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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45)화 (545/649)

Chapter 545 - 7. 질투는 나의 힘(45)

이곳은 흡혈귀의 결계 거점 중 한 곳이었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을 이들은 오직 흡혈귀의 권속들뿐이었다.

설마 들킨 걸까.

하지만 대마녀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신전에서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를 제외하면, 숲에 진입할 때까지 대마녀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어디서 행보가 노출된 거지.

논리적인 귀결은 뻔했다.

대마녀와 달리, 나는 도보로 당당히 이동했다.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가설이 가장 유력했다.

여인의 판단도 나와 다르지 않은 듯했다.

“급습할까요?”

“됐다, 내가 나서마… 어차피 내가 온 줄도 모를 가능성이 클 테니.”

그렇게 휘휘 손을 내지으며, 대마녀가 다시금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저벅저벅 걸음이 나아갈 때마다 기묘한 풍경이 펼쳐졌다. 대마녀를 중심으로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이내 손톱으로 철판을 긁는 듯한 끔찍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끼기기기기기기긱-

마구잡이로 불꽃이 튀고 있음에도 여인의 걸음걸이에는 거침이 없었다. 잠시 상황을 살피고 있던 나는 재빨리 그 뒤를 따르기를 택했다.

도리어 대마녀의 곁은 태풍의 핵처럼 아늑했다.

시야를 샛노랗게 물들이는 불꽃 너머로 수많은 광경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불타는 건물, 숲, 그리고 무너져 내린 폐허 속에서 대치하는 두 여인.

대마녀의 발걸음이 멎은 건 그때였다.

“……바로 앞에 있구나.”

그 나른한 선언에, 나는 곧장 검 손잡이를 쥐었다.

전투를 앞둔 검사의 당연한 의무였다. 하지만 대마녀는 도리어 헛웃음을 삼킬 따름이었다.

“아서라, 아서… 너는 도망칠 준비나 해라.”

“도망치다니요?”

어찌 보면 모욕적이기까지 한 말이었다.

내가 황당하다는 듯 반문하자, 대마녀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어차피 내가 처리하지 못할 정도의 상대라면, 네게도 가망은 없으니까… 특히 이 결계는 공간을 왜곡하는 부류야. 상대하기 무척 까다롭지.”

“그래도…….”

“아카데미에는 지원군이 남아있다.”

무엇 하나 반박할 수 없는 정론이었다.

결국 나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대마녀는 그러는 내 모습조차 귀여운 지 픽, 하고 웃음을 터트리곤 시선을 돌렸다. 그 가녀린 손에 이내 새하얀 빛의 점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것이 첫 번째.

어느덧 점을 중심으로 온 세상의 풍경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왜곡된 공간이 물 위에 뜬 물감을 붓으로 훑은 것처럼 엉망진창으로 구부러졌다.

이마저도 잠시.

반투명한 구체가 빛의 점을 덮더니, 이윽고 빛의 점이 마구잡이로 충돌과 반사를 반복했다.

그 속도를 점점 더해 가면서.

이윽고 반투명한 구체 안은 무수한 빛의 궤적으로 가득 찼다. 내부에서 튕기는 광점의 속도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멍하니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는 나를 두고, 대마녀는 짤막한 조언을 남겼다.

“꼬맹아, 잘 봐 둬라… 이것이 결(結)의 활용법 중 하나다.”

그러자 빛의 구체가 두둥실 떠올랐고 대마녀의 검지가 정면을 가리켰다.

이후, 격발.

탕, 하는 폭음이 뇌리를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사실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찢겨나간 뒤였다.

공간에 일직선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무수히 많은 단면들이 갈기갈기 찢어져 내부의 풍경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저 깊고 어두운 구멍 너머, 빛이 넘쳐흐르며 세상을 지우고 있다는 사실만을 얼핏 인식했을 뿐.

그러다 미세한 빛의 실선이 뚝, 하고 끊기는 순간.

후폭풍이 마구잡이로 들이닥쳤다.

팍, 하고 공기가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풍파가 일대를 모조리 긁어대고 있었다. 곧장 두 팔을 교차시키지 않으면 시야를 보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신음이라도 흘리고 싶었지만, 입을 벌려봐야 바람만 허파에 들어찰 것이 뻔했다. 결국 두어 걸음 남짓을 물러난 뒤에야 내 몸은 곧은 자세를 되찾았다.

어느 누구라도 이 폭풍 속에서 멀쩡할 수 있겠는가.

오직 단 한 명, 이 참상을 만들어 낸 장본인만이 태연한 얼굴로 서 있을 따름이었다.

대마녀는 맹렬히 불어닥치는 바람 속에서도 곰방대를 물고 있었다.

“……흐음, 끝난 것 같은데.”

애매한 어조였지만, 도리어 나는 그 말을 듣고 확신했다.

끝났다.

저 일격을 버틸 수 있는 존재는 많지 않았다. 미리 준비하고 있더라도, 최소한 하이 익스퍼트에 이르는 강자가 전력을 다해야 할 정도였다.

하물며 불의의 일격이라서야.

한참을 침묵하던 나는, 머뭇머뭇 화두를 꺼냈다.

“그, 본신의 힘은 봉인되었다고…….”

“모자란 힘도 압축하고, 압축하다 보면 얼마든지 위력을 높일 수 있지.”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대마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태양을 바늘 구멍에 집어넣는다는 느낌으로!”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조언 같지도 않은 조언에 나는 허탈하게 고개를 내젓는 수밖에 없었다.

