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40 - 7. 질투는 나의 힘(40)
모든 사회는 맥락을 내포하고 있다.
단순한 조우부터 시작해서, 대화나 심도 깊은 논의에 이르기까지 맥락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회 생활에서 ‘맥락’을 읽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당연했다.
다만 비극의 씨앗은, 모든 이들이 놓인 맥락이 제각각이라는 점이었다.
이러한 차이는 의사소통에서 미묘한 균열을 일으킨다. 동시대를 살아 온 이들조차 이를 피할 수 없을진대, 하물며 별개의 시간대를 살다 온 이들은 어떻겠는가.
미래에서 온 엘시 선배의 ‘급발진’에도 알지 못할 사정이 있을 터였다.
문제가 있다면, 과연 상대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냐는 점뿐.
대마녀의 반응은 예상을 한 치도 빗겨나가지 않았다.
“……이게 무슨 헛소리냐?”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던진 말이었다.
대마녀는 다소 짜증이 난 표정으로 널찍한 단 위에 누운 채였다. 뺨을 괴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숨김 없는 의문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엘시 선배’는 입을 다물고 애꿎은 마룻바닥만 툭툭 두드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얼마 전까지 대마녀의 멱살을 붙들고 따지고 들던 패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심지어 그때 외쳤던 말을 추궁받고 있는 와중인데도.
‘어떻게, 당신이 날 못 알아볼 수 있어!’
엘시 선배는 그렇게 일갈했고, 대마녀는 이에 따른 마땅한 해명을 요구하고 있는 도중이었다.
결국 뒷수습은 나의 몫인가.
항상 맡아왔던 역할이라 딱히 거부감은 없었다. 다만 무슨 설명을 덧붙여야 할지 난감해서 머리가 지끈거렸을 뿐.
나는 최대한 납득이 가능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려고 했다.
“엘시 선배가 최근 큰 충격을 받은 탓에, 정신적인 문제가…….”
“재미있구나. 요즘은 정신병이 생기면 새로운 체계의 마법도 다룰 수 있나 보지?”
그것도 내 독자적인 양식을.
대마녀가 굳이 덧붙이지는 않았으나, 나를 째려보는 눈빛에서 그러한 의문이 읽히고 있었다. 당혹감으로 달아오른 체온 탓에 내 이마는 이미 땀투성이였다.
단순히 ‘정신병’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절묘했다.
엘시 선배가 대마녀의 결계를 풀어낸 방식, 더불어 가르친 적도 없는 비전을 지니고 있는 나까지.
이쯤 되면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 판단해도 무방했다. 대마녀 또한 예외는 아니었던지, 나를 노려보는 시선이 점점 더 매서워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고심을 반복했다.
이대로 진실을 털어놓아야 할까? 하지만 이토록 허황된 이야기를 어떻게 납득시켜야 한단 말인가.
가능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이 모든 수수께끼를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뿐이었으니까.
다만 ‘미래에서 온 제자들’이라니.
소설 제목으로 써먹어도 작가의 작명 감각을 의심케 할 글귀였다. 대마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내가 이처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쉽사리 대답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흥, 제 술식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지?”
엘시 선배는 입술을 삐쭉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누가 보아도 비꼬는 어조라서, 나는 눈을 부릅뜨고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제발 그만하라는 신호였다.
실제로 대마녀는 흐응, 하고 곰방대를 뻑뻑 피워대고 있는 참이었다. 아마도 심기가 더욱 불편해졌다는 뜻이리라.
그럼에도 엘시 선배의 폭주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보란 듯이 털을 바짝 곤두세운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정도였다. 마치 부모에게 반항하는 사춘기 소녀처럼.
“당신만의 비전이잖아? 당신이 아닌 누가 전수해 줄 수 있다는 건데?”
“그러니까, 난 비전을 전수한 적이 없대도…….”
“그럼 신경 꺼!”
자세를 바짝 낮추며, 악문 잇새로 흘려 보낸 말이었다.
이쯤 되니 대마녀는 제대로 된 언어조차 토해내지 못했다. 그저 황당하다는 낯빛으로 허, 하고 헛웃음을 흘릴 뿐.
그러든 말든, 엘시 선배는 여전히 제멋대로였다.
“어차피 난 혼자였으니까… 앞으로도 혼자 해내면 돼.”
“아니, 꼬마야. 아무래도 네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만, 추궁하는 쪽은 어디까지나 나…….”
“흥!”
엘시 선배는 대마녀의 주장을 베에, 하고 혀를 한 번 내밀며 일축했다.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는 자세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일순 내 기억 속의 엘시 선배가 되돌아왔나 싶을 정도로.
결국 나와 대마녀는 한참 동안이나 입술을 떼지 못했다.
엘시 선배가 또박또박 걸음을 옮겨 그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도.
끝내 정적에 잠긴 방 안을 일깨우는 것은, 대마녀의 나지막한 한숨 소리뿐.
어느덧 대마녀는 한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보다 잦은 간격으로 내뿜어지는 담배 연기가 대마녀의 심정을 대변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했다.
나는 조심스레 ‘엘시 선배’를 변호해 보기로 했다.
“그, 이상하네요… 원래 굉장히 어른스러운 선배인데, 왜 갑자기 저러는지…….”
“낸들 알겠느냐?”
피로마저 섞인 음색이었다.
그 반문에 나는 곧장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야, 싫다는 엘시 선배를 억지로 데려온 쪽은 내가 아닌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대마녀는 답답한 심정을 담아 후우, 하고 짙은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이것이 바로 ‘쾌락 없는 책임’인가.
나는 어쩐지 대마녀가 불쌍하다 느꼈다.
