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47 - 7. 질투는 나의 힘(47)
물론 세상이 온전히 정지하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아직 내 시야에 색채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였다. 흡혈귀가 눈치 챌까 싶어 오러를 본격적으로 일으키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래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있던 것보다는 나았지만.
처음으로 흡혈귀의 낯빛에 균열이 일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눈치였다.
그래봐야 어쩌겠는가.
이미 시간은 둔중한 흐름을 보이고 있었고, 그 세계 속을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나뿐이었다.
벼락같이 뽑혀 나온 손도끼가 새하얀 빗금을 그었다.
고점까지 치솟은 도끼날이 먹잇감을 찾아 일순 멈칫했다. 흡혈귀는 손도끼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물러나지도 않았다.
휘두르든 말든 관심 없다는 태도였다.
무수한 실전을 거친 뇌는 금세 새로운 가설을 도출해 냈다.
재생을 믿고 달려드는 것은 아니었다. 내 손도끼의 사정권 내에는 흡혈귀의 목이 위치하고 있었다. 제 아무리 마인이라도 목이 떨어져 나가면 최소한 몇 초 남짓은 운신이 불가능할 텐데.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흡혈귀는 내 손도끼를 막아낼 수단을 지니고 있다.
질긴 피부, 혹은 주술적인 방어벽일지도 몰랐다. 무엇이든 간에 흡혈귀가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여전히 그 미소가 지워지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망설임 없이 손도끼로 내리찍었다.
내 어깨를.
그러자 팍, 하고 이는 피보라.
흡혈귀의 낯빛이 다시금 일그러졌고, 나는 앞서 끝맺지 못한 말을 끝맺기로 했다.
'기꺼이', 라고 했었던가.
“……드려야죠!”
일순간이나마 시야를 제압당한 판이었다. 비록 천하의 흡혈귀라 해도 제대로 된 대처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미리 준비하고 있던 대로 전력을 다한 발길질을 날렸다. 내 목을 노리던 흡혈귀의 명치를 강타하는 일격에, 핏물의 장막 너머에서 토막 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가 노리고 있던 두 번째 수.
흡혈귀는 피와 결계를 다루는 마법사지만, 나는 검사였다. 아무리 마법사가 강하다고 해도 근접 박투는 나의 우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흡혈귀가 본신을 가지고 오지 않는 이상에는 말이다.
그리고 이만큼 거리가 벌어지면 충분했다.
온 세상이 무채색으로 물들고, 나는 남은 손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검극은 좌하단으로.
유르디나 가문의 비전 검술, ‘금사검(金獅劍)’이었다.
동시에 연달아 몰아치는 검격은 상대의 방어를 무효화하는 데도 탁월한 효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걸리는 점이 있다면, 상대가 ‘흡혈귀’라는 점뿐.
어지간한 이빨은 박히지도 않으리라.
그래서 나는 좀 더 공을 들여 보기로 했다. ‘심상’이 없었다면 실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짓이었다.
검에 얽혀 들던 마력이 안개처럼 느슨해지고 있었다. 해(解)의 묘리를 담아, 일검.
다섯 갈래로 갈라진 사자의 이빨이, 시간 속에 갇힌 흡혈귀를 덮쳐 들었다.
그리고 다시 색채를 되찾기 시작하는 풍경 속.
흡혈귀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불신을 담은 시선으로 제 가슴팍을 내려다보면서.
그 직후였다.
팍, 하고 터져 나오는 다섯 줄기의 붉은 물감.
은빛의 은하수가 핏빛으로 흠뻑 젖었다.
**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핏물이 회색의 대지를 적셨다.
흡혈귀는 제 가슴을 움켜쥐며 울컥, 하고 올라오는 핏물을 참아내지 못했다.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과 부릅뜨인 두 눈이 여인의 경악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뒷걸음질을 친 것은 흡혈귀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두어 걸음을 뒤로 물러난 뒤,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핏물을 한 웅큼 토해내야 했다. 우웨엑, 하고 목을 타고 올라온 비릿한 액체가 땅 위에 쏟아졌다.
내 눈 또한 부릅떠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언제?
정지한 시간 속에서 움직일 수 있는 이는 오직 나뿐이었다. ‘성자’와 같은 규격 외의 강자가 아닌 이상, 내 심상을 압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칠죄성 중 하나인 ‘탐욕’조차 이러한 내 심상을 두려워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탐욕’은 일전에 벌인 승부에서 내가 심상을 발동하지 못하도록 끝없이 견제했다. 사실 나 또한 내심 그것이 최선의 대응이라 생각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흡혈귀’는 무언가 달랐다.
본신을 가져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몸뚱어리는 곳곳의 혈관이 찢겨져 엉망이었다. 내장도 멀쩡하지 못해 속이 들끓고 있는 판이었다.
그 외에도 의문은 또 하나가 남아있었다.
분명 내 검은 저보다 깊이 들어갔을 텐데.
치명상을 목적으로 날린 일격이었다. 당연히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의 상처를 입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저 괴물은 딱히 숨이 간당간당한 기색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말이다.
