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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36)화 (536/649)

Chapter 536 - 7. 질투는 나의 힘(36)

그날 밤, 모든 것이 정지했다.

기류도, 숨결도, 심지어는 시간조차도 어느 시점에 고정된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단지 때 아닌 아지랑이만이 끝없이 피어오르고 있을 뿐.

세리아는 호흡조차 잊은 채 멍하니 제 앞의 여인을 응시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던 여인이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저 여인의 뒷모습으로 남아있는데.

머뭇거리는 동안에도 여인은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다만 슬픈 미소를 짓고 세리아를 바라보고 있을 뿐.

이미 한 번 입에 담았지만, 차마 믿기지 않아서.

세리아의 입에서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토해졌다.

“어, 어머니……?”

“그래, 세리아.”

자상하고 기품 있는 음색이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그랬다. 그 출신조차 알 수 없었지만, 귀족 가문에서도 보기 드문 품격을 갖춘 여인이었다.

어린 시절에 들려 주었던 온갖 이야기들이 뇌리를 스친다.

오직 검을 위해 인생을 바치기로 맹세한 이들이 모이는 ‘천검산(天劍山)’, 그곳의 깊숙한 곳에는 ‘소드 서클(sword circle)’이라 불리는 비밀스러운 모임이 존재한다고 했던가.

또 대륙 곳곳에 위치한 금역에 대해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흡혈귀’, ‘놋쇠 천사’, ‘뭇 짐승들의 왕’과 ‘천공의 섬’까지.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마수들이 지키고 있는 보금자리는 모험자들의 무덤이라 불렸다. 이처럼 대륙 곳곳의 신비한 소식을 들으며, 세리아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꿈을 꾸곤 했다.

언젠가 나도 어머니처럼 세상을 떠돌아 보겠노라고.

오래 전에 잊어 버렸던 꿈이었다.

추억을 더듬던 세리아의 목소리가 물기를 함뿍 머금기 시작했다.

“어, 어머니… 진짜로, 어머니세요?”

그럼에도 여인으로부터 되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만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걸음을 옮겨 세리아에게 다가섰을 따름이었다. 처음에는 뒷걸음질을 치던 세리아였지만, 이 또한 한계가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거리는 지척.

여인의 두 팔이 말없이 벌려졌다.

하지만 세리아는 주춤거리며 한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 푸른 눈동자에 공포가 번져 갔다. 일평생을 갈망해 왔던 존재를 앞둔 자의 지당한 불안이었다.

만일 아니라면?

매일 같이 그리워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함부로 손을 뻗기가 무섭고 저어됐다.

혹시라도 실망할까 봐.

다시 상처를 받으면, 아물 때까지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만 같아서.

이러한 망설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침묵을 지키던 여인이 비로소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내 딸아.”

그 한 마디가 담고 있는 감정의 밀도는 얼마나 될까.

울음과, 웃음. 그리고 회환과 아픔을 물씬 풍기는 그 목소리에 결국 세리아는 왈칵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 어… 흐윽… 어, 어머니…….”

“그래, 그래. 내 딸 세리아.”

머뭇머뭇 다가서는 세리아를 품에 안으며, 여인은 애처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동안 많이 컸구나. 정말로, 많이 컸어… 어느새 나와 비슷한 키가 되었구나.”

이제 세리아는 제대로 흐느끼지도 못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눈물을 주르륵 흘려 보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가까스로 짜낸 목소리는, 짤막한 의문만을 토해냈다.

“어, 어머니… 흑, 흐윽…. 어, 어, 어떻게……?”

“쉿.”

하지만 그마저도 잠깐에 불과했다.

여인은 꾸욱, 하고 세리아를 힘 주어 안았다. 어떻게든 이 순간을 오래도록 즐기고 싶다는 듯.

사실 세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의 부재는 어린 아이가 쉽사리 감당할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다. 곪고 곪아서, 흉터조차 남지 않을 만큼 해친 다음에야 잊었다고 되뇌어 왔을 뿐.

되찾은 어머니가 반갑지 않을 리가 없었다.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딸을 두고, 어머니는 눈물을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를 이어갔다.

“우리 딸, 우리 딸… 미안하구나, 너무 오랜 시간 너를 혼자 두었어… 그동안 힘들지는 않았니?”

“흐윽, 흑… 아, 아니… 크흥!”

세리아는 넘쳐 흐르는 눈물 탓에 차마 대답을 짜내기가 힘들었다.

여인은 굳이 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세리아의 마음쯤은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듯, 안타까운 표정으로 손수건을 내밀었을 따름이었다.

세리아가 크흥, 하고 코를 푼 이후에도 여인은 나지막이 말을 이어갔다.

“진심으로 너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단다. 아니, 사실 너뿐만이 아니야… 아버지께서는 무탈하시니?”

그 조곤조곤한 물음에, 세리아의 울음이 우뚝 멎었다.

휘둥그레 뜨인 푸른 눈동자가 제 어머니를 쫓았다. 여인의 낯빛에는 그리운 감정이 여과 없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버림 받았을 텐데.

어떻게 이리도 한 사내를 그리워 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의 깊이도 모녀 간에 유전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이러한 의문들이 지나간 이후에도, 세리아는 우물쭈물하며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유르디나 후작이 어떻게 되었냐고?

