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50 - 7. 질투는 나의 힘(50)
나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검공’에 관한 소문이야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음에도 그랬다.
대륙 최고의 검객.
어린 시절부터 검을 다루는 솜씨가 귀신 같았고, 성인이 채 되기도 전에 ‘검룡(劍龍)’이라고 불렸다. 황실의 장남이자 무력마저 갖춘 그가 차기 황좌에 앉으리란 사실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신의 변덕일까.
이처럼 모든 것을 갖추었지만, 사내는 검을 지나치게 사랑했다.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춘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방랑길에 올랐다.
물론 이후의 행적도 유명했다. 너무나 유명해서, 따로 모험담을 모아둔 책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가 황실에 되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몇 년 후.
선대 황제가 승하한 뒤, 제 동생이 황위에 오르던 대관식 날이었다.
이미 수없이 들어왔던 이야기였다. 더불어 그 독특한 행보를 기어이 납득시키고 만 검재(劍材)까지도.
풍문에 따르면, 칼 한 자루로 하늘을 갈랐다던가.
당연히 영웅담이 으레 그렇듯 과장인 줄만 알았다. 아마도 두 눈으로 목도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그랬을 터였다.
설마하니 단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을 줄이야.
내가 할 말을 잊은 채 숨만 헐떡이고 있자, 검공은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놀랐느냐?”
“무, 무얼… 커헉!”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진심으로 묻고 싶었으나, 끓어오르는 피가 내 숨구멍을 틀어막은 탓에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그러는 나를 보고 검공은 혀를 쯧쯧 찰 뿐이었다.
“그만, 그만… 쯧, 몸뚱어리가 아주 엉망이구나. 그나마 하이 익스퍼트라 산 줄 알거라.”
그러면서 검공은 제 품속을 대충 뒤적거렸다.
이윽고 툭, 하고 던진 병 하나가 데구르르 굴러 내 앞까지 당도했다. 힐링 포션의 한 종류로 보였는데, 그 영롱한 빛깔이 얼핏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마셔라. 그나마 속은 좀 가라앉을 테니.”
너덜너덜해진 내 몸을 치료할 수 있을 정도라면, 평범한 물건은 아닐 텐데.
일순 망설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머뭇거림은 짧았다. 언제까지나 시골 자작가의 차남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슬슬 이러한 대접을 받을 만한 위치는 됐겠지.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며, 마지막 힘을 짜내 약병으로 손을 뻗으려 했을 찰나.
검공의 몸이 흠칫 굳었다.
아니, 검공뿐만이 아니었다. 온 세상이 느닷없이 팽팽히 당겨진 듯한 이 감각.
당장 치료가 급한 나조차도 멍하니 시선을 옮겼을 정도였다.
소녀의 우묵한 시선이 등 뒤를 향하고 있었다.
“푸흐, 흐흐흐흐흐……!”
그림자 하나가 비틀대며 몸을 일으킨다.
반토막 난 공간이 서서히 아물어 가고 있었다. 단면이 지나치게 깔끔했던 탓에, 다시금 제 형상을 되찾은 흡혈귀의 모습은 멀쩡해 보이기만 했다.
이죽이는 입가가 퇴폐적인 호선을 머금었다.
“아하, 아하하하하하하핫! 설마, 누구인가 했더니……!”
여인의 눈동자는 표독스러운 빛을 머금고 있었다.
살의와 적의, 그리고 질투로 번들거리는 동공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 귀기 서린 몰골을 보며, 소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괴물은 괴물이로구나.”
십분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나는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물약을 챙겼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면, 최소한 짐덩어리는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물론 괴물이 ‘괴물’이라는 평가를 신경 쓸 리는 없었다.
흡혈귀는 더욱 소리 높여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푸흡, 킥킥… ‘검공’, 당신이었구나? 설마 자진해서 그렇게 사랑스러운 의체를 뒤집어 쓸 줄은 몰랐는걸?”
