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42 - 7. 질투는 나의 힘(42)
드높은 신전의 정상에는 종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는 천신 아루스의 은총이 하늘부터 땅끝까지 퍼지고 있음을 상징했다. 그 소리의 진원지를 찾기 위해 종탑을 우러러보아야 하는 인간의 삶은, 얼마나 사소하고 보잘것없는가.
이를 위해 신전은 언제나 웅장하고 장엄한 몸집을 뽐낸다.
신 앞에서 인간이 겸허할 수 있도록.
허나 이러한 종탑조차 한낱 인간의 피조물에 불과했다. 그 신성한 꼭대기를 넘보는 자들은 늘 존재해 왔다.
실제로 몇몇 권력자들은 이곳을 독차지하기도 했고.
그중 하나가 지금 내 앞에 서 있었다.
제국의 제2황녀 아이리스.
서늘한 은빛 머리카락이 창공의 바람결에 나부꼈다. 나를 등진 채 난간 너머의 풍경을 응시하는 여인의 눈빛은 깊이 침잠해 있었다.
종지기를 제외한 지극히 일부만이 올라설 수 있는 장소였다. 그럼에도 이곳에 올라 지상을 오시(傲視)하는 그 시선에서는 한 점의 어색함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어둑해지는 대지에 별빛이 총총히 스며들 무렵이었다. 이대로 완연한 밤이 찾아온다면, 세상은 두 개의 밤하늘로 밝게 빛나리라.
물론 그토록 낭만적인 광경을 즐길 여유는 없었다.
우리 둘이 이곳에 오른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까.
아이리스 황녀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숨결이 터져 나왔다.
“……종탑을 오른 적은 처음인가요?”
“신전에 억지를 부리는 취미는 없어서 말입니다.”
“의외네요.”
내 시큰둥한 반응에도 아이리스의 낯빛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미 ‘이안 페르쿠스’라는 인간을 재단하기를 포기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자라 불리는 제국의 황제조차 날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마당이었다.
아이리스 황녀라고 해서 나를 건드릴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여인의 모든 실책은 그 사실로부터 발원하고 있었다.
일개 자작가의 차남을 권력으로 찍어 누를 수 없다는 현실.
아이리스는 이제야 나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를 터득했는지도 몰랐다.
그저 포기하고, 속 모를 소리나 떠드는 수밖에.
여태껏 날 제어할 수 있었던 인물은 단 둘뿐이었다.
레토와 성녀.
델핀 선배는 애초에 나를 제어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니 제외였다.
“성녀를 연인으로 두고 있다는 풍문이 돌던데요. 연인이 밀회를 가지기에 이보다 좋은 장소는 없을 텐데…….”
“오해입니다.”
나와 성녀는 ‘연인’이 아니라 ‘부부’였으니까.
천신도 내 진술을 탓하지는 못할 터였다.
물론 아이리스 황녀는 딱히 내 말을 신뢰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단지 코웃음을 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뿐.
“당신도 출세할 욕심이 있다면, 높은 곳에 오르는 걸 즐기는 편이 좋아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권력자는 늘 모든 것을 내려다보아야 하거든요. 모든 인간들이 점으로 수렴하면, 남는 것은 선과 덩어리뿐이거든요..”
그러면서 아이리스 황녀는 서서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팔짱을 끼며 난간에 몸을 기대는 폼이 다소 편안해 보였다. 이곳에는 신경 써야 할 타인의 시선 따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착, 하고 펼쳐진 쥘부채가 황녀의 입을 가렸다.
“한 번도 꿈꾼 적이 없나요? 그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 온 세상을 내려다보는 꿈을…….”
“그것이 ‘황실의 비원’과 관련이 있습니까?”
“물론이죠.”
이제야 본론이었다.
나는 침묵을 지키며 아이리스를 응시했다.
어서 이야기해 보라는 뜻이었다.
이를 몰라 볼 만큼 아이리스 황녀는 눈치 없는 인물이 아니었다.
흠흠, 하고 짐짓 무게를 잡은 아이리스 황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이안 페르쿠스, 당신은 ‘마스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
난데없는 물음에 나는 잠시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마스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니.
그 이름에 담긴 의미와 맥락이 너무나도 많아서, 나는 한동안 고개를 갸웃하다가 입을 열어야 했다.
“그야, 무인에게 있어 꿈의 경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마스터를 어떻게 생각할 것 같나요?”
내가 당신의 속마음을 어찌 알겠느냐고, 헛웃음을 터트리려던 찰나.
문득 뇌리를 스치는 말이 있었다.
‘권력자의 시선’.
“혹은 내가 아니라, 황제 폐하께서는? 성국의 교황청은? 남부 열왕국의 원탁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무심코 얼굴을 와락 구기며 그렇게 물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불경죄’로 처벌되어도 할 말이 없었다. 각국의 최고 권력들이 마스터를 어떻게 생각하냐니.
마스터는 각국의 상징이자 뿌리였다.
대체 불가능한 전력이었고, 그 자체로 하나의 전략 병기나 다름없는 존재들이 아닌가.
이들이 없다면 삼국이 대륙의 주도권을 쥐는 일은 불가능했을 터였다.
심지어 대륙에 현존하는 마스터 셋은 각국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황실 출신인 검공이나 사제 출신인 성자는 물론이고, 대마녀 또한 대수림에 흡혈귀를 봉인하며 남부 열왕국 탄생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처럼 위대한 인물들을 모욕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내가 욱해서 무어라 한 마디라도 더 얹고자 했을 때였다.
