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49 - 7. 질투는 나의 힘(49)
황량한 풍경에 꽃 하나가 내려앉았다.
암청빛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가 묘한 대비를 이루는 인물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로 보일 뿐이었지만, 그 외형은 단지 껍데기에 불과했다.
당장 ‘흡혈귀’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팔 하나가 토막 난 마인의 눈빛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 진득한 적의에 내 숨이 턱턱 막혀 올 지경이었다.
이곳은 흡혈귀의 결계 내부.
공간 자체가 흡혈귀의 의지로 구성된 장소였다. 당연히 술자의 진노가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일대의 기온이 내려 간다.
겨울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핏빛 달이 짐승의 눈동자처럼 새로운 사냥감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소녀는 픽, 하고 웃음을 머금었다.
실로 가소롭다는 듯이.
그 여유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흡혈귀는 이를 으득으득 갈며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잘려 나간 팔은 반절 이상 재생이 끝난 뒤였다.
이윽고 괴물의 목에서 증오로 절여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이 계집년이 감히……!”
“쯧쯧.”
허나 분노를 채 이어가기도 전.
소녀는 혀를 쯧쯧 차며 도리질을 쳤다. 들어 볼 필요조차 없다는 그 태도에, 흡혈귀의 흰자위가 더욱 붉어졌다.
“가진 힘에 비해 정신 수양이 턱없이 부족하군. 전설 속의 마인이라길래, 기대했는데… 그래봐야 편법으로 힘을 얻었을 뿐인가.”
한 마디, 한 마디가 도발이나 다름없었다.
소녀는 단지 솔직한 감상을 입에 담았을 뿐이었지만, 흡혈귀의 표정은 시시각각 구겨지고 펴지기를 반복했다. 종래에 이르러서는 도를 넘은 분노에 몸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흡혈귀가 이 소녀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한참이나 어린 꼬마가 난데없이 등장해, 팔을 토막 내고 혹평까지 남기고 있는 마당이 아닌가.
화가 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 편이 더 이상했다.
흡혈귀의 분노는 이내 공간 전체로 번져 나갔다.
웅웅거리며 떨리는 소음이 귀를 부산스레 울렸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심호흡을 반복하던 괴물이 다시 눈을 뜰 때까지.
짙푸른 안광이 도깨비불처럼 허공에 떠오른다.
흡혈귀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사나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파르르 떨리는 호선이 흡혈귀의 분노를 대변하고 있었다.
“……나름 실력에 자신이 있나 보지?”
“글쎄…….”
심드렁한 말을 입에 담으면서, 소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여전히 엎어진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사실 조금 억울한 심정이 들기도 했다.
어떻게 ‘하이 익스퍼트’가 돼도 매번 이 꼴이 난단 말인가.
아무리 상대가 ‘흡혈귀’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소녀는 도리어 내 부상이 기꺼워 보이는 눈치였다.
“……제자 앞에서 한가닥 보일 솜씨 정도는 지니고 있다만.”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 앞에서 활약을 할 기회를 잡은 것이 못내 기쁜 모양이었다.
슬그머니 올라가는 그 입꼬리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다만 흡혈귀는 더욱 어이 없다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제자?”
“그래, 제자.”
그러자 괴물의 푸른 눈동자가 나와 검공 사이를 오고 가기 시작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소녀와, 최근 명성을 드높이고 있는 젊은 기사.
쉽사리 사제의 연을 떠올리기 힘든 구도였다. 설령 사제지간이라 하더라도, 십중팔구는 후자가 스승이라고 생각하겠지.
이러한 감상은 흡혈귀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했다. 옅은 조소를 머금은 입술이 조롱을 읊조렸다.
“우리 조카사위는 대마녀의 제자라 들었는데?”
그 목적조차 불분명한 소리였다.
단순히 소녀가 의기양양해 있는 꼴이 보기 싫었을지도 몰랐다. 혹은, 사실관계를 바로하고 싶었거나.
어느 쪽이든 검공의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곧장 평정이 깨져 버렸으니까.
자그마한 몸뚱어리가 펄쩍 튀어 오르더니, 이내 경계심 가득한 시선이 흡혈귀를 향했다.
“무, 뭣?! 그게 무슨, 헛소리… 서, 설마?”
