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35 - 7. 질투는 나의 힘(35)
황급히 찾아간 검공의 몰골은 가히 좋지 못했다.
낌새를 눈치 챈 것은 황제를 만났을 무렵이었다. 노인의 낯빛에는 흐릿한 염려와 고뇌가 엿보이고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던 문제였다.
당장 제국의 정점이 일개 기사를 몸소 맞이하러 나온 참이었다. 그 시점에서 나는 이미 심정지가 올 뻔했던 참이었다.
내 무릎이 땅을 찧을 때까지는 찰나의 시간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페르쿠스 가문의 이안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만, 그만.”
그러나 내 극진한 예우에도 황제는 손을 휘휘 내저을 따름이었다. 옅은 권태감이 깃든 눈빛이 그의 본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들이 보지 않을 때는 그렇게까지 예를 차릴 필요 없네. 앞으로도 얼굴이 볼 일이 많을 텐데, 그때마다 무릎을 꿇고 황송하다는 소리를 할 셈인가?”
“하오나…….”
“동네 아저씨라고 생각하게. 어차피 용의 핏줄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 또한 그러한 삶을 살았을 테니.”
진심인 것 같기는 한데.
그럼에도 나는 함부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우물쭈물할 뿐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말을 들으며 자라오지 않았던가.
제국의 황제는 지존이다.
모든 신민의 목숨은 황제를 위해 존재한다. 황제는 제국 그 자체였으니까.
다시 말해, 황제를 향한 충심이야말로 애국심이나 다름없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제국의 기사로서 예를 섣불리 거두지 못할 수밖에.
황제는 이 난관을 간단히 극복해 냈다.
“……황명일세.”
그 한숨 섞인 목소리에 저항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최소한 제국에서는 한 손에 꼽을 만하리라.
결국 나는 얌전히 고개를 숙여야 했다.
“뜻을 받들겠나이다, 폐하.”
내가 꿇었던 무릎을 펴고 몸을 일으키자, 그제야 황제는 다소 흡족한 눈치를 보였다.
의문은 그 이후에나 이어졌다.
“그래서, 이 늦은 시각에 무슨 일인가? 해가 진 지도 꽤 오래라 아네만.”
“네, 다름이 아니라… 검공 어르신의 도움이 필요해서 이처럼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급한 일인가 보군.”
반문이 아닌 단언이었다.
황제는 슬쩍 내 분위기를 살피는 정도로 대략적인 전후사정을 유추해 낸 듯했다.
일순 머뭇거리던 기색을 보이던 그의 입에서 기나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지금 숙부께서는… 아닐세. 급한 사정이 있다니 지체할 시간이 아깝군.”
그렇게 황제의 황송한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일전에도 방문한 적이 있던 장소였다.
검공의 방.
그곳에서는 소녀 하나가 독주로 병나발을 부는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크흐, 시엔아… 못난 할애비라 미안하다…….”
외모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대사였다.
심지어 들고 있는 술은 와인조차 아니었다. 얼핏 보기에는 위스키가 아닐까 싶었다.
사실 검공쯤 되는 강자에게 취기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취기를 모조리 몰아낼 수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소녀의 볼에는 홍조가 떠올라 있었고, 술 냄새가 문 앞까지 풀풀 풍기는 마당이었다.
소녀가 얼근히 취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일부러 취기를 몰아내지 않았으리라.
내 황당하다는 눈빛에, 황제는 괴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내가 숨겨 두었던 술일세…….”
어쩐지 오늘따라 울적해 보이더라니.
나는 금세 황제의 기분이 언짢은 까닭을 이해했다. 더불어 새삼 막막한 심정이 내 가슴을 덮쳤다.
술에 취한 검공이라니.
제정신일 때도 어디로 튈지 모를 만큼 자유분방한 인물이 바로 검공이었다. 심지어 일신의 무력은 대륙 제일을 다툴 정도였으니, 아무리 나라도 함부로 건드리기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야 했다.
세리아가 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한 걸음을 내딛었다.
검공이라고 해서 내 인기척을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기어코 내가 방 안에 들어서자, 검공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웬일이냐?”
술 냄새가 풀풀 풍기는 한 마디였다.
다시금 술병을 기울이는 검공의 눈은 반쯤 풀려 있었다.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는 소녀가 그러고 있으니, 다소 범죄적인 감상이 들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축 처진 가녀린 어깨가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고.
나는 검공의 성질머리를 건들지 않도록 신중히 말을 골랐다.
“저, 검공 어르신… 흡혈귀에 관련된 중요한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함께 가시죠.”
“출처는?”
누가 제국 첩보부 소속이 아니랄까 봐, 소녀는 내게 정보의 신뢰도부터 따지고 들었다.
불행히도 내가 함부로 대답할 수 없는 내용이기도 했고.
잠시 망설이던 내 입에서 결연한 의지를 담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검공 어르신께서 동행해 주시는 편이…….”
“싫다.”
단호한 대답이었다.
나는 의외로 완고한 태도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등 뒤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친 황제는 고개를 내저을 따름이었다.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고집불통이 된 검공은 황제조차 제어할 수 없는 듯했다. 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어야 했다.
“저, 혹시 사유를 여쭤 봐도…….”
“……왜기는!”
느닷없이 검공이 목청을 높은 것은 그 시점이었다.
쾅, 하고 적갈색 원목으로 이루어진 탁자가 박살 나 폭삭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손에 쥔 술병을 놓지 않는 폼이, 황제의 음주 버릇이 어디서 유전되었는지 알 만했다.
