찾았다.
앗, 하고 짤막한 탄식과 함께 시엔은 바로 안절부절 하지 못하며 내게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이안 경? 오해에요… 설마 제가 누굴 괴롭히려 들겠어요? 저, 저는 이안 경한테 지은 죄를 반성하기도 바쁜데… 오, 오해! 오해에요……!”
이대로 두면 울먹이다 무릎이라도 꿇을 태세였다.
나는 그보다 한 발 앞서 황녀를 진정시켰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다소의 오해가 있어 보여서… 이 아이, 사실 병을 앓고 있거든요.”
내 말을 들은 두 소녀의 반응이 상반됐다.
황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고, 검공은 곧장 인상을 와락 구겼으니까.
“……뭐라?”
그 불쾌감 넘치는 목소리가 소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눈빛이 다소 부담스러웠다. 내가 적당한 해명을 내놓지 않으면 아작을 내 버리겠다는 의지가 선연히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 한 방울을 느끼며, 나지막이 설명을 덧붙였다.
“어린 시절 산속에서 조부와 단 둘이 수행을 했다더군요. 얼마 전에 아카데미의 특례 입학이 결정됐는데, 조부가 돌아가시면서 정신이 조금… 네.”
급조한 사연이었으나, 최소한의 개연성은 갖추고 있어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상대가 황녀 시엔이기도 했고.
나를 의심한다는 발상 자체를 하지 못하는 소녀는 깜짝 놀라 두 손을 모았다.
그 연회색 눈동자에 짙은 연민이 스치고 있었다.
“그렇군요… 불쌍하게도.”
하지만 또 다른 소녀는 도저히 내 핑계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일순 어지럽다는 듯 이마를 짚던 검공은 이내 차근차근 목소리를 높여갔다.
“아니, 아니, 아니… 이놈이 무슨 헛소리를……!”
“황녀 전하께도 조부가 한 분 계시죠?”
그러나 검공은 이내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시엔이 태어나기도 전, 선제(先帝)는 병마와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그러니 시엔이 ‘할아버지’라 칭할 만한 인물은 오직 하나뿐.
바로 ‘검공’이었다.
시엔도 순박한 미소를 지으며 곧잘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아하, 큰할아버지 말씀이시죠? 그럼요, 황실의 존경 받는 어르신이세요.”
“전하께서도 만나 뵌 적이 있으십니까?”
“당연하죠! 장난기가 좀 있으시지만, 그래도 자상하고 근엄한 분이세요. 과연 황실의 큰 어른이라는 느낌이죠.”
바라지도 않았던 칭찬에 검공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발갛게 달아오른 볼과 묘하게 힘이 들어간 어깨가 그의 본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못내 뿌듯하긴 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황실에 대한 애정이 깊어 오랜 방랑 생활을 청산한 이가 아니던가.
조카 손녀의 칭찬이 기분 좋지 않을 리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시점에서 결정타를 날리기로 했다.
“그 검공 어르신께서 소녀가 되셨다면?”
“……아?”
상냥한 어조로 내 말을 받아 주던 시엔의 사고가 일시에 정지했다.
그렇게 얼어붙은 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시엔은 푸흡, 하고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푸흐, 아하하하! 죄, 죄송… 풉큭… 하, 하지만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역시 그렇죠?”
“그럼요! 아무리 이안 경이라도, 황실의 큰어른을 향한 불경한 말씀은 삼가 주셔야 해요? 남이 들을까 두려워서… 에헤헤.”
시엔의 해맑은 단언이 이어질수록 검공의 낯빛은 시시각각 굳어 갔다.
종래에 이르러 거무죽죽한 얼굴을 하고 있던 검공의 앞으로, 시엔이 조심스레 다가갔다. 이윽고 연민에 가득 찬 눈빛과 함께 검공의 두 어깨를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시엔의 손이었다.
그녀는 따스하면서도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슬픈 사연이 있었구나… 너무 걱정하지 마, 갑자기 환경이 달라져서 놀랐지? 앞으로는 내가 적응을 도와줄 테니까… 참, 몇 살이니?”
“저, 그, 으…….”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검공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황녀 전하보다 한 살 어립니다.”
“어쩐지! 특례 입학은 대개 조기 입학이니까… 자, 그럼 ‘언니’라고 불러보렴?”
검공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순 나를 향한 시선에 옅은 살의가 감지되었으나, 어쩌겠는가.
연하로 설정하는 편이 더 설득력 있는 걸.
마지막이라는 듯, 소녀는 하찮은 반항을 시도했다.
“나, 으, 그… 나는, 이 말투가 편해서…….”
“……’언니’.”
