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46)화 (546/649)

Chapter 546 - 7. 질투는 나의 힘(46)

사내아이가 결코 피할 수 없는 말이 하나 있다.

바로 ‘언제나 당당하라’, 혹은 ‘의연하라’라는 소리였다. 남자란 자고로 흔들리지 않고 가정의 중심을 잡아 주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돌이켜 보면 황당한 주장이기도 했다.

왜 하필 남자는 매사 당당하고 의젓해야 한단 말인가.

내게도 두려움은 존재했다.

안전한 곳에서 편히 쉬고 싶고, 도망치거나 보호받고 싶은 욕망 또한 당연히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차마 그러지 못하는 까닭은, 어린 시절의 가르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탓일지도 몰랐다.

또 맹세하지 않았던가.

더는 도망치지 않겠다고, 아무것도 버리지 않겠다고.

이제야 나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어설픈 자신감은 무참히 깨져 나가고 말았다.

맞서야 할 적이 너무 강해서?

그 ‘성자’를 상대로도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들었던 나였다. 본신의 힘을 되찾지 못한 흡혈귀를 앞에 두고 도망칠 리는 없었다.

내가 식은땀을 흘리는 원인은 오직 하나였다.

흡혈귀가 입에 담은 ‘조카딸’이라는 단 한 마디.

내 뇌리를 단숨에 헝클어트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발언이었다.

세리아가 흡혈귀의 피를 잇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설마 ‘조카딸’이라고 부를 만큼 가까운 관계일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무리 담대한 사내라도 위축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존재한다.

바로 연인의 가족을 마주쳤을 때.

물론 나와 세리아는 아직 ‘연인’이라 부를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고, 또 가족이 추궁까지 하는 마당이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시치미를 떼기도 애매했다.

죽여야만 하는데.

나는 허리춤의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면서도, 함부로 공세를 취하지는 못했다.

어차피 움직여 봐야 죽는 쪽은 나다.

그러한 직감이 실처럼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보다 빈틈이 선명히 드러날 때를 노려야 했다.

흡혈귀와 세리아의 관계, 전력의 열세, 그리고 칠죄종 중 하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드문 기회.

나는 결국 짙은 한숨을 내쉬며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는 수밖에 없었다.

종합적인 상황을 고려했을 때,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은 간단했다.

그렇게 내가 결심을 굳힌 뒤에도 흡혈귀는 장갑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꼬마야, 내 말이 들리지 않니?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네가 내 조카딸의 연인…….”

“이모님!”

쿵, 하고 무릎을 꿇으며 부르짖은 호칭이 공터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정적.

메마른 대기가 일순 멈춘 듯한 착각이 일었다. 끊임없이 장갑을 물어뜯던 흡혈귀마저 입질을 멈출 정도였으니까.

동그랗게 뜨인 푸른 눈동자가 멀뚱멀뚱 나를 향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낯빛이었다.

나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넙죽 엎드렸다.

그러자 흡혈귀는 더욱 당황해서 허둥지둥하기 시작했다.

“이제야 인사를 드려 죄송합니다. 설마, 이렇게 우연히 세리아의 이모님을 만나뵐 줄이야… 말씀하신 대로, 조카딸의 연인 이안 페르쿠스입니다!”

“아, 으… 그, 그래?”

내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숙이자, 흡혈귀는 멍청한 소리를 토해내고 말았다.

더듬거리는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설마 내가 이렇게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기색이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역대 최악의 마인이라는 평가와 달리, ‘흡혈귀’는 다소 맹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당장 지금만 하더라도 조카딸을 찾다가 나를 어찌 대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레 몸을 일으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믿기 힘들었지만, 그 아리따운 회색 머리카락… 티 없이 맑은 피부와 보석을 빼다 박은 듯한 푸른 눈동자까지! 과연, 세리아의 이모님이시군요.”

난생 처음 동원하는 낯간지러운 수사였다.

흔해빠진 칭찬의 말이었지만, 흡혈귀는 이러한 아첨에도 내성이 없는지 금세 얼굴을 붉혔다. 이제는 슬쩍 내 시선을 피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 사이에 또 한 걸음.

나는 착실히 흡혈귀와의 거리를 좁혀나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흠, 흠흠… 하여튼 네가 내 조카딸의 연인이 맞다는 말이로구나.”

“아직 부족한 몸이지만, 그렇습니다.”

내 겸손한 태도에 흡혈귀는 슬쩍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 방심하지 않았다.

내 직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아직 촘촘히 얽힌 살의가 나를 겨누고 있노라고.

저 괴물이 내게 어울려 주고 있는 까닭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자신이 있었으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당하지 않으리란 자신이.

