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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30)화 (530/649)

Chapter 530 - 7. 질투는 나의 힘(30)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핏빛 물감이 자흔을 남긴다.

새하얗던 벽면 곳곳에 튀긴 핏물과 살점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불쾌한 피비린내가 코를 쿡쿡 쑤시며 내게 속삭였다.

이제 그만하라고.

나 또한 멈추고는 싶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끝도 없이 달려드는 괴물들은 눈이 한계까지 충혈되어 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숨소리에서 짙은 습기가 느껴졌다.

여인들이 하고 있을 꼴은 아니었다.

차라리 마수나 가까운 행동 양태였으니까.

“내, 냄새… 냄새애애애애액!”

그렇게 비명을 내지른 여인은, 눈이 뒤집어져 흰자위만 보일 지경이었다.

네발짐승처럼 기어 다니던 흡혈귀의 권속이 느닷없이 펄쩍 뛰어 올랐다. 고양잇과 맹수를 연상시킬 만큼 탄력 있는 도약이었으나, 하이 익스퍼트에 이른 무인을 제압하기엔 한참이나 모자랐다.

결과는 뻔했다.

팍, 하고 여인의 관자놀이를 강타하는 검 손잡이.

자루의 뭉툭한 끝은 둔기의 훌륭한 대안이 되어 주었다. 새하얀 치아가 하늘을 날며 얻어맞은 여인의 미래를 예언했다.

풀썩 쓰러진 권속의 몸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윽고 기절.

나는 그 꼴을 보며 혀를 쯧, 하고 찼다.

“그놈의 냄새는…….”

도대체 무슨 냄새가 난다고 온 건물의 흡혈귀들이 전부 난리가 났단 말인가.

다음부터는 샤워를 하루 세 번씩 해야 하나.

그렇게 기계적으로 달려드는 흡혈귀들을 으깨며 나아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 이안 경……!”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혔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황녀가 내 옆구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최대한 안정적인 승차감을 주기 위해 노력했는데.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얼굴이라, 나는 고개를 갸웃하는 수밖에 없었다.

황녀는 더듬더듬 말을 짜내고 있었다.

“그, 그… 자꾸 얼굴에 튀는데요, 핏물이랑 무언가 질척거리는 게……!”

“아, 골수 말씀이시군요.”

대답은 없었다. 대신 히끅, 하는 헛딸꾹질이 이어졌을 뿐.

전투 도중에 튀는 피와 골수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래도 황녀 또한 나와 함께 사선을 넘어 온 동료였으니, 이 정도로 비위가 상하지는 않으리라 판단했던 것이 실책이었다.

과연 귀하게 자란 소녀다웠다.

나는 배려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속죄의 의미로 검을 잠시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품속을 대충 뒤적여 꺼낸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기까지.

이윽고 철퍽이는 질감과 함께 황녀의 낯에 묻어 있던 피와 골수가 뒤섞여 번져 나갔다.

“으, 꺄, 꺄아아아아악! 그, 그만… 그만해 주세요!”

“조금만 더하면 될 텐데…….”

“제발 그만!”

결국 나는 울상을 지으며 비명을 내지르는 황녀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설마 황녀가 내 호의를 거부하다니.

비위가 약해도 너무 약했다. 앞으로도 함께 다닐 사이인데, 이러면 곤란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려던 찰나.

내 귓가를 징징 울리는 또 다른 소리가 하나 들려왔다.

“무, 뭐야… 그, 그만… 꺄아아아아악! 누가 살려 주세요!”

쯧, 하고 혀를 차며 나는 손도끼를 손에 쥐었다.

이후에는 늘 하던 대로.

파공성을 일으키며 날아간 손도끼는, 복도를 따라가다 막다른 지점에서 궤도를 틀어버렸다.

이윽고 둔탁한 소음이 저 멀리에서 울려 퍼졌다.

두개골이 깨져 나가는 소리였다.

도끼는 마치 눈이라도 달린 듯 날아갔던 궤도를 그대로 되짚어 내 손에 안착했다. 아직도 덜덜 떨면서 제 낯빛을 만질까 말까 고민하는 황녀를 향해, 나는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 ‘눈’으로 사람들의 위치도 파악이 가능합니까?”

“네, 네?”