가문의 지하 뇌옥에 갇혀 명줄만 부지하고 있는 신세였다. 그래서 세리아는 차라리 어머니가 아버지를 원망하기를 바랐다.

그래야 속이라도 시원할 테니까.

또 한편으로는 제 어머니의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아마 세리아라도 그러지 않았을까.

설령 이안으로부터 버림 받았더라도, 세리아는 끝없이 이안을 그리워할 터였다. 따라서 더더욱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근황을 들은 어머니의 마음이 어떨지 알 것만 같아서.

여인은 이러한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잠시, 여인은 또 다시 슬픈 표정을 지어야 했다.

“미안하구나, 세리아….내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서.”

“……네?”

이는 또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세리아는 깜짝 놀라서 울음을 냉큼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막 재회한 참인데, 또 다시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니.

그렇게 다급한 목소리를 토해내기 전이었다.

꾸욱, 하고 여인의 검지가 세리아의 인중을 덮쳤다. 대화를 나눌 여유조차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제 딸을 앞에 둔 어머니가 짐짓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마지막으로 네게 일러주어야 할 사실이 몇 개 있다. 반드시 명심하렴.”

황급히 입술을 침으로 축이면서, 여인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첫 번째, 절대 누구도 믿지 말아야 한다. 그 누구든… 그리고 또, 이제 곧 네가 사랑하는 남자가 움직일 거야. 계획의 다음 단계가 얼마 남지 않았거든.”

“그게, 무슨 소리…….”

“그때 네가 뒤를 쫓아야 돼. 마지막으로, ‘피 냄새’를 기억해.”

그렇게 멋대로 조언을 마친 여인은 후우, 하고 한숨을 토해내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때까지도 세리아는 얼떨떨한 낯빛을 한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여인은 조용히 제 망막에 창공의 달을 담았다.

“……이제 시간이 다 됐구나.”

무슨 소리냐고, 세리아가 되묻기도 전에.

척추를 찌르르, 울리는 감각에 세리아는 눈을 부릅떴다. 등 뒤를 향한 푸른 눈동자에서 옅은 두려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무언가가 오고 있다.

너무나 명확한 기척이었다. 차라리 거리를 찢고 내달린다는 표현이 옳을 만큼 무시무시한 속도의 진격.

여인 또한 이를 느꼈는지, 끝내 한숨과 함께 슬픈 미소를 지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선물 하나를 주마. 앞으로는, 본능이 널 인도할 거야.”

그리고 세리아의 시선이 다시금 여인을 향할 찰나.

팍, 하고 난데없는 통증이 세리아의 뇌리를 후려쳤다.

손목이었다. 어머니가 그곳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아니, 입술이 아닌가.

날카로운 무언가가 그 사이에서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직후.

“끄으, 으… 아아아아아아악!”

팍, 하고 터져 나오는 핏물과 함께 새하얀 통증이 세리아의 뇌리를 표백시켰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통증이었다. 마치 세포 하나하나가 송곳이 되어 온몸을 찌르는 듯했다.

의식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은 목소리는, 분한 기색이 역력한 사랑하는 사내의 목소리.

“세리아, 세리아!”

이안 선배.

그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세리아는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다만, 착각일까.

흐려지던 시야 사이로 얼핏 검은 진흙 덩어리가 보인 것 같기도 했다.

“크흐, 흐흐… 히히힉! ‘질투’, ‘질투’께서 오시리라……!”

환희로 몸을 떠는 이상한 존재가 말이다.

**

기숙사로 되돌아 온 내 기분은 엉망진창이었다.

결국 또 놓치고 말았다.

세리아를 덮친 괴물은 흡혈귀의 혈족이 분명했다. 정작 덮쳐진 당사자가 기절해 버렸으니, 어쩌다 습격을 당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나마 검공이 함께 가서 다행이었다.

사태가 분초를 다투고 있다는 소리에 검공은 곧장 나를 들쳐메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게 세리아의 행방을 찾다 목도한 것이, 바로 그 광경이었다.

보자마자 죽였어야 했는데.

암흑교단의 끄나풀 따위가 감히 세리아를 건드렸다는 사실이 유독 불쾌했다. 나는 결국 쯧, 하고 혀를 차면서 제복의 외투를 벗어던졌다.

그러자 탁, 하고 내 외투를 낚아 채는 건 핏빛의 실이었다.

"좋아, 보물 획득! 그럼 어디……!"

해맑은 목소리와 함께, 내 외투에 얼굴을 파묻고 코를 킁킁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짜증 어린 한숨을 푹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좀 조용히 못 해? 그러지 않아도 짜증나 죽겠구만."

"후후, 부끄러워 하기는… 하지만 어때, 이러니까 신혼부부 같고 좋… 아아, 그만! 그만! 진짜, 성격도 급하다니깐……!"

내 손이 망설임 없이 도끼 자루를 붙잡자, '탐욕'은 그제야 툴툴거리며 헛소리를 그만두었다.

어쩌다 내가 이딴 꼴을 당하게 된 건지.

그렇게 한숨을 푹 내쉬며 단추를 풀고 있을 때였다.

"그럼 다음은, 진짜로 중요한 정보를 줄게."

내 손길이 우뚝 멎었다.

무어라 내가 의문을 토해내기도 전에, 소녀는 싱긋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이 사태의 원인… '흡혈귀'의 위치 말이야."

이야기가 능선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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