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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51)화 (551/649)

Chapter 551 - 7. 질투는 나의 힘(51)

신음 소리.

그것이 함의하고 있는 바는 맥락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이 다분했다. 하지만 그 의미가 어떻든 간에, 이러한 변수를 마주했을 때 취해야 할 선택지는 하나였다.

우선 그 진원지를 확인하는 것.

나는 의아한 낯빛으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자그마한 균열이 엿보이고 있었다.

난데없는 이변에 침묵을 지킨 지가 얼마쯤.

콰직, 하고 균열이 벌어지더니 그곳에서 가녀린 팔이 불쑥 솟아 나왔다. 그리고 몇 차례 더 헐떡이는 소리가 들어오더니, 허공의 균열이 와장창 깨져 나가며 기진맥진한 소녀의 상반신이 나타났다.

그것이 끝.

상반신을 빼낸 여인은 온 힘을 다했는지 헐떡이며 그대로 축 늘어져 버렸다. 어찌나 힘들었는지 내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마저 깨닫지 못한 기색이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나는, 그 낯익은 모습에 조심스러운 질문을 꺼냈다.

“저, 대마녀 님……?”

그러자 거친 숨을 몰아쉬던 여인의 고개가 힘겹게 들려졌다. 그제야 내 존재를 인지한 여인은 살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오, 오오… 너로구나.”

하지만 반색하는 대마녀와 달리, 나는 여전히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내 눈이 슬쩍 등 뒤를 향했다. 한창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결계의 중심부에서,는 검공이 말 그대로 천재지변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늘이 깨져 나가고, 공간이 갈라지며, 무수히 많은 빗금들이 으깨 버린 지반이 비산했다.

지진, 해일, 폭풍.

오직 검 한 자루로 그 모든 재앙을 일으키는 저 솜씨를 보라.

‘대륙 최고의 검객’이라는 칭호가 도리어 부족하다는 감상을 줄 정도였다.

하지만, 반면에…….

그러면서 내 눈이 다시금 대마녀를 향했다.

황금빛 망막 위로 맺히는 상은,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는 나약한 계집아이뿐.

나는 순수한 의문을 담아 묻는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고 계십니까?”

아무리 대마녀라고 해도, 눈치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슬그머니 내 눈을 피한 대마녀의 낯빛이 살짝 달아올랐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인지, 헛기침을 하며 어떻게든 위엄을 유지하려는 시도를 보이면서.

“흠, 흠흠… 그, 힘이 살짝 모자라서 말이다…….”

“마스터잖아요?”

그 짤막한 반문이 결정타였다.

이윽고 대마녀는 얼굴을 붉힐 대로 붉힌 채 목청을 높이고 말았다.

“나, 나도 본체만 되찾으면 이럴 일 없다고!!”

실로 억울해 보이는 호소였다.

**

대마녀는 이후에도 한동안 바둥거리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 주장은 한 줄로 요약이 가능했다.

누누이 말했다시피, 본체의 힘만 되찾으면 이까짓 결계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내 눈빛에 담긴 불신의 기색은 온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일단 공간의 틈새에 몸이 낀 채로 바둥거리는 꼴이, 위엄 있다기보다 앙증맞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던 탓도 있었다.

이러고 보니 귀엽기는 한데.

나보다 수백 년은 더 살아 온 연장자를 보고 품을 만한 감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마녀도 내가 이처럼 무례한 감상을 품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하는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울상을 지으며 내게 매달릴 리가 없었다.

“무, 무얼 그리 보고 있느냐? 당장 날 돕지 않고?!”

내 허리춤을 붙든 손에서 연약한 악력이  울먹이는 호소에 나는 흐음, 하고 침음을 삼켰다.

솔직히 좀 더 대마녀의 연약한 일면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시였고, 사사로운 욕망을 앞세워 일을 망칠 만큼 나는 어리석지 못했다.

내가 망설이지 않고 반문을 내뱉은 이유였다.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다, 당겨 다오… 힘들어 죽겠구나.”

그러지 않아도 지쳐 있던 대마녀였다.

팔다리를 바둥거리며 목소리를 높이기까지 했으니, 더욱 지친 기색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나는 군말 없이 축 늘어진 대마녀를 쭉 잡아당기기로 했다.

