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48 - 7. 질투는 나의 힘(48)
한 걸음, 두 걸음.
이후에도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걸음을 옮겨도 나와 흡혈귀 사이의 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 무렵에 문득 내 뇌리를 스치는 말소리가 하나 있었다.
'공간 왜곡 결계'.
대마녀의 경고를 떠올린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주술적인 수단에 대처할 능력은 내게 없었다.
흡혈귀는 그 사실을 알고 여유를 부리고 있던 것이다.
심지어 아직까지도.
분노를 모조리 토해낸 흡혈귀는 상반신을 푹 떨군 채로, 어깨만 들썩이며 웃고 있었다.
“푸흐, 으흐… 아하하하하하하하!”
그리고 다시금 치켜든 그 두 눈동자에는, 다섯 개의 낯선 점이 점멸하고 있어서.
나는 일순 숨이 멎고 말았다.
불쾌할 정도로 눈에 띄는 흰색 점이었다.
“그런데, ‘그 년’도 모자라 그 제자까지 두 달만에 내 일생의 목표를 이루었다고? 웃기지 마… 너희, 너희 따위가……!”
그리고 서서히 치켜 올려지는 흡혈귀의 손.
나는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일격의 전조임을 직감했다. 미리 오러를 끌어올리고 있어 다행이었다.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이곳에서 요격에 나서면 그만이었다.
내 손이 허리춤을 벼락같이 훑은 직후.
“……너희 따위가, 이 내게 닿을 수 있을 것 같아?!”
팟, 하고 정지한 세계 속에서 손도끼가 기기묘묘한 궤적을 그리며 비행했다.
단 몇 초.
그러나 세상이 다시 색조를 되찾았을 때는, 무수한 빗금이 열상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물론 나라고 해서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파바박, 하고.
몸에 흐르던 핏물이 바늘처럼 내부와 외부로 터져 나왔다. 마력으로 최대한 제어권을 되찾으려 힘썼으나, 그럼에도 전신이 찢겨 나가는 통증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끄, 끄흐으…….”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힘없이 땅 위로 포개어졌다.
버틴다고 버텼음에도 이 모양 이 꼴이었다. 그래도 흡혈귀도 또 한번의 유효타를 허용했다면, 최소한 중상을 피해 갈 수는 없었을 테지.
그렇게 헐떡이며 가까스로 고개를 치켜들었을 때였다.
“……하지만, 그렇구나. 이 달콤한 냄새.”
그 평온한 목소리를 들은 내 낯가죽이 곧장 구겨졌다.
거짓말.
하지만 내 바람이 무색하게도, 핏빛으로 물든 시야 너머에서 느긋이 걸음을 옮기는 여인이 비치고 있었다.
그 몸뚱어리에는 상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어느새 재생한 걸까. 그렇다 해도, 정지한 시간 속에서 내 일격을 피할 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
흡혈귀는 내 경악을 사뿐히 즈려밟으며 읊조렸다.
“과연, ‘용의 피’야… 그렇다면 그 재능이 설명이 되지. 아아, 내가 얼마나 바라마지 않았던가…….”
“……어, 어떻게.”
쿨럭, 하고 피를 내뱉으며 토해낸 의문성.
그제야 혼자만의 상념에서 깨어난 흡혈귀의 눈이 지긋이 나를 향했다.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 입에서 아아, 하는 탄성이 터져 나올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오행 결계야.”
“그게, 무슨…….”
“너 말이야, 용혈문자 소유자지? 덕분에 살았어. 아카데미 곳곳에 설치한 결계 거점들은 아직 불완전한 상태였거든. 그런데 너라는 적절한 핵을 찾은 덕에 계획이 앞당겨졌지.”
그러면서 흡혈귀는 슬쩍 무릎을 굽히고, 내 머리카락을 붙들었다.
강제로 눈이 마주칠 수 있도록.
나는 이를 악문 채 흡혈귀를 노려보았을 따름이었다.
“그거 아니? ‘용’은 천신 아루스가 낳은 첫 번째 자식이야. 그리고 종교적으로 ‘맏이’는 무척이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단다. 후계자, 대리인, 그리고 가장 귀중한 제물…….”
은밀한 비밀을 속삭이듯이, 흡혈귀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달콤한 숨결이 자꾸만 코끝을 간질였다. 할짝, 하고 여인의 촉촉한 혀가 살짝 내 볼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면서 흡혈귀는 부르르 몸을 떨며 환희에 잠겼다. 제 허벅지까지 꾹 오므리면서.
“하아, 너무 달콤해… 조카사위, ‘용혈 문자’는 무서운 힘이야. 체질뿐만 아니라, 그 피까지 완전히 바꿔 버리는 금단의 주술이거든. 무려 ‘용의 피’로 말이야.”
“그거랑, 이게… 무, 슨 상관…….”
“아하하, 아직도 모르겠니? 내가 굳이 이 시점에 아카데미에 덫을 판 이유, 그리고 결계를 설치한 까닭을… 당연히, 힘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겠어? 드물게도, 이곳에는 용의 피가 많이 모여들었거든…….”
