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34)화 (534/649)

Chapter 534 - 7. 질투는 나의 힘(34)

실내를 휩쓸고 지나간 열풍의 영향은 지대했다.

박살 난 가구가 조각 나 흩어져 있었고, 나는 헐떡이며 벽을 짚고 서 있었다. 단시간 내에 너무 많은 힘을 짜낸 탓이었다.

물론 상대라고 해서 멀쩡하지는 못했다.

소녀의 새하얀 피부를 감추는 얇은 천 곳곳에 날카로운 상흔이 엿보였다. 슬쩍 배어 나오는 핏물과, 거미줄처럼 실내를 뒤덮은 핏빛의 실이 치열한 전투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고작해야 몇 분.

목숨을 건 대결에서 삶과 죽음을 몇 번이나 타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특히 맞상대가 나를 잘 알고 있다면 더더욱.

‘탐욕’은 이미 내 심상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오러를 일으킬 때마다 무리해서 나를 막으려 들지는 않았을 테지.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내가 ‘경계’를 넘는 순간 ‘탐욕’조차 내게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렇게 잠시 승부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하아, 하아… 후우! 너무하잖아, 오빠? 사랑하는 여동생을 보자마자 도끼질을 하다니…….”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야.”

짙은 적의가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한편으로는 연민과 동정을 감추려는 처량한 발악이기도 했다. 아무리 나라도 심장에 피가 통하지 않겠는가.

망가져 버린 친여동생이 안타깝지 않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불우한 과거를 털고 두 손을 맞잡기에는 너무 늦은 뒤였다.

눈앞의 소녀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수도 없이 범해 왔다. 또, 소녀 또한 나를 비롯한 가족을 용서할 수 없겠지.

평행선이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는, 내 손으로 이 끔찍한 죄악의 연쇄를 끊는 것뿐이었다.

소녀는 이러한 내 심정도 모르고 태평한 목소리를 지껄일 따름이었지만.

“아아, 어떡해… 오빠를 본다고 힘껏 꾸미고 왔는데, 머리카락도 엉망이 돼 버렸잖아…….”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투였다.

그럼에도 나는 경계를 지우지 않으면서, 헛웃음과 함께 이죽였다.

“꾸며서 뭘 하려고?”

“사랑하는 남자한테 잘 보이고 싶은 건, 당연한 욕망이잖아?”

그러면서 한쪽 눈을 찡긋하기까지.

직전까지 목숨을 걸고 다툰 상대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친근한 태도였다. 내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쳐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는 사이였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내 손아귀에 다시금 힘이 들어갔을 때였다.

“너무 그러지 마, 오빠… 나는 오빠를 위해 찾아온 거라고?”

“내가 미쳤다고 네 말을 믿나?”

“하지만, 곤란하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소녀는 요사스러운 눈빛을 했다.

질문이 아닌 단언이었다.

그만큼이나 소녀의 어조에서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흡혈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셀린 언니는 또 어디로 갔고? 결계, 납치, 이상고온… 수수께끼는 많은데 정작 풀리는 건 없어.”

“……그래서?”

나는 일순 혹하려던 마음을 애써 감추며 반문했다.

“설마 ‘거래’라도 하자는 뜻은 아니겠지?”

“아하하! 어떻게 알았어? 역시, 우리는 천생연분이야… 이렇게 마음이 잘 통하다니!”

대답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내 남은 손이 손도끼를 자루를 쥐었다. 만일 소녀가 황급히 두 손을 내젓지 않았다면, 곧장 전투가 재개되었으리라.

“잠깐, 잠깐! 이야기 정도는 들어볼 수 있잖아?”

“그렇게 하나둘씩 속여 왔겠지?”

“’흡혈귀’를 제거해 줘!”

나조차도 멈칫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워낙 믿기지 않는 소리라서, 나는 미간을 좁히며 재차 되물어야 했다.

“……뭐라고?”

“진짜,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다짜고짜… 내가 원하는 조건은 그뿐이야.”

서운하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도, 소녀는 뜻하지도 않던 소리를 반복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제안이었다.

그래서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의심의 눈초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억울해진 쪽은 소녀였다.

“아니, 진짜라니깐?! 나도 일단 ‘상인’이야! 거짓말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넌 암흑교단…….”

“그러니까!”

제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소녀의 당당한 선언이 반복됐다.

“우리 교단 내부에서도 여러모로 복잡한 알력 다툼이 있다니깐? 특히 그 ‘흡혈귀’는, 유독 델피렘 님의 통제를 잘 따르지 않기도 하고…….”