그러나 미소를 짓고 있는 시엔의 목소리가 유독 서늘해 보여서.
결국 검공은 눈물을 찔끔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네, 언니…….”
이후 새로운 동생이 생겼다는 사실에 들뜬 황녀의 앞에서, 나는 검공과 속닥이며 대화를 나누었다.
“좋으시겠습니다. 예쁜 언니가 생겨서……”
“흐즈 므르?”
그러나 이를 악문 검공의 분노가 워낙 심상치 않았다. 꾸욱, 하고 내 옆구리를 소심하게 꼬집는 힘에 살갗이 살짝 찢겨나갔을 정도였다.
결국 나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겨야 했다.
옆구리가 쓰라렸다. 성녀만 있다면 금세 고칠 생채기였는데.
그렇게 잡념에 빠져 걷다 보니, 어느새 길은 어느 건물로 이어지고 있었다.
흡혈귀의 혈족으로 의심되는 이들을 가둬 둔 건물들.
나는 그중 하나에 입성해서, 황녀와 함께 심문을 진행할 요량이었다.
황녀가 지닌 ‘용의 눈’은 심문 때 무척이나 유용했으니까.
부디 큰 어려움 없이 진실이 밝혀지기를.
수백에 달하는 학생들의 제국 첩보부의 무자비한 심문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그렇게 기도했다.
**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주 자그마한 계기였다.
내가 실종자 중 하나를 심문하기 위해 밀실에 들어선 순간.
“냄새, 냄새가 나…….”
멍하니, 실종자는 그렇게 중얼기리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한 내 시선이 등 뒤에 서 있던 황녀를 향했다. 하지만 황녀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낯빛을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황녀의 얼떨떨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식욕, 성욕… 너무 색이 강해요. 그 외의 마음을 들여다 보기 힘들 정도로…….”
이윽고 흐으, 흐으, 하고 거슬릴 만큼 습기에 찬 숨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턱을 치켜든 채 천장의 조명을 응시하는 그 눈빛이 위험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손과 발에 구속구가 채워져 있음에도, 이따금씩 몸을 비틀며 발작하던 여인은 끝내 비명을 토해냈다.
“냄새, 냄새… 달콤한 냄새가, 미칠 것 같은 냄새가 난다고오오오오!”
그리고 우드득, 하고.
결박되어 있던 여인의 손과 발이 근육의 수축을 이겨내지 못하고 뒤틀리며 찢어져 나갔다. 살갗과 함께 찢어지는 근육을 망막에 새기는 경험은 딱히 유쾌하지 못했다.
손과 발을 잃은 육체가 땅 위로 엎어지더니,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뛰쳐 올랐다.
다름 아닌 내 허리춤을 향해서.
문제가 하나 있다면, 나도 얌전히 당하고만 있을 성미는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몇 초의 말미.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내 시야를 휩쓸고 지나간 은빛의 불꽃 뒤로, 무채색으로 물든 세계가 보였다.
모든 운동량이 빼앗긴 세상.
그곳을 누비는 것은 오직 칼날 하나뿐.
“크헤… 끄에에에에에에엑!”
손발에 이어 팔다리를 절단당한 몸뚱어리가 구슬프게 떨어져 내렸다. 이미 지난번에 흡혈귀의 혈족을 상대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여인의 팔다리는 잘 다져진 뒤였다.
겁 먹은 소녀의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검공은 만일을 위해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겠다고 했던가.
그때 내 고막을 후려치는 소음들이 있었다.
쿵, 쿵, 쿵!
크에에에엑!
키에에에에엑!
사방에서 들려오는 괴물의 비명 소리가 원하는 바는 명백했다.
나는 그저 헛웃음을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들이 단체로 실성을 했나…….”
온 건물의 흡혈귀가 나를 노리고 있었다.
그 원인은 짐작 가지도 않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이, 이안 경… 꺄아악?!"
나는 곧장 황녀를 옆구리에 끼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황녀는 의외로 순순히 내 품에 안기면서, 살짝 볼에 홍조를 띄우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좋은 일이긴 했다.
어차피 바깥에서는 검공이 대기하고 있었다. 흡혈귀의 마수가 우리에게 미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문제는 오직 하나.
이곳에 갇힌 이들은 흡혈귀의 혈족들뿐만이 아니었다.
무고한 실종자들도 있을 터.
그리고 괴물 중에는 죽여서는 안 되는 인물도 섞여 있었다.
루페시아 영애.
나는 온힘을 다해 땅을 박차고 쏘아졌다.
흡혈귀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괴물을 향해.
어떻게든 검공을 찾아내야 했다.
그가 우리를 제외한 모든 생명을 지워 버리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