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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38)화 (538/649)

Chapter 538 - 7. 질투는 나의 힘(38)

“싫다.”

약 냄새가 진동하는 공방 안, 대마녀를 찾아온 나와 검공이 들은 첫 마디는 그랬다.

그 단호한 한 마디에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짙은 한숨을 토해냈다. 반면 검공은 울컥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아니, 할망구… 진짜 미쳤소?! 내가 이 나이 먹고 조카 손녀한테 ‘암캐’ 소리까지 들었다니깐!”

어찌나 억울했는지 소녀는 제 가슴을 탁탁 치며 한탄을 토해 내기까지 했다.

그 절절한 호소로 짐작할 수 있듯, 대마녀가 단칼에 거절한 부탁이란 검공과 연관돼 있었다.

이제 슬슬 본체로 돌아가도 되지 않겠느냐는 요구.

나 또한 검공과 나눈 언약이 있어 말을 꺼내 보기는 했지만, 사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당장 대마녀 또한 내가 예상하던 이유를 그대로 읊고 있지 않은가.

“아직 사건은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본체? 넌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 검 미치광이야.”

“아니, 아무리 그래도……!”

“쯧쯧, 그 나이를 먹었으면 인내를 좀 배워야지.”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은 대마녀의 고개가 절레절레 좌우를 왕복했다.

그 눈빛에서 노골적인 감정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한심하다는 시선이었다.

억울해진 검공은 더욱 목청을 높일 뻔했으나, 그보다 대마녀가 더 빨랐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네 본체는 어디 가지 않아… 네놈도 확신이 없으니까 내게 물어본 거겠지? 본체로 돌아가도 될까 싶어서 말이야. 그러니 사건이 끝날 때까지만 좀 참도록.”

대마녀의 설득은 구구절절 옳은 말밖에 없었다.

화가 잔뜩 난 검공조차 기세를 누그러트리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야 했을 만큼.

그럼에도 아직 미련이 남았는지, 검공은 부루퉁한 어조로 툴툴거렸다.

“……내참, 언제까지 이따위 소꿉장난에 어울려 줘야 하는지.”

“너무 실망하지 마시죠, 어르신.”

나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이 유치한 영감님의 심기를 맞춰 주기로 했다.

최소한 계획이 끝날 때까지는 딴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제가 나름 확실한 정보를 잡아왔습니다. 조금만 더 참으시면, 원하시는 대로 본체로 되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흥.”

검공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굳이 내 말에 반론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은근히 나를 치켜세워 주기까지 할 정도였다.

“네놈이 한 말이니 믿어 보마. 나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네,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우리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대마녀는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검공의 속내가 뻔히 보인다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견제하지 않아도 된다, 검 미치광이야.”

“무… 뭣?! 내가 뭘 견제했다 그러시오!”

“내 앞이라고 일부러 두터운 신뢰 관계를 연출할 필요가 없단 소리다. 쯧쯧, 몸뚱어리가 그리 되니 머릿속도 계집아이가 된 건지… 그렇게 안달복달 하지 않아도 빼앗아 가지 않아.”

그러자 검공의 몸이 흠칫 굳었다. 방금 전까지 펄쩍펄쩍 뛰며 대마녀의 말을 부정하려 들던 모습과는 영 딴판인 반응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며 대마녀의 눈치를 살피던 소녀는, 이윽고 조심스러운 반문을 내뱉었다.

“……지, 진짜로?”

순진한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목소리.

설령 농담이었더라도 발언을 철회하기가 난감할 정도의 시선이었다. 단지 문제가 하나 있다면, 상대가 그 ‘대마녀’라는 점이었다.

“당연히 거짓말이지, 여전히 멍청한 놈이로구나. 푸흐흐!”

수백 년을 살아 온 절대자가 구태여 타인의 감정을 살필 리가 없었다.

간단히 소녀의 마음을 짓밟은 대마녀는 한동안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에 격분한 검공은 칼을 뽑아든 채 길길이 날뛰려 들었으나, 나의 필사적인 제지로 두 마스터의 대결은 좀 더 미루어질 수 있었다.

사실 검공도 진짜로 다툴 마음은 없었을 터였다.

그랬다면 진작에 대마녀의 육신을 토막 내고 시작했겠지.

그렇게 검공이 헐떡이며 제 마음을 다스리는 사이.

대마녀의 눈빛이 슬그머니 나를 향했다.

무언가 복잡한 시선이었다.

“으음, 그러니까… 너는…….”