하지만 황녀는 아직도 제정신을 되찾지 못한 채였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재차 설명을 덧붙였다.

“이 건물에는 흡혈귀의 혈족뿐만 아니라, 단순히 간밤에 소식이 끊겼단 이유로 갇혀 있는 여인들도 많습니다. 혹시 흡혈귀와 그렇지 않은 인간을 구분할 수 있나 해서요.”

“그, 그러기에는 흡혈귀들이 가진 감정의 농도가 너무 짙어요! 당장 지금도 시야가 어지러운데… 히익?!”

그때였다.

황녀의 몸이 신경을 찔린 활어처럼 펄떡였다. 감전이라도 당한 듯한 그 눈동자에서 흐릿한 두려움이 배어 나왔다.

시엔조차 이처럼 예민한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

당연히 내 기감에 그 원인이 감지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황녀보다 침착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내 입에서 기나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미 늦었군요.”

“이, 이안 경… 저, 저 밖에서… 무, 무언가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는데.

슬슬 어르신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조카 손녀까지 이 안에 갇혀 있는 꼴이었으니.

오히려 이만큼이나 기다려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나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황녀를 공주님 안기로 들며 말했다.

“빠져나갑니다.”

“네? 이안 경, 이곳은 5층… 꺄아아아아아!”

쾅, 하고.

내 발길질에 벽 한 쪽이 무너져 내리며 슬슬 노을이 지는 창공이 드러났다. 그리고 나는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려 해질녘의 비행을 개시했다.

중력의 인도는 언제나 완벽했다.

일직선, 나는 그대로 발을 지반에 처박으며 착지했다.

황녀는 이제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피에, 살점에, 골수로 얼룩진 하루에 압도적인 기파와 난데없는 추락까지 겪은 직후였다. 심지어 벽을 부술 때 파편이 튀었는지, 그 살갗에 옅은 생채기가 나기까지 한 참.

용의 핏줄로서 이만큼 고단한 하루를 보낸 적은 몇 없었겠지.

예전에 귀향제에서 당했던 짓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나는 시엔이 편히 기절할 수 있도록 조심스레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시선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끝에는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검 따위는 들고 있지 않았다. 도리어 팔짱을 낀 채 나를 올려다보는 그 자세에서는 어떠한 적의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 푸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내가 딛고 선 땅이 온통 칼날로 뒤덮이는 감각이 엄습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공기가 내 폐부를 찢지 않을지 두려워 식은땀이 절로 날 정도였다.

고작해야 이 자그마한 소녀 하나가.

세상을 오시하고 있었다.

못마땅한 낯빛을 하고 있던 검공이 물었다.

“이제 만족했느냐?”

나는 이 대답이 많은 것을 결정하리란 사실을 직감했다.

평소와 달리 다급히 입을 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직, 아직입니다…….”

“나올 만한 추물들은 전부 기어나온 듯하다만.”

“안에 무고한 학생들이 남아 있어요.”

흐음, 하고 소녀는 무심한 시선을 다시금 건물로 향했다.

실시간으로 비명과 괴성이 어우러지고 있는 장소였다. ‘아비규환’이라는 표현이 이보다 어울릴 수는 없었다.

안에 있던 제국 첩보부 요원들은 이미 대피를 끝마친 걸까.

이런저런 의문을 꾹꾹 눌러 담으면서, 나는 이 전투광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보기로 했다.

“또, 아직 심문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 괴물들과 차라도 마실 참이냐?”

“제 친구가 납치됐어요.”

애원이나 다름없는 부탁이었다.

나는 아직 셀린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당장 무슨 짓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를 내 소꿉친구를 찾을 가능성이 있다면, 무엇이든 붙잡고 싶은 것이 내 심정이었다.

“그리고 또, 저중에는 제 소중한 사람의 친구가 있을지도…….”

“저것들이 인간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 믿느냐.”

턱짓을 하며 던진 날카로운 반문.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잠시 침묵을 지켜야 했다.

되돌아 갈 수 있냐고?

솔직히 말해서 불가능에 가까웠다. 관련된 연구를 했다는 ‘엘시 선배’조차 부정적인 답을 내놓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랬다가는, 루페시아 영애가.

엠마가 슬퍼할 텐데.

그래서 나는 섣부른 확언을 남발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무슨 수로?”

“어떻게든…….”