이윽고 나를 향하는 의혹의 눈동자.
나는 무어라 변명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숨쉬기조차 힘든 마당이었다. 그리고 검공은 나의 침묵을 다소 색다른 방향으로 해석하기로 모양이었다.
소녀는 으르릉, 하고 적의를 숨기지 않으며 외쳤다.
“네 이년… 그래도 남부 열왕국 출신이라고 남의 제자를 빼앗으려 왔겠다?! 도둑고양이 같이!”
“……도, 도둑고양이?”
이처럼 황당한 비난에 보일 수 있는 반응은 한정적이었다.
흡혈귀는 그중에서 ‘얼빠진 소리 내기’를 택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빛을 받으면서도, 검공은 당당히 제 가슴을 두어 번 두드렸다.
“흥, 하지만 주문쟁이 따위가 기사의 마음을 움직일 리 없지! 안타깝지만 꼬맹이는 내가 데려가야겠다.”
“누구 마음대로?”
질겅질겅.
다시금 장갑을 씹기 시작하는 흡혈귀의 주위로 핏빛 안개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전투의 전조였다.
“그 아이는, 내 조카딸의 연인이야… 그리고 내 원수의 제자고! 당연히 내가 가져야 하지 않겠어? 그러고 나서, 비웃어 주는 거야… 나를 언제나 비웃어 왔던 그 년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면서!”
“참으로 추레한 욕망이로군.”
“……추레해?”
핏발이 선 망막 위로 소녀의 담담한 표정이 맺혔다.
투둑, 투둑.
마구잡이로 씹어대던 장갑이 찢겨 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흡혈귀는 감정의 격류에 눈이 멀어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단지 쿵, 하고 발을 한 번 굴렀을 뿐.
그 정도로 충분했다.
나와 흡혈귀, 그리고 대마녀가 흘릿 핏물이 방울져 비산했다. 마치 핏방울만이 중력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듯했다.
선홍빛 물방울이 점차 떠오르는 광경은 몽롱할 만치 아름다웠다.
정작 그것이 불러올 결과는 조금도 아릅답지 않았지만.
으드득, 하고.
흡혈귀가 짓씹고 있던 장갑이 뜯어지며 실밥들이 터져 나왔다. 그토록 거친 손짓의 목적은 곧이어 드러났다.
꿈틀대던 핏방울이 날붙이를 이룬다.
칼, 창, 도끼, 심지어는 화살까지.
무엇 하나 살육을 위해 태어나지 않은 형상이 없었다. 그 숫자는 얼핏 보기에도 무려 수백.
핏빛의 무구들은 그 수만으로도 위압감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너희 따위는 모르겠지… 재능 없는 인간의 고통을, 아무리 발버둥 쳐도 따라잡을 수 없는 그 격차를! 평생 동안 누군가의 뒷모습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뼈 아픈지… 너희가 감히 짐작이나 해?”
“딱히 짐작하고 싶지도 않다만.”
고저조차 없는 목소리를 내뱉으며, 소녀는 그렇게 선언했다.
“언제나 내가 최고였는데, 뒤처진 놈들의 마음 따위 알 게 뭐냐.”
“그럼 알려줄게.”
으득, 하고 이를 갈며 흡혈귀는 서서히 왼손을 치켜들었다.
그럼에도 검공은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은 채였다. 그저 하품을 내쉬면서, 지루하다는 눈빛으로 흡혈귀를 응시할 뿐.
직후, 팽팽하던 균형이 파열음을 일으켰다.
“엎어져 하늘을 올려다 보아야 하는, 그 비참한 심정을……!”
수백에 달하는 핏빛 무구가 단숨에 소녀를 겨눈다.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날붙이의 군무는 한 치의 빈틈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피해 낼 수 없다.
설령 막더라도 몇 번이고 때려 박을 수 있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물량.
팍, 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신호였다.
무수한 핏빛 궤적이 삽시간에 시야를 가득 채웠다.
공간이 굴절되며 접합되고, 그 과정에서 마구잡이로 일그러지는 궤도가 계산을 복잡케 만들었다. 앞장 서던 창이 어느덧 뒤로 밀리고, 쳐져 있던 칼날이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기현상이 빈발하고 있었다.