소녀는 분을 참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내가 오늘 하루만 얼마나 많은 수치를 당했는지 아느냐?! 오해도 오해 나름이지, 또 너와 다니다 무슨 소리를 들으라고? 시, 심지어 우리 조카 손녀는… 나, 나한테 ‘암캐’라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녀의 동공과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직 그때의 충격과 공포가 가시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시엔의 혼절이 검공의 정신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울컥해서 목소리를 높이던 소녀의 어깨가 축 처질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검공은 울상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으으, 이제 싫어… 시엔아, 시엔… 크흑……”
그러면서 또 다시 기우는 술병.
꼴깍꼴깍, 소녀가 술병에 남은 술을 모조리 비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려 반절이나 남아있던 술을 단숨에 들이키다니.
아무리 말술이라도 견디기 힘들 텐데.
무심코 나는 손을 뻗으며 소녀를 제지하려 들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남은 것은 그 대가를 치르는 일뿐이었다.
크흐, 하고 호쾌하게 입술을 닦아낸 소녀의 눈빛이 일순 멍해졌다.
그리고 몇 초 후.
“……아니지, 난 진짜 ‘검공’인가?”
너무나 뜬금없는 소리였다.
곧 죽어도 본인이 ‘검공’이라 주장하던 소녀의 변심에 당황한 쪽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보다도 먼저 황제가 입을 열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였다.
“아니, 숙부. 그게 무슨 참람한 말씀입니까? 숙부가 아니면 누가 검공이란 말입니까.”
“아니, 아니… 그, 잘 봐. 내 몸? 너무 작잖아? 응? 까치발을 들어도 네 어깨를 좀 넘는단 말이지?”
그렇게 손을 허우적거리는 소녀의 눈동자에는 이성이 증발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위험하다.
내 등 뒤에 맺힌 식은땀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실, 사실 난 착각하고 있던 게 아닐까? 그래, 뭐냐… 이안, 네놈이 그랬잖느냐. 스스로 검공이라 착각하고 있는 정신병자? 그, 그, 그… 그런 거지~”
푸흐흐, 하고 맑은 웃음소리가 말끝에 덧붙었다. 더듬거리면서도 어찌저찌 말을 마친 소녀의 낯빛에는 짐짓 유쾌한 기색이 머물고 있었다.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소녀는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두 팔을 들어올렸다.
“그래, 사실 난 검공이 아니었던 거야!”
나름대로 명쾌한 해답을 내렸다는 태도였으나, 이를 두고 볼 나와 황제가 아니었다.
우리 둘은 즉각 기함하며 외쳤다.
“아니, 미쳤습니까?!”
“숙부, 숙부! 정신 좀 차리세요! 숙부가 아닌 그 누가 신검을 다룬단 말입니까!”
하지만 우리 둘의 필사적인 설득에도 소녀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칠 따름이었다.
“흥, 듣기 싫다! 그럼 어느 할애비가 조카한테 ‘암캐’ 소리를 듣는다고… 웃기지 마!!”
빼액, 하고 소리를 내지르며 발을 동동 구르는 꼴이 몹시 분해 보이기는 했다.
설마 이대로 술이 깰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가.
그렇게 나의 낯빛에 절망이 스쳤을 무렵이었다.
“……이안 경이!”
황제가 꺼낸 화두에, 나와 소녀의 시선이 동시에 황제를 향했다.
우리 둘의 시선은 상반되고 있었다.
나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눈빛이었고, 반면 소녀는 일견 무심해 보이기까지 한 낯빛이었다.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듯.
황제는 다급히 거짓말을 짜냈다.
“이안 경이, 숙부와 대련을 하고 싶다더군요.”
“……흐음?”
그러자 만취한 소녀의 시선이 슬쩍 나를 향했다.
맹세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나라고 해서 생존 본능이 없겠는가.
대련도 어느 정도 수준에 맞아야 하는 거지, 저만한 괴물과 검을 겨루다가는 중상을 입을 위험이 존재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황제의 간절한 시선을 받으며, 나는 눈물을 삼키기로 했다.
“그, 그 말씀대로입니다! 검공 어르신과 검을 겨루면, 많은 배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리고 침묵.
소녀는 ‘흐음,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몇 번쯤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적은 길지 않았다.
팍, 하고 등가죽을 후려치는 강렬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녀의 손바닥이 내 등을 강타한 탓이었다.
다가오는 줄도 몰랐는데.
나는 울컥, 하고 치솟아 오르는 핏물을 애써 삼키며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어느덧 취기를 모조리 날린 소녀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흐하하! 이놈아, 그렇게 검을 겨루고 싶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오냐, 오냐… 그럼 당장 시작해 볼까?!”
“아니, 당장 가야 할 곳이 있다니까요!”
찌르르 척추를 울리는 통증에 펄쩍펄쩍 뛰면서, 내 목은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리고, 뭡니까? 당장 몇 초 전까지 본인이 ‘소녀’라 주장하더니……!”
바로 그때였다.
무언가가 목젖을 톡, 하고 두드리고 지나가는 감각.
직감이 곧바로 내 몸을 곧추 세웠다. 바짝 긴장한 내 이마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뻣뻣이 굳은 내 시선이 서서히 아래를 향했다.
그곳에는, 그늘진 미소를 지은 소녀가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꼬맹아…….”
그야말로 불합리한 대우가 아닐 수 없었지만,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뒤진다?”
강자존은 비단 대자연에만 통용되는 법칙이 아니었으니까.
그나마 황제가 내 마음을 이해해 주어서 다행이었다.
마지막에 이르러 황제는 연민의 시선을 던지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고생하게.”
나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뱉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진정한 고생거리는 검공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로부터 몇 분 후.
비로소 나와 검공은 세리아를 마주할 수 있었다.
“끄으, 으… 아아아아아아악!”
손목에서 핏물을 흘리며 울부짖는 소녀를 말이다.
그 앞에는, 피로 젖은 소매로 입가를 훔치는 회색 머리카락의 여인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