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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41)화 (541/649)

Chapter 541 - 7. 질투는 나의 힘(41) + 이모티콘 재투표!

손짓과 발짓을 총동원한 검공의 설득 끝에, 나는 가까스로 오해를 풀 수 있었다.

그제야 내 손이 이마에 맺힌 땅방울을 토해냈다.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나는 신뢰를 가득 담은 목소리를 속삭였다.

“……믿고 있었습니다, 어르신.”

검공은 욱해서 자그마한 주먹을 꼬나쥐었지만, 차마 욕설을 내뱉지는 못했다.

단지 부르르 몸을 떨기만 했을 뿐.

천하의 검공이라도 제 조카 손녀가 둘이나 지켜보고 있는 마당이었다. 이처럼 자그마한 소녀의 몸이 되었다고 어찌 고백할 수 있겠는가.

다만 지나치게 우리 둘만 속삭임을 나누었던 탓일까.

어느덧 병실의 분위기는 미묘해져 있었다. 특히 시엔의 낯빛이 내 본능을 자꾸만 건드렸다.

싱긋, 미소를 머금은 입꼬리와 달리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이미 수없이 본 얼굴이었다. 이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을 함부로 자극해서는 안 됐다.

예를 들어 세리아라든가.

혹은 성녀라든가.

악몽이 뇌리를 스친 나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어떻게든 나와 검공에게 몰린 주위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

“아이리스 전하, 먼저 인사를 드리지 못한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를…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그러면서 슬쩍 무릎을 굽히려던 나를 제지한 이는 다름 아닌 아이리스였다.

기품 있게 손을 들어 나를 멈춘 여인의 입에서, 이윽고 뼈 있는 농담이 흘러 나왔다.

“그대가 예를 안다니 다행이군요, 이안 페르쿠스.”

“제국의 귀족이니까요.”

“진정한 귀족은 아리따운 숙녀를 그리 매몰차게 뿌리치지 않는답니다.”

탁, 하고 쥘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리며 내뱉은 말이었다.

비록 입가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표정이 어쩐지 짐작이 갔다.

필시 싸늘한 미소를 머금고 있겠지.

아무리 봐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결국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설마, 지난번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고 계십니까?”

“흥.”

아이리스 황녀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지난번 일’.

며칠 전 실종자를 조사하다 흡혈귀의 권속을 마주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당시 나는 ‘아델라’라는 실종자를 조사하다가 전투를 벌였는데, 그 끝에서 아이리스 황녀가 다음과 같은 제안을 건넨 적이 있었다.

나와 함께할 영광을 주겠노라고.

당연히 권력 따위에는 관심이 없던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애초에 암흑교단은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가면서 상대할 수 있는 적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때 충격을 꽤 받은 눈치더니만.

아무래도 그날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를 솔직히 고백하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이럴 때는 주로 그 심복이 나서 간지러운 곳을 긁어 주는 법.

그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여인은 이미 나와 안면이 있었다.

어느덧 슬그머니 내 옆에 선 시에네 선배는, 이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에요, 알렌 할베르트 경… 그런데 왜 제 안부는 묻지 않죠?”

“그 ‘알렌 할베르트’ 경한테 물어 보시죠.”

“흑흑, 매정하네요… 살짝 상처 받을 뻔했어요. 처형 될 사람한테 이래도 되나요? 리온 아인하트 경.”

“아니, 그러니까… 후우.”

결국 나는 말을 말자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언제나 그렇듯 두통을 불러오는 재주가 있는 여인이었다. 특히 내게 은근한 친밀감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제일 껄끄러웠다.

이대로 가다가는 몇 시간이고 이곳에 붙잡혀 있어야 하리라.

최대한 시간을 아끼기 위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래서, 다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러자 좌중의 시선이 다시금 내게로 집중됐다.

나는 그중에서도 두 명의 눈빛에 주목했다. 시에네 선배는 무슨 소리냐는 듯 눈만 깜박이고 있었고, 아이리스 황녀는 속내를 읽기 힘들 만큼 침착히 가라앉은 눈을 하고 있었다.

내 황금빛 눈동자가 두 여인의 눈을 차례로 마주했다.

“이곳으로 찾아온 까닭이 있으신 것 아닙니까?”

“후후,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데… 아이리스 전하께서는 시엔 전하의 언니…….”

“저 바쁩니다.”

차분한 어조였지만, 내 목소리에는 은근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당연히 책상물림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시종일관 희희낙락하던 시에네 선배의 낯빛이 창백해지지 않았는가.

분한 기색을 감추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흰자위와의 경계가 불분명한 동공에서 이글거리는 불길이 치솟았다.

“끄, 으… 감히 황족과 알펜하우저를 위협하고도……!”

“그만.”