“자진하지는 않았다만.”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그 낯빛에서는 은근한 경계의 기색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어느덧 허리춤을 향한 검공의 손이 이를 뒷받침했다.
소녀가 검을 뽑아 든 적은 많지 않았다. 그야, 굳이 뽑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말마따나 온 세상이 그의 검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검공이 검 손잡이에 손을 옮길 만한 까닭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진심을 내야 할 때.
일명 ‘하늘 베기’를 선보였을 때도 소녀는 검을 뽑아 들었다. 지극히 짧은 시간의 일이라 눈에 보이지도 않았을 뿐.
그러한 이적을 몇 번이나 일으켜야 저 괴물을 죽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흡혈귀는 대륙 최고의 검객을 앞두고도 여유가 넘쳤다.
“자진하지 않았다니? 당신 정도라면, 얼마든지 의체를 찢고 나올 수 있잖아… 아니면 혹시 그거야? 그 몸뚱어리로 어떻게 우리 조카사위를 유혹해 보겠다던가?”
대마녀와 자매라더니, 놀리는 부분도 닮은 점이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흡혈귀 쪽이 더욱 무례하다는 정도.
노골적인 도발이자 조롱이었다. 검공도 대마녀 때처럼 장난스레 응대하지는 못했다.
싸늘한 목소리가 지체 없이 소녀의 성대를 지나쳤다.
“내가 그대 같은 창녀인 줄 아시오?”
“그래, 그래. 우리 조카사위가 매력적이기는 하지… 아아, 큰일이다. 이렇게 노리는 사람이 많으면, 이상하게 가지고 싶어진단 말이지…….”
그나마 상대를 인정해 준다고 공대를 쓰기는 했다.
하지만 검공이 흡혈귀에게 베풀 호의는 그 정도가 끝이었다. 철컥, 하고 소녀가 엄지로 날밑을 미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은빛의 검신이 세상에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서늘한 광택만 보더라도 명검이 분명했다.
이제 곧 전투가 벌어지리라.
이를 직감한 나는 울컥 차오르는 핏물을 억지로 삼켰다. 물약을 들이키기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행히도 들끓던 내부는 금세 가라앉았다. 물약의 효용이 좋긴 좋은 모양이었다.
내가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 들었을 때였다.
“싸우려 들지 마라.”
진중한 빛으로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가 흘깃 나를 향했다.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이 나를 찍어 누르는 듯했다. 나는 배가된 중력에 옅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제 판단을 밀어붙였다.
“어차피 저 괴물은 널 죽일 수도 없다. 네가 결계의 핵을 이루고 있다 했으니… 너는 그대로 엎어져서, 탈출구를 찾아 봐.”
“탈출구까지 찾아야 합니까?”
“그래, 무언가… 이 결계는 위험해.”
결국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검공이 그리 말할 정도라면 군말 없이 따르는 것이 맞았다. 어차피 피의 제어권이 흡혈귀에게 넘어간 이상, 내가 전투에 참가해서 활약할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차라리 그새 새로운 활로를 찾아 보는 편이 나으리라.
이러한 판단 끝에 내가 몸을 일으키자, 흡혈귀의 진득한 웃음소리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후후… 조카사위, 어디 가려고? 설마 웃어른을 두고 먼저 떠날 생각은 아니지?”
“죄송하지만 이모님, 제가 두고 온 여자들이 좀 많아서…….”
별 생각 없이 맞받아친 말이었지만, 의외로 효과는 좋았다.
여유롭던 흡혈귀의 몸이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그리고 몇 초 동안이나 말이 없던 흡혈귀는, 배신감에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를 빽 내질렀다.
“……뭐?! 너 진짜 쓰레기였구나!”
지금 아셨습니까.
은근히 순진한 구석이 있는 여자였다. 수백 년 동안 남자 경험이 하나도 없기라도 했나.