땅에 떨어진 핏물이 슬금슬금 치솟아 내 검을 채간 것은 그때였다.
흡혈귀는 보란 듯이 그 검으로 스스로를 내리쳤다.
팍, 하고.
고속으로 내리쳐진 칼날은 곧장 여인의 목을 통과하여 땅에 틀어박혔다. 그럼에도 흡혈귀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내 탁한 시선을 마주하며, 여인은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들은 적 있니? 오행이 상생과 상극을 이루며 순환한다는 사실을… 모든 물리법칙 또한 마찬가지야. 그런데 만일, 그 오행을 지배할 수 있다면?”
침묵.
내가 말없이 노려보기만 하자, 흡혈귀는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도 나를 건드릴 수 없는 거야! 물론, 대규모 결계를 동원해도 한계는 있지. 고작해야 내 몸 하나 정도의 범위? 하지만 그 정도로 충분해… 오행을 모조리 다룰 수 있는 존재는, 온 세상을 통틀어도 오직 하나뿐이니까!”
그 푸른 눈동자를 광증으로 활활 태우며 외친 말이었다.
나는 흡혈귀가 극도로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애써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더욱 자랑을 늘어놓도록 재촉했다.
무슨 쓸모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무엇…….”
“용!”
그렇게 외치는 여인의 흰자위에는 핏발마저 서 있었다.
제 업적을 떠들어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투였다.
“하지만 용은 멸종했잖아?! 그 대단하시다는 ‘대마녀’마저도 오행의 이치를 온전히 다룰 수 있는 건, 제 본신의 힘을 되찾았을 때뿐이야… 하지만 그 년은 절대 본신의 힘을 낼 수 없어… 왜? 그 즉시 내 본신이 풀려날 테니까!”
어째서 이 여인은 제 힘을 이토록 자랑하지 못해 안달이 났는가.
그 의문은 금세 해소되었다. 타오르는 푸른 동공 사이에서, 또 다시 낯익은 감정의 파편을 발견해 냈기 때문이었다.
‘질투’와 ‘열등감’.
타인의 재능을 질시한 여인은 제 능력을 알아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있었다. 열등감을 지닌 인간의 보편적인 특징 중 하나였다.
내게는 좋은 일이었다.
덕분에 많은 수수께끼가 해소되었으니까.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슬슬 내 정신이 흐려지고 있다는 사실뿐.
이를 눈치 채지 못할 흡혈귀가 아니었다.
괴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득한 호선을 머금고 있었다.
“조카사위, 난 아직 널 살려두어야 해… 어딜 가든 상관은 없어. 하지만 네 목숨만은 부지하고 있어야 해. 그래야 결계가 유지될 테니까… 또, 내 집 나간 동생도 되찾아야 하고?”
그러니까, 잘 자렴.
송곳니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시야는 흐려질 대로 흐려져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이제 자야 할 시간이라고.
그래, 이곳은 너무 어둡고 쌀쌀했다.
잠깐 자고 일어나면, 다시 햇살이 쏟아지고 있을 거야.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을 찰나였다.
팟, 하고 온 세상의 빛이 점멸했다.
“……?”
흡혈귀 또한 이러한 사태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내 목을 물려던 시도를 물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정도였다.
바로 그때.
“검혼(劍魂).”
나는 그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몸을 옆으로 굴렸다.
흡혈귀를 무심코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도망치려는 인질을 잡기 위한 당연한 시도였지만, 안타깝게도.
“……어라.”
흡혈귀는 멍청한 소리를 토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제 팔에 무수한 실금이 가 있었다. 그리고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채 파악하기도 전이었다.
팍, 하고 썩은 과일이 터져 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핏물과 살점, 그리고 뼛조각.
허무하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그래서 흡혈귀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입에서 희미한 파열음이 감지된 것은, 그로부터 좀 더 시간이 지난 후.
“으, 아… 아아아아아아아악?! 어, 어떤 놈이? 어떤 놈이, 감히이이이이이익……!”
흡혈귀는 경악성을 토해내며 곧장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그 경계의 눈초리가 하늘을 향한 직후.
탁, 하고 자그마한 소녀 하나가 착지했다.
나와 흡혈귀 사이를 가로막은 채로.
“온 세상을 검으로 삼으면, 손과 발이 없어도 좋다. 땅을 굴러도, 몸뚱어리가 더는 움직이지 않아도 검을 휘두르고 싶더냐?”
그렇게 말하며, 소녀는 슬쩍 시선을 뒤로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퍽 인상 깊은 여인이었다.
누구나 그 순수한 면모에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오직 나를 제외하면 말이다.
나는 무심코 헛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그럼, 넌 '검혼'이 딱이다!”
검지로 나를 가리키며, 살짝 고개를 기울이는 소녀의 입술은 당찬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래, 어찌 숨기랴.
이 소녀의 정체는 '검공'.
참으로 나잇값 못하는 마스터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