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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43)화 (543/649)

Chapter 543 - 7. 질투는 나의 힘(43)

종탑의 정상에 다시금 정적이 찾아들었다.

아이리스 황녀의 고백이 끝났으나, 나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아니, 반론이나 지적을 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지도 몰랐다.

그야말로 광인의 발상이었다. 모든 비전은 저마다의 유파를 지니고 있고, 따라서 마력의 활용법이나 추구하는 무(武)의 방향성도 달랐다.

당연히 각 유파의 달인으로부터 수년에 걸쳐 전수를 받는 것이 정상이었다.

나만 하더라도 ‘회절(回絶)’을 익힐 때 무수한 실패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비록 사선을 넘는 과정에서 그 한계를 넘어서기는 했지만, 통상적으로는 그 후에도 몇 년은 더 수련해야 쓸 수 있는 기술이리라.

헌데 세심한 지도도 없이 마구잡이로 비전을 익힌다?

그 끝은 뻔했다.

파멸.

한동안 머뭇거리던 나는, 결심을 굳히고 솔직한 감상을 쏟아내기로 했다.

“미치셨습니까, 전하? 그딴 건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황된 이론에 불과합니다… 비전은 그렇게 마구잡이로 익힐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에요. 제대로 배우려면 몇 년을 투자해야 한단 말입니다! “

“맞아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죠… 어느 날 예외가 하나 나타나기 전까지는.”

저벅저벅, 걸음을 내딛는 여인의 눈동자에서 농밀한 감정의 파도가 일렁였다.

나를 응시하는 그 눈빛이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앞둔 미식가를 닮아 있었다. 부담스러운 마음에 슬쩍 시선을 피해 보았으나, 내 목덜미를 달구는 숨결마저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리스 황녀의 입술이 짙은 호선을 그렸다.

“……이안 페르쿠스, 당신 말이에요.”

나는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아이리스 황녀가 유독 내게 관심을 보인다 싶었다.

단지 시엔을 대마녀의 제자로 들이기 위해서라면 내게 이만한 공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단적으로 말해, 아이리스와 경쟁 중이라는 제1황자 빌테온은 내게 얼굴조차 비추지 않던 차였다.

반면 아이리스 황녀는 나를 두 번이나 마주쳤다.

그리고 심복이라는 알펜하우저의 쌍둥이를 아카데미로 보내 나와 접점을 만들기까지.

내게 흥미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아리따운 여인의 관심은 어떤 의미로든 기꺼운 면이 있었다. 다만, 그 관심이 말도 안 되는 계획으로부터 발원하고 있다는 점이 못내 뼈 아플 뿐.

어떻게든 발을 빼야만 한다.

내가 이러한 결심을 다지는 와중에도, 아이리스 황녀는 어린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를 이어갔다.

“진흙 속에서 잃어버린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죠! 내심 믿고 있던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난 거예요!”

“전하, 아무리 그래도 너무 위험합니다.”

나는 최대한 침착을 가장하여 그렇게 말했다.

아이리스 황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흥미로 가득 찬 시선이었으나, 그 종류가 달랐다.

인간을 보는 눈빛이 아니다.

차라리 장인이 빚은 도구나 예술품을 바라보는 눈빛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일단 내 의견을 들을 마음이 있기는 하다는 점이 위안이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무척이나 특수한 사례에 속합니다. 물론 유파에 관계 없이 단기간 내에 여러 비전을 익히긴 했어요. 하지만 이는 수없이 죽음의 위기를 넘기다 보니 어쩌다, 운이 좋아서 습득했을 뿐이에요. 대부분은 그 과정에서 죽음을 면치 못할…….”

“상관 없어요.”

해맑은 대답이었다.

냉담하기만 하던 이전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기운 찬 음색이기도 했다. 정작 그 짤막한 답변이 함의하고 있는 바는 너무나 무시무시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가능은 하다는 거잖아요?”

“수백 명 중에서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럼 수천 명을 넣으면 되죠.”

지극히 평온한 음색이었다.

일순 내 귀가 잘못됐나 싶을 정도였다.

비전을 익히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재능이 필요했다. 나 또한 아카데미에 입학한 수재 중 한 명이 아니었던가.

