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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31)화 (531/649)

Chapter 531 - 7. 질투는 나의 힘(31)

침묵은 묵직했다.

비스듬한 단면을 타고 무너져 내리는 건물이 부정교합을 일으키고 있었다. 우르르 떨어져 내리는 석조 건물의 단말마가 지끈거릴 만큼 고막을 때려댔다.

그럼에도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는 상황.

검공의 멱살을 붙잡고 흔드는 나도, 내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검공도, 심지어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시엔도 마찬가지였다.

쿵, 하고 건물이 폭삭 주저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를 기점으로 시엔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허망한 미소와 함께 이마를 짚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후, 후후… 이안 경, 제가 아무래도 환청을 들은 것 같네요. 저 계집애가 제 큰할아버지라니…….”

다행스럽게도 황녀는 인지부조화를 겪고 있는 듯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제국의 검공’이라는 호칭이 담고 있는 무게는 상상 이상이었다. 제국 최강의 무인이자, 황실의 웃어른으로 무게감을 더해주는 인물이 아닌가.

그런데 느닷없이 이처럼 자그마한 소녀로 변하다니.

쉽사리 믿는 쪽이 더 이상했다. 오히려 황제처럼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목격하지 않은 이상은 말이다.

그렇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

뇌리를 송곳처럼 파고드는 판단에, 나는 곧장 공황 상태에 빠진 검공을 흔들었다. 검공의 고개가 까딱까딱 꺾이더니, 서서히 그 푸른 눈동자에 빛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이 틈을 놓칠 수는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황녀 전하, 착각하신 것 아닙니까? 전 검공을 부른 적이 없는데요.”

“그, 그렇고 말고! 시엔아, 이 할애비가… 끄에에엑.”

나는 검공을 다시 한 번 탈탈 흔듦으로써 주의를 환기했다.

치명적인 말실수를 할 뻔했던 검공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그, 그러니까… 그게에… 소, 소녀가 ‘검공’이라니. 무슨 참람한 말씀을…….”

‘소녀’라니.

이 낡아빠진 1인칭은 무어란 말인가.

지적하고 싶은 마음은 한가득이었지만, 시엔은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었는지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정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일지도 몰랐다.

황녀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과연, 그럴 줄 알았어요. 죄송해요, 이안 경… 하도 정신이 없다 보니…….”

“괜찮습니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죠.”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검공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자유를 되찾은 검공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 불만스러운 눈빛에서 옅은 짜증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뭘 잘했다고.

내가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렸을 찰나.

“끄으, 크흐으으으으으으윽!”

어디선가 원독에 젖은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깜짝 놀란 내 시선이 황급히 그 진원지를 쫓았다. 먼 곳에서 인기척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 사이, 가녀린 팔 하나가 묘비처럼 뻗어 나와 있었다.

피부는 어둑해지는 주위와 대조를 이루듯 창백했다. 이윽고 먼지가 자욱한 붕괴의 현장에서, 무언가가 돌 무덤 속에서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요사스러운 푸른 불꽃이 허공에 떠오른다.

금빛이던 여인의 머리카락이 점차 회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나와 시엔이 당황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검공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잡어만 있지는 않을 것 같더니.”

“아무리 그래도 남은 사람들까지 희생시킬 수는…….”

“죽지 않아도 될 아이들은 살아있다. 네 계집질 상대의 친구는 애초에 이 건물에 없고.”

연달아 이어지는 반박에 나는 침음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과연 기감에 잡히는 숨결이 몇몇 있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검공은 건물이 붕괴되는 와중에도 몇몇 이들을 보호할 역량이 충분한 듯했다.

그야말로 절정에 이른 기예.

차라리 묘기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나는 검공의 가늠할 수 없는 검술 실력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말한 ‘소중한 사람의 친구’를 정확히 짚어내는 정보력까지.

대륙 최고의 검수이자, 제국 첩보부의 수좌에 앉은 걸물다웠다.

다만 이러한 상념은 길지 못했다.

폐허에서 몸을 일으킨 흡혈귀의 혈족이 광소를 터트렸기 때문이었다.

“푸흐, 아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어, 어떻게 알았지? 잘 숨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딱히 알고서 한 짓은 아닌데.

하지만 굳이 진실을 밝힐 까닭은 없었다. 나는 흡혈귀의 눈빛에 감도는 경계의 빛을 바라보면서, 슬쩍 황녀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섰다.

“……이곳에는 학생들만 모아두었을 텐데.”

“후후, 이럴 수가… 너희들이었구나. 이 맛있는 냄새의 정체가……..”

흡혈귀의 혈족은 내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다만 음험한 빛으로 눈동자를 반짝이며, 슬쩍 제 입술을 할짝였을 따름이었다.

시선에서 노골적인 욕망이 느껴졌다.

식욕이라고 해야 할지, 성욕이라고 해야 할지.

이윽고 달아오른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딘가 안달이 난 음색이었다.

“꼬마야, 꼬마야… 너희의 정체는 도대체 뭐니?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날 수 있지? 심지어… 너는 결계의 중심이구나! 아하핫! 우리 자매는 이 냄새에 이끌렸던 거야!”

멋대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그 행태에 내가 끼어들 여지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그 중얼거림을 무시하며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마침 흥분할 대로 흥분한 모양이니, 어쩌면 중요한 단서를 말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걸면서.

“셀린은 어디 갔지?”

목소리를 낮게 깔고, 성대를 긁으면서 던진 의문이었다.