아이리스 황녀는 착, 하고 쥘부채를 접으며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러한 반응쯤이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어떻게 마스터를 의심할 수 있냐고요?”
“그, 뭐… 검공께서도 황실의 큰어른이 아니십니까.”
“그야 그렇죠. ‘다행스럽게도’, 말이에요.”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나와 달리, 아이리스 황녀의 태도는 여유롭기만 했다.
“만일 큰할아버지께서 마스터가 아니었다면요? 혹은, 또 삼국이 아닌 마스터가 나타난다면? 새로 탄생한 마스터가 제국에 원한을 지니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뭐, 그야…….”
“너무 불확실해요.”
단언이었다.
내 의견 따위는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는 선언.
불쾌해야 정상이었지만, 나는 어쩐지 그 주장에 반박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제국에는 억 단위의 인구가 살고 있어요. 이 대국의 운명이, 고작 한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 예측도, 제어도 불가능한 변수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끔찍하고 이상한지 생각해 본 적 없나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소리였다.
얼마 전까지 시골 자작가의 차남에 불과했던 나였다. ‘마스터’니, ‘국가 권력’이니 하는 이야기들은 별세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내가 제국의 황제라면 어떨까.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대륙에 또 다른 마스터가 탄생할 조짐은 보이지 않았고, 삼국의 마스터들은 각자의 조국을 지키며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이 없을 뿐.
그럼에도 나는 다급히 반론을 내세웠다.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마스터’가 존재한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고, 이러한 존재의 탄생을 근원적으로 막을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 한……!”
“반대로 생각해 보세요.”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한 걸음.
어느덧 나와 아이리스 황녀의 거리는 꽤 가까워져 있었다. 새삼스레 내 망막 위로 여인의 푸른 눈동자가 맺혔다.
이글거리는 불길.
그 감정을 무어라 정의할 수 있을까.
황녀는 속삭였다.
“마스터의 탄생을 봉쇄하는 건 불가능해요. 하지만, 마스터를 양산할 수 있다면……?”
그리고 내 숨이 멎었다.
부릅떠진 눈동자가 황녀를 향했다. 내 귓가에 다가선 여인의 입술은 달뜬 호선을 머금고 있었다.
“그때도 우리 제국이 고작 마스터 하나에 벌벌 떨어야 할까요? 그리고, 감히 어느 나라가 우리 제국의 말에 거역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만, 그건…….”
“불가능하다고요?”
고막을 간질거리는 달콤한 숨소리와 함께, 아이리스는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비로소 여인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모두가 그랬죠. 실현 불가능한 계획이라고… 선대께서도, 아바마마께서도, 심지어는 검공께서도 그러셨으니까요.”
“결국 불가능하다는 소리 아닙니까?”
“아니요, 가능해요.”
묘한 확신이 깃든 말이었다.
아이리스 황녀의 눈동자에 붙은 불길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시간이 지날수록 그 광채를 더해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광증’이라는 표현이 절로 떠오를 정도의 집착이었다.
“이안 페르쿠스, ‘비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죠?”
“무인들의 깨달음을 담은 기술이 아닙니까?”
“네, 맞아요. 그리고 비전의 재미있는 점은, 단순히 그 효용이 기술의 습득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있죠. 비전을 익힌 이들은 반드시 실력의 향상을 보이거든요.”
나는 흐음, 하고 침음을 삼키며 회상에 잠겼다.
그렇기는 했다.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의 끝에서, 내 손은 언제나 흐릿하던 깨달음의 꼬리를 잡았다. 그러고 나서야 비전을 제대로 다룰 수 있지 않았던가.
그 과정에서 실력이 진일보하는 건 당연했다.
아이리스 황녀는 그것이 ‘비전’의 또 다른 기능이라 주장하고 싶은 듯했다.
“그 까닭은 단순해요. 높은 경지에 이른 무인들의 깨달음을 담은 기술이니까… 그 기술을 익히는 과정에서, 무인이 얻은 깨달음의 편린도 녹아드는 거죠.”
“그래서요? 설마, 비전을 무작정 습득하다 보면 마스터에 다다를지도 모른다는 소리는 아닐…….”
“바로 맞췄어요!”
벌써 두 번째, 내 호흡이 멎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순수한 의문을 담은 내 시선이 황녀를 향했다. 그러나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한 아이리스 황녀는, 내 낯빛 따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바로 그거예요, 이안 페르쿠스! 온 대륙의 비전을 긁어 모아서, 한 인간에게 때려 박는다면?”
“이런 미친…….”
이 무렵에서 나는 깨닫고 말았다.
내 앞의 선 여인은, 단순한 권력자가 아니었다.
“모든 유파의 비전과 깨달음을 익힌 최강의 무인이 탄생하겠죠… ‘재능’이나 ‘우연’ 따위가 아니에요.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필연적인 신!”
이 여자는 미쳐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황실의 비원…….”
광인(狂人)이다.
“통칭, ‘만들어진 신(Deus ex machina)’ 계획입니다.”
그리고 또, 미치광이의 꿈을 이룰 만한 능력이 있는 권력자이기도 했다.
여인의 눈동자는 어느덧 황홀경에 젖어 있었다. 이를 마주한 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느꼈다.
‘좆됐다.’
아무래도, 들어서는 안 될 지식에 손을 대 버린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