이처럼 재능 있는 무인을 무려 수천이나 갈아 넣겠다고?

본능적인 거부감이 뱃속에서 꿈틀거렸다. 검은 혀처럼 날름거리는 그 감정을 따라, 내 입은 울컥 분노를 뿜어냈다.

“사람의 목숨이 장난입니까? 무려 수천이라고요… 수천! 심지어 그중에 한 명도 못 살아남을 수 있단 말입니다!”

“이안 페르쿠스… 그래서 말했잖아요. 권력자의 시야를 가져야 한다고.”

어느덧 냉정을 되찾은 아이리스 황녀의 입가에 차가운 조소가 맺혔다.

아니, 저것을 냉정이라고 불러야 할까.

나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아이리스의 등 뒤를 쫓았다. 황녀는 다시 난간으로 다가가 지상의 풍경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 보세요. 저 무수한 점들을! 저 점 하나하나가 목숨이라고요… 목숨이 우습냐고요? 천만에요! 저렇게 수많은 생명을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최선의 수를 고르기 위해서는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고요! 그런데, 수천 명을 투자해서 마스터 하나를 만들 수 있다니?”

으득, 하고 이를 갈면서 아이리스 황녀는 초조한 낯빛으로 난간에 몸을 기댔다.

나와 같은 지적을 한 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는 듯.

“얼마든지! 마스터 하나의 가치는, 그깟 수천 명의 목숨과 비할 바가 아니에요.”

“미치셨군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내뱉은 한 마디였다.

나는 이만 등을 돌리기로 했다. 더 들을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다.

이따위 미친 계획에 누가 협력을 한단 말인가.

황제 폐하가 딱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허황된 소리에 어울려 줄 만큼 제국 권력의 정점은 여유롭지 못할 테지.

아이리스 황녀가 ‘황실의 비원’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황제도, 검공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테니까.

수천 명이 죽고, 남은 하나조차도 얼마나 커다란 고통을 겪어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계획이었다.

정상적인 윤리관을 갖춘 이라면 누구든 동의하지 못하리라.

그렇게 내가 신전으로 이어지는 사다리를 타기 직전이었다.

“……마스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마스터의 비전이 필요해요.”

내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어차피 온갖 헛소리를 들어준 참이었다. 또 무슨 소리를 하나 들어 보기나 하자는 심정이었다.

그러든 말든, 아이리스 황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쥘부채를 펼쳐 제 입가를 가리며.

“마스터와 그 외의 무인 사이에는 가늠이 불가능한 격차가 존재해요. 마스터로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깨달음이 필요하다는 뜻이죠. 그에 도달하지 못한 자들의 깨달음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래서 대마녀의 비전을 탐하는 겁니까?”

“소문에 따르면, 대마녀의 비전을 익힌 자는 가르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가로막지 못하는 것도 없다더군요. ‘만들어진 신’을 만들기 위한 첫 걸음으로 적당하지 않나요?”

“헛소리.”

나는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종탑을 떠나려다가, 어쩐지 분이 풀이지 않아 멈칫했다.

“그럼 시엔 전하를 그 도구로 삼으려 했단 말입니까? 대마녀의 제자가 되어, 당신의 허무맹랑한 계획에 가담하도록?”

“안 되나요?”

“앞으로 마주치지 맙시다.”

그러면서 나는 슬쩍 망토를 거두며 허리춤의 손도끼를 보여주었다.

“……죽도록 쳐맞기 싫으면.”

그렇게 성대를 긁으며 토해낸 경고가 마지막이었다.

나는 성큼성큼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고, 메아리처럼 아이리스 황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움이 필요하면 ‘까마귀’를 찾아요! 우리의 손에는, 이미 당신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비전이 존재하니까…….”

'까마귀'.

제국 첩보부를 이르는 말이었다. 하지만 일부러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아이리스 황녀가 따로 수족으로 부리고 있는 조직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반짝이는 걸 보는 족족 둥지에 모아두는 까마귀처럼, 대륙 각지의 비전을 탐한다는 뜻이리라.

물론 내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왜냐하면, 아이리스 황녀가 그토록 원하던 대마녀의 비전이 이미 내 손 안에 있었으니까.

‘결(結)과 해(解)’.