정작 대마녀는 볼을 부풀리며 짐짓 불만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말이다.

“아니, 왜 안 돼? 해보기는 했나?”

“상식적으로 그게 되겠습니까? 태양을 어떻게 바늘 구멍에 넣어요.”

이처럼 내 지당한 반론에도 대마녀는 쯧쯧, 하고 혀를 찰 뿐이었다.

어느덧 허공에 난 구멍이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지지직,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공간이 아물 때까지는 어울려 주어도 괜찮겠지.

나는 일단 그러한 마음으로 이 황당한 토론에 임해 주기로 했다.

“쯧쯧, 이래서 요즘 젊은 것들은… 해볼 생각은 않고 안 된단 말만 입에 달고 산다니까?”

“아니, 이건 해볼 필요도 없잖습니까!”

“꼬맹아, 아무래도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자고로 현실 세계와 심상 세계는……!”

그렇게 내가 펄쩍 뛰고, 대마녀가 억지를 부리고 있던 찰나였다.

탕, 하고.

어디인지 모를 곳에서 파열음이 들려왔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라서, 나는 얼굴에 떠오른 황당한 기색조차 지우지 못한 채였다.

다만 망막을 물들이는 핏빛.

울컥, 하고 대마녀가 입에서 핏물을 한 웅큼 토해내고 있었다.

제 가슴을 감싸 쥐면서.

“이, 게 무슨… 대마녀 님, 괜찮……!”

“오지 마!”

발악처럼 외치며, 대마녀는 곧장 뒤돌아 검지로 정면을 가리켰다.

탕, 탕, 탕!

어느덧 주위로 떠오른 빛의 구체가 몇 번이나 쏘아졌다. 마찬가지로 미세한 빛의 궤적을 중심으로, 공간이 일직선으로 관통되었다.

그럼에도 돌아오지 않는다.

후폭풍이.

그 대신 푸르른 숲의 정경이 하나둘씩 제 색을 빼앗기고 있었다. 마치 안개가 거두어지듯이.

잿빛의 세계.

하늘에는 붉은 달이 떠 있고, 나무들은 말라죽어 거무죽죽한 빛을 띠었다. 땅은 불길한 핏빛으로 물들어 더욱 불쾌한 감상을 일으키는 공간이었다.

대마녀는 그 와중에도 바짝 긴장한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피를 머금은 입술 사이로 한 줄기의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톡, 하고 떨어져야 할 피 한 방울이 두둥실 떠올랐다.

대마녀의 눈동자가 부릅떠진 것은 그때였다.

사뿐사뿐 내딛는 발끝이 새하얀 곡선을 타고 종아리로 이어진다.

종아리는 허벅지, 허벅지는 둔부를 거쳐 잘록한 허리로, 끝내 전신이 드러난 여인은 무척이나 선정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닮았다.

그 얼굴은 어딘가 대마녀를 연상시켰으나, 회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는 명백히도 내 후배를 닮아 있었다.

풀썩 제자리에 주저앉은 대마녀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부릅뜬 연녹빛 눈동자에 핏발이 서고 있었다.

“너, 너어……!”

“안녕.”

반면 회색 머리카락의 여인은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선홍빛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이 조소인지, 어쩐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상대의 정체를 짐작해 냈다.

창백한 피부, 푸른 눈동자, 회색 머리카락.

차가운 색조와 대비되는 핏빛 입술과, 칠흑의 드레스. 눈썹마저 흐릿한 빛깔이라 더욱 가녀린 이미지가 강조되는 이 여인의 정체를.

검은 장갑이 덧씌워진 엄지 끝을 살짝 깨물면서, 여인은 질척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사랑하는 내 동생아.”

그 한 마디가 역린이라도 되는 걸까.

대마녀는 울컥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낯빛이 좋지는 않았으나, 최소한 그 눈빛에서 불타는 전의만큼은 진짜배기였다.

“웃, 기는 소리… 잘도, 내 앞에……!”

“그런데 미안, 오늘은 널 보러 온 게 아니거든.”

그리고 딱, 하고 퉁겨지는 손가락.

그것이 끝이었다.

와장창, 느닷없이 허공에 균열이 일어나더니 몸을 가누지 못하던 대마녀가 그 틈새로 떨어져 내렸다. 대마녀도 설마 이럴 줄은 몰랐는지, 마지막까지 제대로 된 언어를 토해내지 못했다.

다만 그 입술 모양은 내 시야에 똑똑히 새겨졌다.

‘도망쳐.’

나는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키며 슬그머니 시선을 여인에게로 돌렸다.

질겅질겅.

여인은 제 엄지를 위를 덮고 있는 칠흑의 장갑을 짜증스레 씹으면서, 내게 물었다.

“꼬마야, 너니?”

“무, 무슨 말씀이신지…….”

팍, 하고 핏빛의 창이 솟구치며 내 이마를 겨누었다. 나는 기함해서 뒷걸음질을 쳤으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창 끝은 내 이마에 닿기 직전에 멈췄으니까.

핏빛의 창은 고작 몇 방울의 핏방울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대마녀가 한 웅큼 토해낸 핏물이 단숨에 부피를 불려 무기로 변모한 것이다.

이처럼 독특한 능력을 지닌 괴물은 온 대륙을 통틀어도 단 하나밖에 없었다.

여인, 아니 ‘흡혈귀’는 어딘가 위험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내게 물었다.

“……내 조카딸의 연인 말이야.”

실로 가슴 떨리는 물음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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