입은 옷만 보면 벌써 남자 수십은 잡아먹을 것 같이 생겼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내가 등을 돌리자, 흡혈귀를 대신 막아 선 인물은 바로 검공이었다.
흡혈귀는 으득, 하고 이를 갈았지만 감히 나를 뒤쫓지는 못했다.
아무리 일대의 지배자라 한들, 상대는 대륙의 단 셋밖에 없는 마스터였다. 자칫 방심이라도 했다간 눈 깜짝할 새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함부로 손을 쓸 수 없다.
이를 잘 알고 있는 검공의 목소리는 차분하기만 했다.
“나름 한가닥 믿는 구석은 있는 모양이오. 반토막을 내놓았는데, 아직도 나불댈 혀가 남아있는 걸 보면.”
그 평탄한 어조를 듣고 난 뒤에야, 흡혈귀는 흠흠, 하고 제 신색을 되찾았다.
물론 사나운 미소를 짓는 낯빛은 여전히 흉흉하기만 했다.
“제국의 ‘검공’… 그 명성은 익히 들어 본 적이 있지. 하지만 아무리 당신이라도, 나를 죽이지는 못해.”
“결계를 믿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공간째로 참하면 그만이거늘.”
“공간이 아니야, 검공… 나는, 이곳의 인과관계를 지배하고 있는 거라고.”
살풋 입을 가리며, 흡혈귀는 고혹적인 말투를 흉내 냈다.
“보여줄까?”
“흥, 어디 한 번…….”
소녀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이었다.
콰득, 하고 소녀의 오른쪽 어깨 부위가 뜯겨져 나갔다. 비록 육체에는 상흔이 남지 않았지만, 찢어진 옷가지는 더는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슬쩍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새하얀 어깨를 드러낸 소녀의 얼굴이 참혹해졌다. 당연한 결과였다.
“……이런 씨발.”
“과연, 마스터… 심상만으로도 현실 법칙을 뒤틀 수 있다더니, 몸에는 닿지 않았네?”
푸흐, 하고 웃음을 머금는 흡혈귀를 보며 검공은 울컥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악문 잇새로 새어 나온 선언이 어느덧 분노에 절여져 있었다.
“그거 아시오? 난 당한 만큼 갚아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미거든… 곧 그 얄따란 천쪼가리를 몽땅 조각 내 주지.”
“어머, 기대되는데? 과연 누구 옷이 먼저 찢어질까?”
참으로 매력적인 대결이 아닐 수 없었다.
내게 눈 돌릴 여유가 없다는 사실이 통탄스러울 만큼.
물론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해서 눈요기를 할 수 있는 대결은 아니었다. 이윽고 공간이 찢겨져 나가며, 맹렬한 충격파가 마구잡이로 지반을 할퀴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맞부딪치는 여파마저 폭력에 다다른 충돌이었다.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두 존재가 맞부딪치는 광경은 눈 뜨고 볼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흡혈귀가 공간을 일그러트리면, 검공은 당연하다는 듯 공간을 찢고 허공을 딛으며 달려 나갔다.
말하자면 피와 참격으로 이루어진 폭풍이었다.
아직 몸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마당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도주가 최선이었다. 일단 내게 맡겨진 임무가 있기도 했고.
바로 탈출구를 찾는 것.
아무리 흡혈귀가 전설적인 마인이라지만, 본체조차 없는 상황에서 마스터와 일대일로 겨룰 수는 없었다. 작금의 대결은 아마도 이 결계의 힘을 빌린 일시적인 전력 상승 덕이리라.
그렇다면 모든 문제는 이 결계를 벗어나는 즉시 해결될 터였다.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도대체 이 밑도 끝도 없는 결계를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느냐는 수수께끼뿐.
내가 그렇게 무작정 달음박질을 치고 있을 때였다.
문득 내 귓가를 스치는 신음 소리가 하나 있었다.
“으, 으으…….”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음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