흡혈귀가 쿨럭, 하고 핏물을 토해내면서도 얼떨떨한 목소리를 흘렸다.
“뜬소문이, 아니었어……? 네가, 어떻게 ‘해(解)’를?”
하지만 할 말이 많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울렁이는 속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나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이모님… 조카사위한테 이러셔도 되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으득으득 이를 갈며 외친 말이었다. 나름 억울하다는 투였다.
물론 씨알도 먹힐 리가 없었다.
흡혈귀는 하, 하고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내저었을 따름이었다..
그 푸른 눈동자에 옅은 열기가 어려 있었다. 그것이 희열인지, 혹은 분노인지 알 길은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예리한 빛을 품은 푸른 눈동자가 칼날처럼 나를 겨누었다.
“조카사위,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야지?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인데…….”
“제 대답이야 뻔하지 않겠습니까?”
내 거침없는 대답에 흡혈귀는 일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지긋이 나를 노려보다가, 이내 비틀린 미소를 머금기까지.
“……네가?”
“네, 부족하지만 대마녀께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대마녀가 있었다면 바로 목청을 높였을 만한 거짓말이었다.
아직 나는 대마녀를 스승으로 삼은 적이 없었다. ‘결(結)’과 ‘해(解)’는 미래에서 온 사내의 기억을 엿보며 훔쳐 배운 기술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부러 내가 거짓 진술을 한 이유.
그 까닭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여인이 흐으,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그 초췌해 보이는 눈초리가 살짝 가늘어졌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이었다.
“사사한 지는 얼마나 됐지?”
서늘한 어조가 턱끝에 걸린다.
나는 그 물음이 마치 칼날과 같다고 생각했다. 자칫 걸음을 잘못 내딛다간 곧장 내 목이 잘려나갈 것만 같은 느낌.
그래서 속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흥분하고 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대마녀와 흡혈귀는 자매이자 원수지간이었다. 당연히 상대의 이름이 나올 때 더욱 흥분할 공산이 컸다.
그리고 필요 이상의 감정 변화는 실수를 부르는 법이었다.
찰나에 불과한 빈틈이라도 좋았고, 한 마디에 불과한 실언이라도 좋았다.
무엇이든 도움만 된다면.
어차피 이 결계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대마녀의 도움이 필요했다. 비록 흡혈귀에 의해 튕겨 나갔지만, 나는 그녀가 곧 돌아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근거는 없었다.
단지 묘한 확신이 들었다. 당연히 그럴 거라고.
따라서 내가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시간 끌기, 정보 수집, 기회를 노려 피해를 누적시키기.
나머지는 대마녀의 몫이었다.
나는 일부러 말끝을 질질 끌어 보기로 했다.
“딱히 세 보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두 달인가…….”
“……거짓말.”
으득, 하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상상 이상의 반응에 놀라 흡혈귀의 낯빛을 자세히 살폈다. 여인은 어느덧 검은 장갑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그 푸른 눈동자에서 낯익은 감정이 꿈틀대고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아카데미 내에서 무수히 마주쳐 왔던 감정.
질투와 열등감이었다.
“이모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거니? 떽, 그럼 못 써… 두 달 정도로 다룰 수 있는 어설픈 기술이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내 비전이었으니까!”
그렇게 벌컥 부르짖는 흡혈귀의 목에는 핏대가 서 있었다.
눈빛은 강렬하다 못해 푸른 불꽃이라는 감상을 줄 지경이었다. 귀기 어린 목소리가 대기를 찢고 들이닥칠 때마다, 온 땅에 흐른 핏물이 넘실넘실 춤을 추었다.
내 입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던 핏방울조차도.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할 뻔했다. 이제야 좀 이해가 가는 느낌이었다.
저 괴물, 일대의 피를 모조리 조종하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최소한 내 체내의 피는 조종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내 목을 물기 위해 가까이 다가오는 수고를 거칠 필요가 없었다.
나를 전투 불능으로 만드는 건 간단할 테니까.
내 의문이 깊어지는 와중에도, 흡혈귀의 새파란 울부짖음이 내 고막을 끊임없이 후려쳤다.
“그런데 ‘그 년’이… ‘그 년’이 훔쳐 간 거야! 뻔뻔스레 내 앞에서 시연하기까지 하더군! 아니, 아니… 사실 빼앗긴 건 그뿐만이 아니야. 내 모든 것을… 내 모든 것을 ‘그 년’이 가져갔다고!”
웅웅, 하고 울려 퍼지는 진동.
흡혈귀의 진노가 일대를 뒤흔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다시 무릎을 꿇어야 할 것만 같아서, 나는 다시 손에 검을 쥐었다.
희망은 있다.
내 검이 완전히 통하지 않으면 몰라, 지근거리에서 나누는 공방은 내게도 승산이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내가 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였다.
어라, 하는 사이.
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한 걸음을 내딛었는데, 나와 흡혈귀의 사이는 그대로였다.
이상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