“통제를 따르지 않는다니?”

“흥, 내가 왜 아카데미로 찾아왔겠어?”

소녀는 도도한 걸음걸이로 그나마 멀쩡한 의자 위에 걸터앉았다.

다리를 꼬는 과정에서 그 매력적인 살결이 슬쩍 드러날 뻔했지만, 나는 일부러 시선을 돌려 오해를 미연에 방지했다.

 그것이 오히려 소녀를 의식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줄이야.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소녀의 눈꼬리가 만족스럽게 휘었다.

“말해두겠는데, 이곳에서 벌어지는 이변은 우리와 무관해. ‘질투’의 단독 행동이라고.”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아아, 네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시범적으로 정보 하나를 줄게.”

찡긋, 하고 다시 한 번 한쪽 눈을 깜박이며 소녀는 짐짓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당장 오빠가 아끼는 후배를 찾아가는 편이 좋을걸?”

“……무슨 헛소리야?”

당장이라도 물리치고 싶은 제안이었지만, 하필 인질이 너무 컸다.

내가 아끼는 후배라고 하면, 단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세리아.

머뭇거리는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대의 정보가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라, 나는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하지 못했다.

그러는 내 모습을 보며 소녀는 푸흡, 하고 웃음을 터트릴 따름이었다.

그 금빛 눈동자에서 황홀한 애정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이러는 내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사랑스러워라… 내가 이렇게나 오빠를 사랑하는데, 왜 거짓말을 하겠어?”

“날 함정에 빠트릴 수도 있지.”

“아마도, 언젠가는?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은 길지 않았다. 내게는 만일을 대비한 비대칭 전력이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검공.

대륙 최고의 검사라면, 무슨 음모가 도사리고 있더라도 개의치 않아도 될 터였다.

하물며 검공은 이제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 정체가 간파당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도리어 함정을 판 상대를 역으로 몰아붙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결국 한참이나 망설이던 내 입에서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거짓말이라면 반드시 죽인다.”

“그러지 않아도 죽일 생각이잖아? 후후, 내가 정보를 건네주는 한은 그러지 못하겠지만… 아아, 그 표정 좋아. 나를 죽이고 싶은데, 죽이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내가 검을 칼집에 수납하는 동시에, 소녀는 손가락을 퉁겨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핏빛 실을 치워 버렸다.

임시 동맹의 탄생이었다.

조금도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게 등을 돌려 떠나가기 직전.

나는 못내 마음에 걸리던 의문을 던졌다.

“……정말 아무런 대가도 필요하지 않은 거지?”

“으응? 적어도 지금 건넨 정보는 그럴 생각인데… 정 그렇게 불안하다면.”

소녀의 가녀린 검지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전투의 후폭풍으로 살짝 기울어 버린 찬장이었다. 그 안에는 내가 종종 홀짝이는 술들이 몇 병 전시되어 있던 참이었다.

“술 한 잔만 줄래?”

“어린 놈이 발랑 까져 가지고.”

나는 쯧, 하고 혀를 차면서 찬장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술병과 잔을 챙기려던 찰나.

살금살금 다가온 소녀가 자연스레 내 품으로 엉겨 붙었다.

베에, 하고 혀를 내밀면서.

“잔 말고, 오빠가 먹여 줘.”

“그게 무슨 개소리……”

“으음, 입에서 입으로?”

그러면서 은근슬쩍 제 몸을 밀착하는 저의가 너무나도 명확해서.

딱, 하고 내 주먹이 소녀의 이마를 두드렸다.

“……아얏!”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우리는 친남매……”

‘친남매’가 아니냐고, 하려다가.

나는 차마 그 말을 끝맺지 못했다. 다만 이를 악물고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을 따름이었다.

소녀는 우두커니 서서 내 뒷모습을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한참 동안이나.

**

그날 밤, 세리아는 불편한 심기를 감출 수가 없었다.

계기는 언제나 그렇듯 자매 다툼이었다.

세리아는 최근 아카데미에서 감도는 이상 동향을 감지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안의 피가 숲에 그려져 있던 마법진에 흩뿌려진 다음날부터 그랬다.

무언가 이상하다.

모두가 예민해져 있었다. 길을 걸을 때마다 가지각색의 감정들이 파도치고 있다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을 정도였다.

낯선 경험이었다.

세리아는 인간관계에 서툴렀다. 당연히 눈치도 좋지 않았다.