탁, 하고 쥘부채를 접는 소리와 함께.

나는 곧장 살기를 거두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서 시선을 돌리며 시치미를 떼자, 나를 제지한 장본인은 가증스럽다는 눈빛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리스 황녀였다.

“피차 시간이 아까우니 결론만 말하죠. 이안 페르쿠스, 다시 한 번 기회를 드리겠어요.”

“무슨 기회 말입니까?”

“우리와 함께할 기회.”

또 그 소리인가.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시엔을 바라보았다. 째릿, 하고 옆에 선 검공을 노려보고 있던 소녀는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참고로 검공은 식은땀을 흘리며 죽을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기야, 조카손녀한테 ‘암캐’ 취급을 받는 경험이 유쾌할 리는 없을 테지.

이러한 잡념을 일깨우는 건 시엔의 자그마한 도리질이었다.

당장은 결단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내가 제일 신뢰하는 참모인 레토가 없었고, 따라서 다음으로 머리가 좋은 시엔의 뜻을 따르는 편이 최선이었다.

나는 이내 태연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이전에도 답을 한 문제가 아닙니까? 저는 그저 제국의 검이자 방패일 뿐입니다. 내부를 향하는 정쟁에는 관심 없…….”

“’황실의 비원’을 이룰 수 있는 기회라 해도?”

허를 찌르고 들어오는 반문이었다.

이윽고 내 말이 뚝 끊기자 아이리스는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비로소 올바른 관계의 정립이 끝났다는 듯.

“비단 권력이나 명예의 문제가 아니에요. 위대한 제국의 첫 발판이 될 수도 있는 업적이죠.”

“…….도대체 그 ‘황실의 비원’이 뭡니까?”

내 나지막한 물음에 아이리스 황녀는 훗, 하고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래도 정보의 우위를 확보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당장 내 곁에 서 있는 소녀 중 하나가 제국 황실의 큰어른이었음에도 말이다.

“알고 싶나요? 그렇다면 우선 협력을 약속하세요.”

“시엔 전하께 물어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자세한 내용은 그 누구도 몰라요. 심지어 황제 폐하조차도… 최소한 이 비원에 한해서는!”

의외로 절절한 감정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입술까지 깨물어 가는 그 모습에서 은근한 집착이 드러나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노골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 ‘비원’을 향한 아이리스의 열망은 진짜배기였다.

여인의 망막 위에서 푸르게 타는 불길을 보라.

누구라도 나와 같은 결론을 내릴 터였다.

아이리스 황녀는 드물게도 달아오른 목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흥분해서 걸음을 내딛는 그 창백한 낯빛이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안 페르쿠스, 당신은 단지 시엔을 대마녀의 제자로 만들어 주면 돼요… 아니, 그 누구라도! 물론, 당신에게도 간단한 일은 아니겠죠. 하지만 나와 손을 잡는다면 어떨까요?”

“저, 그게…….”

“사실 용의 피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죠! 알고 있나요?! 당신이 내 손을 잡는다면, 시엔을 대마녀의 제자로 만들어 줄게요! 당신 혼자라면 몰라도, 우리 둘이라면……!”

“……황녀 전하.”

내가 괴로운 신음을 토해내며 고개를 돌린 건 그때였다.

그러자 아이리스 황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였다. 결국 문제 상황을 짚어 준 이는 다시금 싸늘한 미소를 머금은 시엔이었다.

“언니, 너무 가깝잖아요… 누가 보면 오해하겠어요?”

얼떨떨해진 푸른 눈동자가 시엔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말대로였다.

열의에 젖어 걸음을 내딛던 아이리스 황녀와 나의 거리는 어느덧 너무 가까워져 있었다. 서로 숨결이 뒤섞일 듯한 거리, 심지어 여인은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쥐고 있기까지 한 판이었다.

뒤늦게 이를 깨달은 황녀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악!”

그러면서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치기까지.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놀란 가슴을 가라앉혔다. 어딜 봐도 피해자는 나인데, 왜 나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지.

그래도 아이리스의 당황은 길지 않았다.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신색을 가다듬은 황녀는 다시 도도한 말투를 되찾았다.

“하, 하여튼! 그러니까, 너른 마음으로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에요. 이 아이리스가 두 번이나 제의한 상대는 몇 없답니다? 누대의 영광으로 아세요.”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연달은 설득에도 내가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아이리스 황녀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이번에도 거절할 셈은 아니겠죠? 잘 생각하세요, 이안 페르쿠스… 내 힘이 없으면 당신 혼자서 시엔을 대마녀의 제자로 만들 수는……!”

“내 제자 말이더냐?”

단 한 마디.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 병실 안의 공기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넋 나간 시선이 그 진원지를 향하기 시작했다. 그 무수한 동공들이 주목한 곳은, 병실의 천장 위.

