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32)화 (532/649)

Chapter 532 - 7. 질투는 나의 힘(32)

“나도 자세한 사정은 몰라. 우리 어머니, 여왕의 뜻을 따를 뿐… 다만 짐작이 가는 부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예를 들어?”

“’대마녀’가 이곳에 왔잖아.”

살풋 미소를 머금으며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 눈빛에는 은근한 살의가 배어 있어서, 나는 일순 손도끼를 뽑아들 뻔했다.

“어머니께서는 그 배신자한테 관심이 무척 많으시거든… 대륙의 미래가 모인 장소가 마스터의 무덤이 된다. 멋지지 않아?”

“본체로도 이기지 못한 주제에, 꽤 자신만만한데.”

내 지적에 권속의 시선이 사나워졌다.

나름 울컥한 모양이지만, 나로서는 시종일관 여유롭던 그 낯빛에 일어난 균열이 기꺼울 따름이었다.

“너희 따위가 모인다고 해서, 아카데미를 함락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실력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러기 위해 준비 중이잖아.”

살짝 달아오른 목소리로, 여인은 차가운 말씨를 토해냈다.

“너는, 우리 어머니의 두려움을 몰라… 인간은 결코 우리 어머니를 해할 수 없거든.”

‘인간’은 불가능하다고?

단순한 허세나 허풍은 아닌 듯했다. 내가 확신을 가지기 위해 슬쩍 곁눈질하자, 시엔은 심각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거짓말은 아니에요.”

“이런 씨발.”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인간’으로서는 상대가 불가능하다?

보다 많은 정보를 얻고 싶었지만, 나는 흘긋흘긋 옆을 살피는 권속의 태도에서 무언가를 직감했다.

이 여자, 도주할 틈을 노리고 있다.

오랜 경험이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흡혈귀의 권속이 빠져 나가기 위해 택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수단.

인질들을 죽이고, 내가 당황한 틈에 빠져나간다.

예민해진 내 기감이 잔해 위에 흩뿌려진 피의 온기를 쫓았다. 기묘하게도 핏물이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내가 권속을 주목하고 있듯, 권속 또한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당연히 내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손을 슬그머니 허리춤으로 옮기자, 권속은 앙칼진 소리를 내질렀다.

“……더는 움직이지 마!”

애써 여유로운 척 하더니, 죽고 싶지는 않았나.

나는 헛웃음을 삼키면서도 그 요망을 들어주기로 했다.

일단 발은 묶어두었다.

나는 일단 그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이윽고 내 최후통첩이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만 묻자… 너희 중에 인간으로 되돌아 간 자가 있나? 그리고 또, 셀린을 본 적은 정말 없나?”

“……말하면 살려 줄 거야?”

그 흔들리는 목소리에서 일말의 가능성이 보였다.

내 눈빛이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진실을 말한다는 조건 하에… 참고로, 우리한테는 진술의 진위를 감별할 수 있는 모종의 수단이 있거든.”

“맹세해.”

이제 불안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흡혈귀는 으르렁거리며 재차 조건을 제시했다.

“천신께 맹세해… 네 연인 중 하나가 성국의 성녀라지? 그녀의 명예까지 걸어.”

“그것 참…….”

교활한 조건이군.

나는 그렇게 말끝을 흐리며, 망설이듯 눈을 감았다.

비록 공표하지는 않았지만 나와 성녀는 부부관계나 다름없는 사이가 아닌가.

그런데 남편이 천신의 이름을 남발하고 다닌다?

성녀에게 등짝이 해지도록 맞아도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천신이 노해서 내게 벼락을 내리꽂을지도.

나는 성녀가 아니었다. 불길 속에서 살아남을 자신 따위는 없었다.

오소소 돋아 오는 소름과 함께, 나는 한숨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꼭 그래야겠나?”

“내게 진실을 요구하려면 그 정도는 해줘야지? 심지어 내 손에 인질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

한참을 머뭇거리던 나는 이윽고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맹세하지. 네가 내 물음에 진실로 답하는 한, 오늘 내가 널 죽이는 일은 없을 거야.”

“’오늘’?”

“그럼 다음에 만나면 네게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으라고? 적당히 하지.”

울컥해서 내뱉은 반론은 지당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흡혈귀의 권속이라도 더는 억지를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했던 정보를 내놓기 시작했다.

“우선, 우리 중에서 인간으로 되돌아 간 자매는 없어… 애초에 왜 그래야겠어? 이토록 넘치는 은혜를 받아, 멋대로 힘을 휘두르고 다닐 수 있는데!”

“인간성을 되찾고 싶진 않고?”

“전혀.”

단언과 함께 이어지는 진득한 살기 어린 미소.

시엔에게 물을 필요도 없었다. 이 여자는 진심이었다.

“애초에 ‘계약’이 그렇게 만만해 보여? 우리는 은혜를 받았고, 그 대가로 우리의 여왕을 무한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야. 결정을 무르는 방법 따위, 더는 존재하지 않아.”

“만일 계약이 강제였다면?”

“아하… ‘자매’가 아니라 ‘노예’들의 이야기였구나?”