“그나저나, 실력 하나는 확실하구나. 이 건물은 진입뿐만 아니라 탈출도 불가능한데… 벌써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찾아올까요?”
“됐다.”
심드렁한 목소리를 내뱉으며, 대마녀는 연녹색 눈동자를 내게로 향했다.
“그보다 중요한 일이 남아있지 않느냐? 내 못난 언니를 찾기 직전이거늘… 다만, 출처도 없는 정보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 좀 걸리는구나.”
옳은 말이었다.
비록 내가 ‘탐욕’으로부터 정보를 얻고 있다고 하지만, 암흑교단의 최고 간부 중 하나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보다 믿을 만한 정보원이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아쉬운 마음을 곱씹던 내 눈이 무심코 엘시 선배가 서 있던 자리를 훑었다.
그리고 보았다.
팔랑거리며 마룻바닥 위를 쓸어내리는 몇 장의 종이 뭉치를.
나는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어 곧장 서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품속에 고이 접어두었던 쪽지 한 장이 회오리치며 주의의 서류를 보기 좋게 모으기 시작했다.
엘시 선배가 전해 두었던 정보.
과연 엘시 선배는 ‘엘시 선배’였다. 화가 난 와중에도 제 성과를 남김없이 건네고 간 것이다.
살짝 의아한 낯빛을 하고 있는 대마녀를 향해, 나는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와 산보나 한 번 나가 보시겠습니까?”
그러자 대마녀는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흥, 철 지난 작업 말투지만… 좋다. 한 번 넘어가 주마.”
픽,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그렇게 답했다.
아무래도 검공에게 들었던 말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듯했다.
은근히 소심한 여인이었다.
**
슬슬 오후의 뜨거운 태양이 저물 무렵.
건물을 나선 나는 털레털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직 만나야 할 사람이 몇 사람 남아 있었던 탓이었다.
당장 오늘 밤에도 약속이 하나 있지 않은가.
또, 혼절했던 내 후배들이 신경 쓰이기도 했고.
이미 몇 년이나 걸어 왔던 길이었다. 특히 내 목적지인 ‘신전’은 근래 들어 잦은 신세를 진 곳이었기 때문에, 그곳을 찾아가는 내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나를 향해 쏟아지는 지대한 관심뿐이었다.
그동안 검공이 막아 주고 있었지만, 흡혈귀의 결계가 아카데미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했다. 지금도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눈치를 보며 고백을 하려는 학생들이 산더미였다.
반대로 내게 질시의 시선을 보내거나.
찬사와 비난 사이, 이미 대중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게 된 나는 마음 편히 귀를 닫기로 했다.
어차피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아무리 나라도 비난의 말에는 상처를 입기 마련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들의 본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았으니까.
그나마 신전에서는 이러한 걱정을 좀 덜어낼 수 있었다.
신성력의 밀도가 가장 높은 신전은 자연스레 마력에 저항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악신 오메로스의 힘에 대한 저항력이 대단했다.
그 내부에서는 애증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으리라.
하지만 신전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광경은, 또 다른 의미에서 내 뇌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도착하자마자 황녀의 병실을 찾아간 직후였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잃고 실의에 빠진 아이는 홀로 아카데미를 찾아왔죠. 그래서 아카데미 1학년 대표인 제가, 이 불쌍한 아이를 돌봐 주기로 한 거예요!”
그 우쭐한 목소리의 주인은 금세 짐작이 갔다.
시엔이구나.
심적인 충격이 대단했을 텐데, 벌써 활기 찬 기색이 느껴져서 다행이었다. 나는 그렇게 쓴웃음을 머금으며 문을 살짝 밀어 내부의 풍경을 구경했다.
안에는 의외로 많은 인원이 서 있었다.
황녀를 비롯해서, 차가운 인상의 미녀와 은발 은안(銀眼)의 여인까지.
시엔과 아이리스, 그리고 시에네 선배였다.
시에네 선배는 오늘도 멍청해 보일 만큼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슬슬 저 넘치는 자신감의 근원이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후후, 마음도 따뜻하셔라… 자세히 보니 시엔 전하를 똑 닮기도 했네요. 누가 보면 진짜 자매인 줄 알겠어요.”
그러면서 슬쩍 호선을 그리는 눈꼬리는 일견 교활해 보이기도, 또 한편으로는 별다른 속셈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흔해빠진 감상을 내뱉는 시에네 선배와 달리 아이리스 황녀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단지 그 서리와 같은 푸른 눈동자를 은은한 경계의 빛으로 빛냈을 뿐.
내가 끼어들기에는 부적절한 시점인가.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던 찰나였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시엔과 말을 주고받기 시작한 것은.
“앗, 그러고 보니 진짜 그렇네요?! 어쩌면 우리는 인연일지도 모르겠어요!”
“그, 그렇네요… 언니.”
그 소녀스러운 말투에 내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음색인데.
나와 소녀의 눈이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넘쳐 흐르는 암청빛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는 과연 시엔을 닮아 있었다. 수치심으로 살짝 이슬이 맺힌 눈동자가 뭇 사내의 가슴을 설레게 할 만큼 사랑스러웠다.
오직 나를 제외하고.
소녀는 내 속도 모르고 반색을 하며 신이 나 외치고 있었다.
“마침 잘 됐다, 이안! 네가 와서 설명을 좀……!”
하지만 나는 그만 낯빛이 창백해져서 뒷걸음질을 쳤을 따름이었다.
소녀의 정체를 깨달은 내 눈동자에 찔끔 눈물이 맺혔다.
“어, 어르신… 설마.”
그새 건너서는 안 될 강을 건넜다는 말인가.
소녀는 내 반응이 의외였는지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하다가, 이윽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외쳤다.
“……아니라고!”
그 새된 목소리마저 소녀답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