압권은 핏빛 무구들이 소녀에게 근접한 이후에 보인 광경이었다.
삽시간에 지워지는 거리.
얼마쯤 떨어져 있던 무구가 갑작스레 살갗에 닿기 직전까지 다가와 있었다. 굴절된 공간을 통과하는 핏빛의 창이 죽 늘어지고 수축하기를 반복했다.
그 핏빛의 강우 속, 소녀는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윽고 자그마한 한숨이 뱉어지고.
“하늘이라…….”
나지막한 말소리, 내딛어지는 한 걸음.
그리고 일검(一劍).
‘검’이었다. 나의 모든 본능이 경종을 울리며, 그것이 검이었노라고 증언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감각에 잡히지조차 않았다. 시각, 청각, 촉각, 심지어는 직감을 동원해도 검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허공을 가득 채운 날붙이의 전진만이 일시에 정지했을 뿐.
차마 현실조차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바로 깨닫지 못했다.
이윽고 소녀가 자세를 낮추고,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갈 무렵.
와장창, 하고 온 세상이 비명을 내지른다.
박살 난 핏빛의 무구들이 꽃잎처럼 흩날렸다. 스스로 만든 환대 속에서, 소녀는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도 한때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절이 있었지.”
하지만 흡혈귀의 공세는 끝이 아니었다.
“닥쳐……!”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 끝에, 손날이 단두대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조각 난 핏빛의 무구들이 꿈틀대며 다시금 제 형상을 되찾았다. 아니, 오히려 조각 하나하나가 무구로 화(化)해 숫자는 더욱 늘어난 채였다.
그럼에도 소녀의 안색은 평온하기만 했다.
“……이제는 아니지만.”
혼잣말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무수히 들이닥치는 핏빛의 폭풍만이 소녀를 반겨 주었을 따름이었다. 창문을 두들기는 폭우처럼, 끝없이 파공성을 일으키는 피의 날붙이들을 모조리 쳐낼 수는 없었다.
팍팍팍!
진흙을 파고드는 손가락처럼 둔탁한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어느덧 소녀의 몸은 빈틈조차 없이 내리꽂힌 핏빛 무구에 둘러싸여 있었다.
흡혈귀는 그러고도 안심하지 못한 듯했다.
“바보 같이, 이곳이 어디라고 기어 들어와? 내 결계는 완벽해! 아직 미완성이지만, 이미 많은 힘을 빨아들였지… 이제 곧 대수림이 전이하기만 하면……!”
하지만 흡혈귀의 말은 채 끝맺어지지 못했다.
꿈틀, 하고 소녀의 몸을 관통했어야 할 핏빛 무구의 무덤에 떨림이 일었던 탓이었다.
그렇게 흡혈귀가 낯빛을 구기기도 전에.
검광이 번쩍인다.
그야말로 ‘번쩍’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참격이었다. 가늘디 가는 빛이 시야를 훑고 지나간 직후, 세상은 한동안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다만 오직 한 가지.
흡혈귀의 몸 정중앙을 관통하는 은빛의 실선이 하나 생겨나 있었다. 아니, 비단 흡혈귀의 몸뚱어리뿐만이 아니었다.
땅부터 하늘까지.
공간을 격한 칼날이 사소하면서도 명백한 잔흔을 남기고 지나간 뒤였다. 그제야 시간은 다시금 흐르기 시작했다.
쩌억, 하고 단면을 드러내는 공간.
허공, 핏빛의 날붙이, 흡혈귀의 육체, 그리고 지반과 하늘까지.
예외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직선의 참격이 세상을 둘로 나누고 있었다.
“하늘 베기.”
소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느덧 검집에서 살짝 삐져 나온 칼날을 갈무리했다.
달칵, 하고 맞물리는 소리.
이윽고 찢겨 나간 대기가 소름 끼치는 단말마를 토해냈다.
질풍을 맞이한 소녀의 머리카락과 옷가지가 마구잡이로 나부꼈다. 하지만 소녀는 단 한 걸음도 뒷걸음질 치는 일 없이, 나를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어떠냐, 꼬맹아. 이제 좀 검을 배울 마음이 들더냐?”
반토막 난 세상을 등진 채로.
갈라진 풍경이 기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