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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33)화 (533/649)

Chapter 533 - 7. 질투는 나의 힘(33)

얼핏 보기에는 사랑스러운 소녀의 멋 모르는 허세로 들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진정한 정체를 알고 있는 내게는 보였다.

흡혈귀는 죽는다.

이 미래를 바꿀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나 또한 이를 기대하고 있지 않았던가.

무려 수십이나 되는 목숨을 희생시킨 괴물이었다.

이대로 살려 보낼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말도 안 되는 맹세를 입에 담았던 까닭은, 굳이 내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국 최강의 무인.

검공이 이 자리에 있었다.

내가 나서 봐야, 주제 넘은 짓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흡혈귀의 생각은 나와 다른 듯했다.

“크, 크흐흐… 너, 넌 뭐지?”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흡혈귀는 살기를 숨길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부릅뜬 그 눈동자에 핏발이 툭툭 터져 나오고 있었다.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의미였다.

“못 들었나? 난 이곳에 ‘노예’를 감시하기 위해 왔어! 이곳에서 조심해야 할 인물 따위는 전부 꿰고 있단 말이다… 운석 떨구는 델레모어, 두개골 수집광 데릭, 지상 최강의 마탄술사 아드리아나, 그리고 미친개 이안까지… 하지만 내가 본 어떤 서류에서도 네 얼굴 따위는 없었다고!”

“그래서?”

달구어질 대로 달구어진 목소리에 반해, 소녀의 목소리는 평탄하기만 했다.

마치 어디 한 번 말해 보라는 듯.

명백히 상대를 깔보는 태도였다. 오직 강자만이 부릴 수 있는 여유.

그러지 않아도 내 앞에서 성질을 죽여야 했던 흡혈귀였다. 이러한 모욕을 감내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뿌득, 하고 이가 갈려 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흡혈귀의 목에 핏대가 설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슨 소리냐고? 너 따위는, 주의할 필요도 없단 소리잖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토해지자, 곳곳에 무덤처럼 쌓여있던 잔해들이 반응했다.

압사했으리라 여겼던 괴물들이 살아있다는 신호였다.

팍, 팍, 팍.

몇몇 잔해 사이에서 솟구친 팔은 이내 수십까지 늘어났다. 무거운 돌덩이를 헤치며 몸을 일으킨 괴물들은, 그야말로 눈 뜨고 못 봐줄 지경이었다.

두개골이 반쯤 뭉개진 괴물이 하나.

팔다리가 찢겨져 덜렁거리는 괴물은 셀 수도 없었고, 그 외에도 사지가 성한 몸뚱어리를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몇몇 괴물에 이르러서는 아예 상식을 의심케 할 정도였다.

저 꼴로도 움직일 수 있나, 하는 근원적인 의문.

어느새 흡혈귀를 달뜬 숨을 내뱉고 있었다. 가학심으로 들뜬 눈빛이 소녀를 지긋이 응시했다.

“나름, 나름 실력은 있는 모양이지? 푸흐흐… 그럼 어디 한 번 버텨 봐. 만일 무기에 손을 대거나, 오러를 일으키려 든다?”

이윽고 까닥거리며, 제 손가락에 맺힌 핏빛의 실을 뽐내는 흡혈귀의 손.

“인질들을 하나씩 죽여줄게. 어디, 네가 몇 명이나 되는 인질을 죽이나 두고 볼까?”

소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흘깃 바라보면서, 조언을 건넸을 따름이었다.

“꼬맹아, 잘 봐둬라.”

키에에에에엑!

마치 쇠를 긁는 듯한 울부짖음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보를 깨트리고 쏟아져 내리는 강물처럼.

“언젠가는 네가 다루어야 할 칼이니까.”

그러면서 소녀의 손이 서서히 허리춤을 향하자, 흡혈귀는 발작에 가까운 비명을 토해냈다.

“감히, 감히, 감히… 내가, 검에 손대지 말라고 했는데……!”

“……손대지 말라?”

피식, 하고 코웃음을 친 소녀가 손길을 멈추었다.

“꽤 웃기는 농담을 하는 아이구나. 어찌 검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비틀비틀, 괴물들은 다가오고 흡혈귀는 핏발 선 눈으로 소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흡혈귀가 벌컥 화를 내며 목청을 높인 찰나.

“그게 무슨 헛소……!”

파열(破裂).

일대의 공간이 와장창 찣겨 나갔다. 질풍이 마구잡이로 대지를 훑고 지나가며, 세상이 일순 한 시점에 고정당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아니 만물이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멈춘 세상 속에서, 소녀는 홀로 한숨을 토해냈다.

“……이 세상 전부가, 내 검이거늘.”

직후.