마치 날개 뜯은 잠자리의 발악을 지켜보는 악동과도 같은 심정이라고 할까.

히죽, 하고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흡혈귀의 낯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나조차도 일순 가슴이 두근거렸을 만큼.

다만 그것이 흡혈귀에게 홀렸기 때문인지, 묘한 불길함을 느낀 탓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어느덧 흡혈귀의 말투는 다소 우쭐해져 있었다.

“훗, 좋아. 다행이구나… 소문난 난봉꾼이라고 들었는데, 의외로 진심인가 보지?”

내 낯빛에 순간적으로 균열이 일 뻔했으나, 나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이를 참아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는 했다.

당장 세리아를 제외하고도 나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여인은 몇 명이 더 있지 않은가.

성녀나 델핀 선배는 물론이고, 엘시 선배와 엠마도 빼놓을 수 없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혹시, 조카딸의 성함이?’라고 되물을 뻔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 죄를 스스로 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혀로 입술을 축이며 뻔뻔스레 거짓말을 늘어놓기로 했다.

“이모님께서는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입니까?”

“으, 으응……?”

또 한 걸음, 이제 흡혈귀의 지척까지 다가온 나는 겁도 없이 여인의 손을 낚아챘다.

흡혈귀를 일순 깜짝 놀란 듯 보였으나 내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다만 볼을 살짝 상기시키며 나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든 말든, 나는 절절한 애원을 토해내기를 멈추지 않았다.

“부디 이모님께서 판단해 주십시오. 제가 그렇게 쓰레기로 보이십니까?”

사실 쓰레기가 맞기는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진실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흡혈귀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는, 전적으로 흡혈귀의 몫이었다. 그것이 설령 잘못된 판단이라도 말이다.

흠흠, 하는 헛기침을 소리와 함께 여인의 고개가 슬쩍 돌아갔다. 내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 사이에서 묻어나오는 망설임을 읽어냈다. 흡혈귀의 손을 감싼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지, 직접 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인정해 주시는 겁니까?”

내 직설적인 말에 흡혈귀는 하아, 하고 애달픈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머뭇거리던 여인은, 결국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조건 하나만 들어준다면, 널 우리의 가족으로 받아 주마.”

마치 아량을 베풀어 주기라도 한다는 투였다.

흡혈귀에게는 ‘가족’이라는 의미가 중요할지도 몰랐다. 하기야, 여태껏 마주친 흡혈귀의 권속들 또한 유독 ‘어머니’와 ‘자매’ 이야기에 열을 올렸던 기억이 나기는 했다.

물론 나는 그 범죄 집단에 가담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지만.

아직 상대는 방심을 온전히 사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일부러 멍청한 척을 하기로 했다.

“……무슨 조건 말입니까?”

그렇게 내가 어리둥절한 낯빛으로 고개를 갸웃한 직후였다.

일대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느닷없이 주위의 온도가 몇 도나 내려간 듯한 착각이 일었다. 폐부를 채우는 공기가 유독 무겁게 느껴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선이 뱀의 혀처럼 내 전신을 샅샅이 핥고 있었다.

흡혈귀는 더욱 진득한 미소를 머금었다.

푸른 눈동자 안에서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를 마주한 나는 일순 정신을 차리지 못할 뻔했다.

그리고 훅, 하고 내 손을 잡아끌며 망막을 덥히는 달콤한 목소리.

“네 피를 내게 주겠니?”

내 몸은 별다른 저항도 없이 그 손에 딸려나갔다. 갸우뚱 기운 몸뚱어리는 균형을 되찾을 생각도 없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자세를 무너트리는 와중에도, 나는 멍하니 사고를 되풀이했다.

그래, 흡혈귀도 마인이었다.

잠깐 나와 어울려 주었다고 해서 빈틈을 내주어서는 안 됐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 아니었던가.

내 입술을 비집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치 신은처럼.

“기꺼이…….”

이윽고 서서히, 달콤한 체향이 후각을 완연히 뒤덮고.

정신이 흐릿해지며, 초점이 나간 시야 사이로 새하얀 송곳니가 반짝였을 찰나.

비릿한 피 냄새가 흘러 넘치며 내 정신을 일깨웠다.

당연히 흡혈귀에게 당한 것은 아니었다. 입술을 짓씹자마자 아찔한 통증이 뇌리를 찌르며 몽롱해지던 뇌리를 강타했다.

그리고 정지하기 시작하는 세계.

이변의 근원은 내 팔이었다. 흡혈귀의 손을 마주 잡은 동안, 흥분한 척을 하며 힘을 주고 있었지만 내 목적은 따로 있었다.

‘심상’을 일깨우기 위해 필요한 단 몇 초.

그 말미를 번 내 손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