이제야 내 속내가 짐작이 간다는 듯, 여인은 살풋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어. 약자가 강자한테 잡아먹힌다… 대자연의 섭리야.”

내가 무어라 더 캐묻기도 전이었다.

여인은 진정 궁금했던 의문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셀린’이라고 했던가? 안타깝지만… 무언가 착오가 있는 것 같은데.”

“……뭐?”

세리아가 현장에서 회색의 머리카락을 발견한 마당이었다.

누가 보아도 흡혈귀의 소행이 유력하지 않은가.  하지만 시엔은 말없이 흡혈귀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함의는 명확했다.

진실.

나는 애써 이를 악물며 치솟는 반문을 꾹꾹 눌러 담았다. 마침 흡혈귀가 입을 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왜 이곳에 숨어들었겠어? ‘노예’들을 감시하기 위해서야… 다시 말해서, 납치 당한 여자들의 대부분은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단 소리지. 그런데 당신이 말한 외모는 맹세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걸 말이라고…….”

“진위를 확인할 수 있다며?”

시엔은 묻기도 전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었지만, 상대는 진실을 말했을 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며 분을 삭이는 수밖에.

뇌리에 내 소꿉친구의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

셀린이 이대로 잘못되기라도 하면, 레토의 얼굴은 어떻게 봐야 하지?

바로 그때였다.

“어떻게 거짓말을 구분하나 싶었더니, 그 찢어진 동공… 용혈(龍血)이구나, 그 계집애.”

음슴한 욕망으로 흠뻑 젖은 목소리였다.

흡혈귀의 푸른 눈동자가 번들거리며 시엔을 망막에 담았다. 헤, 벌어진 입에서는 당장이라도 군침이 흐를 듯했다.

그 낯빛이 드러내고자 하는 감정은 명백했다.

식욕.

이를 모를 시엔이 아니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시엔이,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나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반전이었다.

“지금 무슨… 너희가 노리던 건 내가 아니었나?”

“아, 네 피 냄새도 충분히 달콤해. 그런데 네 옆의 꼬맹이도… 어쩐지, 너무 맛있는 냄새다 했어.”

싱긋, 하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흡혈귀가 내게 애교를 부렸다.

“약속했지? 적어도 ‘오늘’은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내가 무얼 하든 간에.”

그 뻔뻔스러운 말에, 내 손이 곧장 허리춤을 향했다. 그러자 흡혈귀는 더욱 맑은 웃음 소리를 터트렸다.

“아하하하하! 진정해, 내가 뭐라도 한댔어? 단지, 아주 조금만… 피를 맛보게 해줘. 우리의 여왕을 위해서라도…….”

그럼에도 내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않자, 흡혈귀를 슬쩍 주위를 곁눈질하기까지 했다.

인질들의 목숨은 아직도 흡혈귀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조건은 동일했다.

오러를 끌어올리면, 인질들을 죽이겠다.

맹세를 어기지 않도록 절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너무 과한 조건을 요구하면 내가 맹약을 깨트릴 수도 있었으니까.

내가 침묵을 지키자, 시엔은 겁 먹은 눈빛으로 내 소매를 쥐었다.

“이, 이안 경…….”

그 애처로운 목소리에도 내가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단지 한숨을 내뱉으며, 검 손잡이에서 손을 서서히 치웠을 뿐.

“……후회할 거다.”

두 여인의 낯빛이 부정교합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시엔은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지,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반면 흡혈귀는 환희에 찬 표정으로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버, 버리지 말아 주세요! 이안 경, 잘못했어요… 앞으로 나쁜 말 쓰지 않을게요! 착한 아이로 남을게요! 사, 사실 그동안 이안 경으로 못된 망상을 하긴 했지만…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자, 자 보세요! 저 용 울음소리도 잘 흉내… 히이이익?!”

하지만 그 기나긴 애원은 채 끝맺어지지도 못했다.

두 손으로 용의 갈퀴 모양을 만들던 시엔은, 어느덧 지척까지 다가온 흡혈귀의 손길에 그만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렴, 작은 용아… 아주 순식간에 끝이 날…….”

그 직후였다.

서걱, 하는 소리가 뒤늦게 울려 퍼졌다.

누구도 반응할 수 없는 속도였다. 심지어 흡혈귀를 눈앞에 두고 있던 나조차도, 움찔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흡혈귀의 손목에 핏빛 실금이 가 있었다. 이윽고 선홍빛 분수가 솟구치며 주인을 잃은 손이 허공을 날았다.

의식이 비현실에서 현실로 돌아올 때까지, 아주 짧은 시간.

“끄, 끄아아아아아아아악! 가, 감히… 누가! 어떤 새끼가!”

험한 말을 내뱉으며, 제 잘린 손목을 움켜쥔 흡혈귀가 사납게 주위를 훑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더라도 보일 턱이 없었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려오자, 나와 황녀가 자연스레 몸을 돌리며 소녀의 길이 열렸다.

암청빛 머리카락을 지닌 자그마한 소녀.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형형했다.

아무도 모르는 길가에서 마주쳤다면, 반딧불이의 춤을 먼저 연상할 정도로.

이윽고 나지막한 선언이 토해졌다.

“나다만.”

사형 언도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