이러한 변화는 늘 최후에 가고 나서야 눈치를 챘을 텐데.

단체로 넋이 나가기라도 한 듯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못내 꺼림칙했던 세리아는 이를 가문에 보고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세리아의 믿음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배신당했다.

“……이안 선배를 따로 불러 달라고요?”

“그래.”

뻔뻔하다고 느껴질 만큼 무심한 목소리였다.

그 냉대에 세리아는 울컥하는 마음을 지울 길이 없었다.

“제가 말씀을 전하면 되잖아요? 왜 굳이 이안 선배와 단 둘이…….”

“우리 둘만 알아야 할 정보니까.”

‘우리’라는 표현이 유독 무겁게 세리아의 가슴을 짓눌렀다.

저 낱말 안에 세리아가 설 자리는 없었다.

도리어 델핀은 세리아의 자리를 없애 버리고 싶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도둑고양이처럼, 여동생의 짝사랑을 강탈하고 이처럼 체신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치 어머니를 빼앗아 갔을 때처럼.

세리아는 으득, 하고 이를 갈았다. 왜 이리 분한 마음이 드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제 심장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왜 저는 알면 안 되죠?”

“딱히 말해주고 싶지 않은데.”

델핀은 그렇게 답하면서, 무심한 어조로 재차 단언했다.

“애초에 엘프 측에서 서방님을 상대로 보내 온 첩보야. 너까지 알아야 할 이유는 없잖아?”

“알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잖아요.”

“가주 명령이야.”

세리아는 무심코 주먹으로 제 가슴을 꾸욱, 하고 눌렀다.

호흡이 가빠졌다.

기묘할 만큼 감정의 낙폭이 컸다. 혹시 나도 미쳐 가고 있는 걸까?

헐떡이는 숨소리가 뇌리가 멍해진다.

시야가 좁아지고, 일렁이고, 흐릿해지고.

그 와중에 델핀의 목소리만이 세리아의 작은 세계를 두드리고 있었다.

“이견은 받지 않겠어. 얌전히 내 말을 따르…….”

“……그날처럼?”

나지막이 내뱉은 말이 세리아의 시침을 과거로 되돌렸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어느덧 계절이 몇 번이나 되돌려지며 어느 날 밤의 풍경이 망막에 맺힌다.

그날도 세리아는 울고 있었다.

아버지는 차가운 낯빛을 하고 있었고, 언니는 팔짱을 낀 채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

어머니가 쫓겨나던 날이었다.

델핀은 그 느닷없는 반문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단지 미간을 좁히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을 뿐.

“’그날’이라니? 무슨 소리…….”

“어머니를 쫓아냈던 날 말이에요.”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일순 델핀은 입을 다물고 마땅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진홍빛 시선이 슬쩍 내리깔리다가, 이윽고 한숨을 내뱉기까지.

“세리아, 그날은 말이지…….”

“명령은 잘 받들겠습니다. 그럼 이만.”

그 말을 끝으로 뚝, 하고 델핀의 화상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뒷감당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벌인 일이었다.

세리아는 그대로 방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이 뒤틀린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그러다 보니, 어느덧 숲의 한가운데.

이안과 종종 검을 휘둘렀던 공터였다. 그제야 다소 마음이 편해진 세리아는 옅은 한숨을 토해냈다.

내가 왜 그랬지?

델핀으로서는 난데없는 반항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아무리 세리아가 가문의 실세 중 하나라지만, 가주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됐다.

뒤늦은 후회의 끝, 세리아는 선배가 보고 싶어졌다.

만일 망막을 스치는 회색 머리카락만 없었다면.

등을 돌리려던 세리아의 몸이 멈칫했다. 이윽고 휘둥그레 뜨인 푸른 눈동자가 황급히 공터의 중앙을 향했다.

그곳에는 유령처럼 나타난 여인이 서 있었다.

회색 머리카락, 푸른 눈동자.

연령대는 고작해야 20대 초중반. 기억 속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한 채로.

“……오랜만이구나, 세리아.”

그녀는 자상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세리아는 그대로 숨을 멈추고, 뒷걸음질을 치다가.

제 직감을 맹렬히 뒤흔드는 묘한 예감에 일순 휘청여야 했다.

지독한 농담 같았다.

세리아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울상을 지은 채로, 떨리는 미소를 머금었을 뿐.

“어머니…….”

밤인데도 달빛은 불볕처럼 뜨거웠다.

기구한 운명을 마주한 소녀를 관음하듯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