팍, 하고 핏물이 일제히 축포처럼 터져 나왔다. 하늘 높이 치솟은 피 분수는 단 한 방울도 소녀의 곁에 닿지 못했다.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한 여인의 머리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시선이 침강할 때마다 머리 잃은 육신에 새겨진 빗금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목에 하나, 그 다음은 팔과 다리, 이후에는 셀 수도 없이 무수한 절취선들이.

생명이 남을 여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진 고기로 화한 흡혈귀의 몸이 한 줌의 핏물이 되어 흘러 내렸다.

그것이 끝이었다.

수십에 달하는 괴물은 절명했다. 어떠한 전조도, 징후도 없이.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위.

내가 저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이러한 의문을 지우는 것은 소녀의 시큰둥한 목소리였다.

“뭘 그렇게 넋이 나가 있냐?”

어느새 내 지척까지 다가온 소녀는, 살짝 까치발을 들어 내 어깨를 토닥였다.

“이게 네가 배워야 할 비전이다… 내가 멋대로 검혼(劍魂)이라 부르고 있지.”

“과연, 검공의 비전…….”

나는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대단합니다, 검공 어르신! 어떻게 오러도 없이 그럴 수 있죠?! 또, 그 몸은 의체일 텐데……!”

“훗, 이놈아. 마스터의 육체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개념적인 것이다. 내 의식을 옮겨 담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내 육체의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지.”

“엄청나요!”

존경심을 이기지 못한 나는 곧장 소녀의 겨드랑이에 두 손을 끼웠다. 이윽고 번쩍 들린 소녀의 몸뚱어리가 땅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제정신으로 한 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도 검의 길을 걷고 있는 사내가 아닌가. 꿈에도 바라마지 않던 검의 극의를 두 눈으로 목도했는데,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소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노골적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아, 아니… 이놈이 무슨…….”

“존경스럽습니다! 과연 대륙 최고의 검사… 저도 본받고 싶어요!”

처음에는 발버둥을 치던 검공이었으나, 아무래도 연달아 터져 나오는 내 탄성마저 버틸 재간은 없는 모양이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검공은 훗, 하고 미소를 머금으며 우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더욱 찬미해라! 내가 바로 검공이다!”

“멋집니다, 검공 어르신……!”

그렇게 어화둥둥 소녀를 비행기 태우고 있던 찰나.

나는 문득 어떠한 위기감이 뇌리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누구 하나를 잊어버린 것 같은데…….

그 의문이 해소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크, 큰할아버지……?”

넋이 나가다 못해 아예 잃어버린 목소리.

그제야 동행의 존재를 깨달은 나와 검공의 몸이 뻣뻣이 얼어붙었다.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키며 서서히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낯빛이 창백해진 시엔이 서 있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충격이 워낙 심했는지, 그 눈가에 옅은 물기가 맺혀 있었다.

나와 검공의 얼굴도 곧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어, 어떻게… 거짓말이죠? 하지만, 이 정도의 검술… 우리 큰할아버지 외에는…….”

“……시, 시엔아.”

내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검공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렇게 입을 뗐다.

“내가, 내가 다 설명하마… 사실, 이건 어쩔 수 없이…….”

“큰할아버지가 소녀, 큰할아버지가 연적, 큰할아버지가 암캐, 큰할아버지가 이안 경의 품에 안겨서… 으, 으으…. 으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하지만 검공이 무어라 핑계를 대기도 전에.

망가진 소녀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그 울부짖음은 차라리 단말마에 가까웠다.

나도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 했지만, 무리였다.

“저, 시엔 전하……?”

“꺄아아아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으꺄아… 끄엑.”

그리고 기절.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나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개판이구나.’

엘시 선배가 또 다시 그리워지는 밤이었다.

**

정신을 잃은 시엔을 신전에 맡긴 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기숙사로 되돌아왔다.

시엔은 쓰러진 이후에도 한참 동안 웅얼거리며 심마를 이겨내지 못했다. 최소한 내가 신전에 데려다 줄 때까지는, 낯빛도 창백한 그대로였다.

의식을 되찾은 뒤에는, 도대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내가 복잡한 심경으로 문 손잡이를 잡아당기며 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낯선 풍경이 내 망막을 두드렸다.

“킁, 킁킁… 아아, 오빠의 냄새… 응?”

내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열심히 냄새를 맡고 있는, 흑색과 적색이 어우러진 법복을 갖춘 소녀.

상상조차 못했던 조우라 내 몸은 그대로 뻣뻣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반면 소녀는 나와 눈을 마주쳐도 별로 당황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도리어 반색을 하며, 침대에서 벗어나 내게 종종걸음을 치며 다가오기까지 할 정도였다.

“안녕, 오빠! 돌아왔어? 오늘은 뭐부터 할래? 밥? 목욕? 아니면… 설마, 나? 꺄아아!”

“살인.”

나는 곧장 손도끼를 뽑아들며 달려들었다.

난데없는 ‘탐욕’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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