내 사나운 기세에 흡혈귀는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톡톡, 제 입술을 건드리는 검지가 묘하게 뇌쇄적이었다.

“셀린? 셀린? 글쎄… 내 기억에는 없는데? 내 자매 중 하나가 먹어 버렸나?”

“검은 머리카락에, 황갈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 말이야.”

“푸흐흐, 본 적 없다니깐? 아아, 그런데 너 화내는 모습도 매력적이다. 어때, 꼬마야? 이 누나랑 진한 하룻밤을 보내보는 건?”

대화가 도저히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나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뱉으며, 슬그머니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일종의 협박이었다.

정작 흡혈귀의 제안에 울컥한 쪽은 따로 있었지만 말이다.

“이, 이… 천박한 암캐가!”

바로 시엔이었다.

울컥한 황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온몸의 솜털을 빳빳이 세웠다. 마치 임전태세에 돌입한 고양이처럼.

“야, 이안 경이 너 같은 걸레의 유혹에 넘어갈 것 같아?! 이안 경은 너보다 몸매 좋은 여자랑 잔 적도 있다고!”

“그게 무슨 소리…….”

두 눈으로 목격이라도 한 것 마냥 떠드는 소리에, 나는 무어라 캐묻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는 남아있지 못했다.

흡혈귀가 제 목을 그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팍, 하고 터져 나온 핏물이 무척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이어졌다. 이윽고 구체를 이룬 핏물들이 주위의 잔해 위로 쏟아져 내렸다.

흡혈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나는 바짝 몸을 굳혔을 뿐.

그 속셈을 알게 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끄르륵, 하고 거품 끓는 소리와 함께 흡혈귀의 잘린 성대에서 음성이 새어 나왔다.

“크흐. 끄르륵… 너, 너무 그러지 마… 크흐흐… 나도 알아, 이안 페르쿠스… 산상법정에서 성자와 대결을 벌였다지?”

그러면서 흡혈귀는 두 손으로 제 머리를 붙잡았다. 이내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제자리를 되찾는 안면.

흡혈귀의 상처는 이미 지글지글 끓으며 앓은 뒤였다.

여인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태평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나 혼자서 맞상대할 수준은 아니지… 하지만 인질이 있다면?”

그제야 내 기감이 황급히 핏물이 흩뿌려진 잔해 속을 살폈다.

흡혈귀의 말대로였다.

잔해 속에서는 옅은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무고한 실종자들이리라.

내가 이를 악물며 검에 힘을 주기 직전이었다.

“그러다 죽는다?”

핏빛 호선을 머금으며, 흡혈귀의 권속은 비열한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오러를 일으키려는 거지? 그럼 바로 죽어, 저 애들. 농담 같으면 실험해 볼래?”

“이런 미친…….”

당장이라도 이죽대는 머리를 떨어트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하지만 아직 나는 ‘경계’에 진입하기 위해 몇 초의 말미가 필요했다. 일단 시간이 정지하고 난 뒤에는 감당할 수 없지만, 오러를 일으키자마자 인질들의 목숨을 빼앗는다면 속수무책이었다.

사실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기는 했다.

대화?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그럼에도 나는 일부러 허세를 부려 보기로 했다. 기세에서 밀리고 싶진 않았으니까.

“인질 몇 명보다 네 목숨이 더 가치 있어 보이는데?”

“그렇게 판단했다면 마음대로 해. 어차피, 건물이 무너진 순간부터 내 패배는 정해져 있으니… 기꺼이 목을 바쳐 줄게? 대신 네 동문들과 함께 말이야.”

결국 나는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리며 검에서 손을 떼는 수밖에 없었다.

상대도 이판사판이었다.

어차피 죽음이 결정되어 있다면, 최대한 길동무를 늘리고 싶겠지.

대화가 필요한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다. 나는 불필요한 자극을 그만 두기로 했다.

“……좋아, 그럼 하나만 묻자. 너희는 도대체 아카데미에서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지? 왜 하필 아카데미야?”

“말해 주면 살려 줄 거야?”

얼핏 순진해 보이면서도, 교태를 담은 음색이었다.

시엔은 더욱 경계심을 키우며 내 귀에 속삭였다.

“믿지 마세요. 무언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시엔의 연회색 동공은 이미 세로로 찢어진 뒤였다.

그럼에도 내게 대화를 멈춘다는 선택지는 남아 있지 못했다. 어차피 이 기회를 날리면, 단서를 얻을 만한 기회는 남아있지 않았다.

“무얼 알고 있긴 한 건가?”

“글쎄, 너보다는 많이 알고 있을 것 같은데… 꼬마야.”

여지만을 남기는 애매한 대답이었다.

말장난이 짜증나긴 했지만, 일단 급한 쪽은 나였다.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들끓는 살심을 애써 가라앉혔다.

“……정보의 질에 따라 다르지.”

“그렇게 애매한 약속, 나는 좋아하지 않는데?”

“날 너무 자극하지 마.”

싸늘한 음색으로 성대를 긁으며, 나는 허리춤에 매달린 손도끼를 툭툭 건드렸다.

“내가 너 같은 부류를 하나둘 상대한 줄 알아?”

흐음, 하고 그제야 흡혈귀의 권속은 조금 신중해진 눈빛을 했다.

내 명성을 익히 들어왔다면, 알 수밖에 없을 테지.

이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결국 권속은 어깨를 으쓱이며 몇 가지 정보를 털어놓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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