“‘꼬맹이’ 라 불러 주셔도 됩니다. 검공 어르신도 그러시거든요.”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럼에도 대마녀는 무언가 불만족스러운 기색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나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태도였다.

아니, 지난번에도 잘만 ‘꼬맹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대마녀도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는 있는 모양이었다.

이내 쯧, 하고 혀를 차면서 도리질을 치는 걸 보면 말이다.

“쯧, 그래. 그래야겠지. 그런데 꼬맹아, 너 말이다…….”

그렇게 말끝을 흐리며, 대마녀는 유심히 내 낯가죽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의 시선이었다.

“……예전에, 나 만난 적 없냐?”

나는 고개를 갸웃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도리어 맑은 웃음을 터트린 쪽은 내가 아닌 검공이었다.

“풉큭… 아하하하하하! 그, 그게… 그게 무슨 철 지난 작업 말투요? 수백 년이 사니 옆구리가 시리긴 한 모양이구만? 어떻게 새파랗게 어린 아이한테…….”

“무, 무슨 소리를!”

대마녀는 검공의 반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며 열심히 부정하려 했지만, 그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여러모로 의심이 가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다, 단지 초면치고는 어딘가 낯익은 느낌이 들어서… 이상하다 싶어 물어본 거지, 무슨! 무슨 이상한 소리를!”

그러나 오랜만에 주도권을 잡은 검공은 짓궂기 짝이 없었다. 대마녀의 부정에 오히려 좋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기까지 했으니까.

“피, 핑계는… 푸흐흐! 내 진귀한 광경을 다 보는구려. 천하의 대마녀가 미, 미인계를…. 미인계를……?”

그렇게 말을 이어가던 소녀의 목소리가 어느 시점에서 얼어붙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검공은 낯빛을 일그러트리며 곧장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썅! 그렇게까지 해서 우리 제국의 동량을 빼앗아 가야겠소? 절대 안 되지!”

“글쎄, 아니라니깐!”

검공은 이제 내 앞을 가로막고 으르렁거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나는 이쯤에서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정리해 두기로 했다.

“……저, 이제 본론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물론 허가는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혹시라도 다시 말싸움이 날세라 얼른 용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마녀와 검공이 언쟁이 완전히 멈춘 것은, ‘흡혈귀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무렵이었다.

뒤이어 ‘의체’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자 대마녀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내쉬는 모습에서 묘한 쓸쓸함이 느껴졌다.

“그랬군, 어떻게 빠져나왔나 했더니…….”

“모르고 계셨습니까?”

“이제 ‘의체’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아는 자는 얼마 남지 않았어. 성국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 천신쟁이가 지금 저놈의 꼴을 보면 당장 부숴버리려 들 거다.”

나는 그 설명을 들으며 창세신화를 떠올렸다.

천신 아루스는 빛나는 이성을 짓고, 악신 오메로스는 그 그릇이 될 육체를 지어 올렸다.

그래서 육체에는 죄성이 남아 있다.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끊임없이 죄를 범하는 본능이 몸뚱어리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이성을 담을 그릇을 만드는 행위 자체가 악신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뜻이었다.

성국에서 예민한 반응을 보일 만도 했다.

“’대현자’… 그 늙은이가 살아있다면 몰라, 이제 그 기술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만한데.”

‘대현자’라면 이미 은거한 지 10년이 넘은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한때 제국의 마스터였던 그는 후대의 일을 검공에게 맡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공식적으로는 천수가 다했다고 하지만, 그 누가 믿겠는가.

성자보다도 더 오랜 세월을 살아 온 마도의 귀재였는데.

다만 대마녀는 그 기술을 넘겨 준 이에 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고 싶지 않은 듯했다. 사실 고민해 봐도 답이 없는 문제라 더더욱 그럴 수도 있었다.

오히려 대마녀가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런데, 넌 그 정보를 어디서 얻었더냐?”

이미 몇 번 들은 적이 있던 질문이었다.

그리고 함부로 답하기 곤란한 문제이기도 했다.

‘제 친여동생이 암흑교단의 성녀이자 칠죄성 중 ‘탐욕’인데, 내부의 권력 다툼 때문에 제게 첩보를 건네 주기로 했거든요.’

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심지어 대가가 ‘상의 탈의’나 동침이라니.

무슨 오해를 살지 두려울 지경이었다. 대마녀나 검공은 어찌저찌 납득시킨다 쳐도, 성국에서 머물고 있는 성녀의 귀에 닿으면 등짝이 찢겨 나갈 때까지 얻어맞아야 하리라.