대리석 위에 소녀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시큰둥한 얼굴을 한 채, 턱을 괴고 있는 소녀의 눈가에는 짙은 음영이 배어 있었다. 피로와 고독이 묻어나는 녹빛의 눈동자는 또 어떠한가.

하아암, 하고 하품을 내쉬는 소리조차 권태롭기 짝이 없었다.

마치 홀로 중력이 역전된 세계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

아니, 오히려 나를 비롯한 모두가 잘못된 법칙 위에 서 있는 듯한 감각.

그만한 중량감이 저 소녀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이만한 존재감을 지닐 수 있는 인물은, 온 대륙을 통틀어도 손에 꼽을 수 있으리라.

새파랗게 질린 아이리스 황녀의 목소리가 그중 하나를 호명했다.

“대, 대마녀…….”

탁, 하고 대마녀가 손가락을 퉁기는 동시에.

시야가 역전되며 땅 위에 서 있던 모든 이들이 천장으로 쏟아져 내렸다. 가구들은 그대로 고정되어 있는데, 인간들만이 떨어져 내리는 진풍경.

이 기묘한 현상에 당황하지 않는 자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제국의 검공, 소녀의 껍데기를 쓴 대륙 최강의 검수만이 시엔을 품에 안고 소리 없이 착지했을 따름이었다.

그 외의 인물들은 모두 비명을 내지르며 천장 위를 나뒹굴어야 했다.

아니, 이제는 ‘천장’이 아니라 ‘바닥’이라고 해야 할까.

그나마 나 정도가 마지막 순간에 낙법을 취했을 정도였다. 어느덧 내 품에는 무심코 껴안은 아이리스 황녀와 시에네 선배가 안겨 있었다.

두 사람 다 새파래진 낯빛이었지만.

이처럼 놀라운 재주를 부렸음에도 대마녀는 여전히 심드렁한 기색이었다.

“모처럼 산보를 갈까 싶어 기다리고 있었는데… 꼬맹아, 벌써 제자를 고르고 있었더냐?”

그 말에 처음으로 반응한 건 아이리스 황녀였다.

“제, 제자 선발이라니……?”

어찌나 놀랐는지 헐떡이는 숨소리가 무척 거칠었다. 부풀었다 내려앉기를 반복하는 그 흉부가 유독 눈에 들어왔지만, 나는 애써 사내의 본능을 죽이며 황녀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꺄악! 리안 베릴루드, 왜 나만……!”

물론 시에네 선배는 그냥 내동댕이쳐 버리고 말았다.

짤막한 원망의 소리가 들려왔으나, 나는 이를 깔끔히 무시하며 숨을 골랐다.

나를 대신해 설명에 나선 쪽은 대마녀였다.

“용의 딸아, 몰랐느냐? 이 꼬맹이가 한동안 내 수발을 들어 주기로 했다.”

“대, 대리인이라 하심은……?”

“제자 선발 같이 까다로운 문제는, 이 꼬맹이한테 문의하란 뜻이지.”

그렇게 제 할 말을 마친 대마녀는 느긋이 몸을 일으켰다.

애초에 더는 입을 열 필요가 없었다. 눈짓 한 번 정도면 내게 의사를 전달하기에 충분했으니까.

슬슬 떠나자는 뜻이었다.

나는 간단한 목례로 동의를 표했고, 그제야 대마녀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공간이 다시금 반전한 건 그 직후였다.

방금 전과는 달리 사람들은 그대로 있는데, 천장과 마룻바닥만이 뒤집히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침대가 있던 자리에 널브러져 있던 이들만이 가구에 치이며 짤막한 비명을 내질렀을 뿐이었다.

아이리스 황녀는 아직까지도 넋을 놓고 있었다. 나는 제국의 귀족으로서 예우를 다하기로 했다.

"그럼, 이렇게 되었으니… 저는 이만."

그렇게 내가 첫 걸음을 떼자마자.

"……잠깐!"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가, 여인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러자 내 눈이 흘깃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아이리스 황녀가 보이고 있었다.

질끈 감은 눈가에 맺힌 이슬이 그 증거였다.

"다, 다 말하면 되잖아요……."

그 항복 선언에도 나는 한참이나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침묵을 지키기를 얼마쯤.

나는 잘 모르겠다는 어조로 반문했다.

"……뭘 말입니까?"

"전부 다!"

팍, 하고 손으로 마룻바닥을 내리치며 황녀가 부르짖었다.

"전부 다 말해 주면 되잖아요… '황실의 비원'이든 뭐든! 그, 그러니까 제발……!"

도와 달라고.

황녀는 말했고, 나는 흐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일단 들어 보고."

손해를 보는 쪽은, 언제나 아쉬운 사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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