“쯧쯧… 어리구나, 어려.”

쯧쯧, 하고 혀를 차면서 검공은 고개를 내저었다.

겉으로 볼 때는 철 없는 소녀가 오기를 부리는 것 같겠지만, 저 알맹이가 ‘검공’이라는 사실을 알면 이보다 긴장이 될 수가 없었다.

소싯적에는 성국의 성자와 붙어 산 하나를 날려 버렸다는 전설적인 무인.

하이 익스퍼트에 도달한 지금이라면 알 수 있었다. 그 풍문은 과장이나 비유 따위가 아니라고.

이 소녀의 탈을 쓴 노검수는,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이라도 산 하나를 지도에서 지워버릴 만한 괴물이었다.

“여태껏 그렇게 임기응변으로 버텨 왔던 거냐? 어떻게든 될 거라고, 결국은 길이 보일 거라고… 나 또한 그랬던 시절이 있었지.”

“그럼 한 번만 믿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다 가장 소중한 걸 잃고 나서야, 깨닫게 됐지.”

그렇게 말하는 검공의 목소리에는 묘한 쓸쓸함이 서려 있었다.

검공은 내게 재차 단언했다.

“나뿐만이 아니다. 성국의 성자도, 대수림의 대마녀도 마찬가지야. 아무것도 버리지 않으려는 자는, 결국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되지.”

예전에도 들은 적이 있는 말이었다.

미래에서 온 ‘나’로부터, 그리고 대마녀로부터도.

내 침묵을 틈타, 검공은 한숨을 내쉬며 서서히 손을 치켜들었다.

“……내 말대로 해라, 꼬맹아. 널 위해서 하는 조언이니까.”

그렇게 검공의 손이 사형을 선고하기 직전, 나는 불현듯 떠오른 말을 입에 담았다.

“도와 주신다고!”

헐떡이며 내뱉은 말에, 검공의 낯빛이 일그러졌다.

“도와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그러니까 얌전히 도와 주시죠.”

검공은 내 의기에 놀랐는지 살짝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제 일 아닙니까. 대마녀께서 먼저 부탁하신 쪽은, 바로 접니다.”

검공과 대마녀의 대화를 들으며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검공은 의외로 언변이 약했다.

더불어 강하게 밀어붙이면 그러려니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태생부터 고귀한 신분이라, 남의 일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성미를 지니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천성이 그런지도.

아무튼 나는 재차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제 말이 틀립니까?”

그러자 망설이며 입술을 달싹이던 소녀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떼잉…….”

됐다.

설득이 통했음을 직감한 내 낯빛이 삽시간에 밝아져 왔다. 아직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셀린의 행방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기회였다.

바로 그때였다.

“하여튼, 귀찮게 한다니까.”

호잇, 이라는 의성어가 어울릴 만큼 간단한 손짓.

고작해야 소녀의 손장난에 불과했지만, 그 행위가 불러온 여파는 너무나 무지막지했다.

빗금.

일순 세상을 가로지르는 실선이 생겨났다. 내가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건물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비스듬히 난 단면으로 미끄러져 내리는 석조 건축물을 보며, 나는 결국 무심코 떠오른 욕설을 참지 못했다.

“야, 이… 미친 영감탱이야!!!”

나는 곧장 내달려 검공의 멱살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는 그것만으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당신이 그러고도 제국의 검공이야?! 어떻게 제국의 신민들을 그렇게 무참히 도륙할 수가 있어!”

“아니, 잠깐… 그만 좀 흔들… 에잇, 이놈의 몸뚱어리는 왜 이리 작은 거야!”

검공은 이제 땅에 발이 닿지 않자 발버둥을 치며 짜증을 내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육체의 한계였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하품을 내쉬며 눈을 비비적대는 기척이 느껴졌다.

잠시 의식을 잃고 있었던 황녀였다.

“하아암, 이안 경… 설마, 그새 우리 큰할아버지께서 오셨……?”

그렇게 황녀는 색다른 광경을 마주해야 했다.

검공의 손짓으로 무너져 내리는 건물, 멱살을 잡고 흔들리는 소녀, 그리고 그녀를 두고 ‘검공’이라 호칭한 나.

일순 공터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무심코 엘시 선배를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개판이구나…….’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엘시 선배가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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