이것이 유부남의 슬픔인가.

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 한 방울을 느끼며,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그, 자세히 말씀드리긴 힘들지만…….”

“그럼 됐다.”

하지만 변명을 이어가기도 전에, 대마녀가 상상 이상으로 시원스러운 반응을 보여 버려서.

나는 얼떨떨한 눈빛을 하고 말았다.

“왜 그러냐?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거 아니냐?”

“그, 그렇긴 합니다만…….”

나야 좋긴 한데.

내가 묘한 기시감에 시달리고 있자, 검공이 떨떠름한 목소리를 얹었다.

“할망구, 진짜 노망 났소? 당신이 언제부터 그렇게 사람을 잘 믿었다고?”

그 말대로였다.

나와 대마녀는 첫 만남을 가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이러한 마당에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왔는데, 그 출처조차 캐묻지 않다니.

보통의 신뢰 관계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대마녀는 삐쭉 입술을 내밀며 툴툴거릴 따름이었다.

“……흥, 내 마음이다.”

흐음, 하고 팔짱을 낀 검공의 심기가 실시간으로 불편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또 다시 다툼이 시작될 듯한 분위기.

다행스럽게도 대마녀는 내가 나서기 전에 이미 결론을 내린 듯했다.

“너, 내일부터 나랑 함께 다니자.”

당연히 그 '너'는 검공이 아니라서, 소녀의 낯빛이 일그러질 때까지는 얼마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봐야 대마녀의 언변을 이겨낼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검공에게 시간이 주어진 만큼, 대마녀 또한 내 시간을 공유해야 하지 않느냐는 논지의 설득에 소녀는 곧 풀이 죽고 말았다.

반박할 건덕지가 없는 정론이었으니까.

남은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흐에……."

그 희미한 신음 소리에, 이곳에 자리한 모두의 시선이 움직였다.

방 한 켠에 마련된 침대 위에는 아리따운 소녀 하나가 잠들어 있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혼절해' 있다는 표현이 옳겠지.

팽팽 돌고 있는 두 눈만 보아도 알 만했다.

내 후배 세리아 유르디나였다.

옅은 원망을 담은 눈빛을 보내자, 검공은 멋쩍은 헛기침을 흘렸다.

"흠흠, 설마 그렇게 다짜고짜 달려들 줄은……."

검공과 달리, 대마녀는 좀 더 다른 분야에 관심이 가는 듯했다.

한참이나 세리아를 살펴보던 대마녀의 입에서 후우, 하고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저 꼬맹이도 데려가자꾸나."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검공은 투덜대면서도 일단 나와 대마녀의 동행을 허락해 주기로 했다.

단, 오늘 밤에 대련을 한다는 조건 하에.

그렇게 내가 건물을 나섰을 무렵이었다.

몸소 나를 마중하던 대마녀의 눈동자가 흘깃 어딘가를 향했다.

"무슨 일입니까?"

"흐음… 아무것도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쯤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검공에게 세리아를 맡긴 후, 나는 홀로 대마녀가 슬쩍 시선을 던졌던 자리를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수풀 속에 미처 숨기지 못한 앙증맞은 엉덩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무어라 할까.

끓어오르는 내면의 목소리를 참지 못한 내 손이 짜악, 하고 그 엉덩이를 후려쳤다.

그러자 수풀 속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고깔모자가 하나.

"히이이이이익?! 아니, 어떤 미친 새끼가… 또 너냐?!"

'엘시 선배'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지당한 의문을 내뱉었다.

"뭐해요?"

"당연히, 그… 가, 감시를……."

그러면서 슬쩍 말끝을 흐리는 폼이 범상치 않았다.

이윽고 내 눈이 '엘시 선배'가 바라보던 방향을 훑었다. 그곳에는, 익숙한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마녀의 거처.

나는 호오, 하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제의 정이 무섭긴 하군요."

"무, 무슨 소리를… 내가 미쳤다고 그따위 할망구가 그립겠냐?!"

주먹을 불끈 쥐며 외치는 그 목소리에 옅은 떨림이 묻어 나오고 있어서, 나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엘시 선배는 솔직하지 못하다는 점.

나는 대답 대신 엘시 선배의 목덜미를 붙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그럼 한 번 시험해 봅시다."

"무슨 시험을… 야, 야! 이거 안 놔?!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어디기는.

마침 '엘시 선배'에게 물어보고 싶은 내용이 있던 참이었다.

이제 '사제 상봉'을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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