결코 아이리스 황녀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

**

아이리스 황녀를 떨쳐낸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또 하나의 황족이었다.

바로 소녀의 탈을 쓴 검공이었다.

소녀는 내 말을 듣자마자 곧장 빼액,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대련을 미루자고?!”

“흡혈귀의 거점을 발견했어요. 당연히 공무가 우선 아니겠습니까.”

“그건 저 할망구 혼자 가도 충분하잖냐!”

검공은 나와의 대련을 꽤나 기대하고 있었는지, 그렇게 볼멘소리를 내며 대마녀를 가리켰다.

마침 대마녀는 시엔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시엔은 ‘용의 눈’까지 동원해 가며 대마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를 썼으나, 마스터에 도달한 강자의 심리를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시엔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과할 정도로 대마녀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반면 대마녀의 낯빛은 평온하기만 했다.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황녀와 대화를 나누는지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흐음, 하고 침음을 삼키며 물었다.

“둘이서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겁니까?”

“이젠 말 돌리기까지… 끄응, 됐다. 잠깐 들어 보니 ‘용의 피’가 어쩌고 하던 것 같던데.”

‘용의 피’라.

그러고 보니 그 말을 또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기억이 났다. 어쩐지 머리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고민에 빠져 있을 틈은 많지 않았다.

금세 황녀와의 대화를 끝마친 대마녀가 슬쩍 내게 눈짓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군말 없이 대마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 아이와 대화는 잘 끝냈느냐?”

“들을 가치도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괜히 신경만 썼어요.”

내 냉담한 반응에도 대마녀는 훗, 하고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그래? 제국 황실은 옛날부터 이상한 짓을 많이 하기로 유명했지… 돈과 힘이 넘쳐나면 이따금씩 그러고 싶은 욕망이 들끓는 모양이야.”

“아무리 그래도, 제국 귀족 앞에서 황실에 대한 비판은…….”

“쯧쯧, 선대의 선대 황제 면전에서도 한 마디씩 하던 나다. 이제 와서 거리낄 게 있겠느냐?”

할 말이 궁해진 나는 결국 머리를 긁적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천하의 황녀조차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응대해야 할 존재가 대마녀였다. 한편으로는 ‘마스터’를 위험한 존재로 규정하는 아이리스 황녀의 마음이 이해 가기도 했다.

이대로 두면 울음이라도 터트릴 기세라, 나는 불쌍한 황녀를 구제해 주기로 했다.

“시엔 전하, 세리아의 간호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네……?”

“세리아가 기절했거든요. 아시다시피, 최근 아카데미 내의 분위기가 흉흉하지 않습니까? 믿을 만한 분이 간호를 해주셨으면 해서…….”

황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연회색 눈동자에 활기가 돌더니, 이내 시엔은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부탁을 받았다는 사실이 못내 기쁜 모양이었다.

“네, 네! 맡겨만 주세요! 이안 경의 지시를 충실히 따를 테니……!”

“아니, 지시라고 할 것까지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황녀는 제 할 말만을 끝마치고 그렇게 달음박질을 쳤다.

아마 내가 황녀를 배려해 주었는지도 모르고 있을 터였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마지막으로 남은 인물에게 흘깃 시선을 보냈다.

“검공 어르신, 따라오시겠습니까?”

“흥, 됐다!”

단칼에 거절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대마녀는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삐졌나 보구만.”

“삐지지 않았소!”

“에이, 삐졌잖느냐~”

“글쎄, 삐지지 않았다니깐!”

이대로 두면 검공이 벌컥 화라도 낼 기세라, 나와 대마녀는 쫓겨나오듯 신전을 빠져 나와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대마녀는 못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내지 못했다.

“푸흐, 큭큭큭! 그렇게 나이를 먹고도 저렇게 유치하다니!”

“끔찍한데요.”

“그래서 일부러 소녀의 의체를 덧씌운 거다. 보기라도 좋아야 좀 덜 흉하지 않겠느냐?”

나는 대마녀의 말에 탄성을 내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큰 그림을 보고 있었다니.

과연 수백 년을 살아 온 마스터의 혜안은 깊이가 달랐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검공을 데려오지 않은 선택을 후회하게 될 때까지는, 몇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흡혈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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