그렇게 끙끙거리며 대마녀의 팔을 당기기를 몇 초.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균열이 넓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막혀 있던 구멍이 뚫리듯 퐁, 하고 허공에 두둥실 떠오르는 대마녀의 몸.

나는 자연스레 대마녀의 몸을 품에 안듯이 받아 드는 수밖에 없었다.

두 팔로 받쳐 든 여인의 몸은 아담하기 짝이 없었다. 붉어진 얼굴로 내쉬는 숨결이 묘한 단내를 풍기고 있었다.

“휴, 휴우… 이제야 좀 살겠구나.”

비로소 내뱉어진 안도의 한숨을 들으며, 나는 슬그머니 대마녀가 빠져 나온 구멍을 살폈다.

하반신이 빠져 나오지 못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예를 들어, 구멍이 좁은 탓에 걸리는 지점이 존재했다던가.

나는 무심코 탄성을 흘리고 말았다.

“생각보다 골반이 있으신… 아악!”

물론 의외라는 듯 내뱉은 감상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딱, 하고.

어디선가 나타난 곰방대가 내 이마를 응징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던 탓이었다. 품에 대마녀를 안고 있는 나로서는 피할 수도, 또 아픈 부위를 보듬을 수도 없는 일격이었다.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대마녀가 폴짝 땅 위에 선 것은 그 직후였다.

여인은 팔짱을 낀 채 곰방대를 꼬나물었다. 이제야 평소의 모습을 되찾은 그녀의 시선이 향할 곳은 뻔했다.

흡혈귀와 검공의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

그곳에서는 피와 참격이 무구한 춤을 추고 있었다.

이를 목도한 대마녀의 시선이 단박에 깊어졌다.

“흐음, 결계의 완성도가 상상 이상이구나… 설마, 저 검 미치광이가 아직도 결판을 내지 못했을 줄이야.”

“도대체 흡혈귀가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내 의문은 지당했다.

앞서 말했다시피, 아무리 흡혈귀라 해도 본체가 아닌 이상 마스터의 맞수는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흡혈귀가 고백했듯 이 결계가 특수한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했다.

도대체 무슨 술수를 부렸기에.

대마녀는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오행은 ‘연(緣)’과 관련이 깊다고… 이론적으로 일대의 오행을 통제할 수 있다면, 연을 뒤틀어서 인과관계를 조정할 수도 있지.”

내 의문에 답하는 대마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도리어 나는 더욱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그딴 게 가능하다고요?”

“그래, 이 결계 안에서만… 일종의 눈속임이지. 다만, 속이는 대상이 세상일 뿐. 돌이켜 보면 마스터의 심상도 마찬가지 아니더냐? 심상 세계로 현실 세계를 압도하는 것… 이 결계는 한정적으로나마 이와 같은 기적을 가능케 하는 거야.”

대마녀가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흐음, 하고 침묵을 지키며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인과관계’를 다루는 힘은 위험했다.

당장 검공만 하더라도 심상이 강하지 않았다면 금세 죽음을 맞이했을 터였다. 막말로 사소한 손짓 하나에 ‘죽음’이라는 결과를 부여하면 누가 버틸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이 결계를 파괴할 방법은 존재합니까?”

“네가 죽으면 된다만.”

그 담백한 해답에 나는 곧장 말을 바꿨다.

“……그럼 이 결계를 탈출할 방법은요?”

“목숨을 바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진 않더냐?”

“오늘따라 가족 생각이 간절합니다.”

내게도 소중한 이들은 존재했다.

성국으로 건너 간 아내를 홀몸으로 남겨 둘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뻔뻔하다 싶을 만큼 단호한 대답에 대마녀는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눈치였다.

“방법이 없지는 않다… 다만, 네가 하기 달려 있지만.”

“대마녀께서는요?”

“나는 힘이 다했어. 그리고 내게는 따로 역할이 있거든.”

그 솔직한 고백에 파고들 틈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전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결의를 다지며 반문을 내뱉자, 대마녀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공간을 뚫어라.”

“……네?”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하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 제안이었다.

‘공간’을 뚫으라니, 이는 불가능한 조건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예로부터 시간과 공간은 복합적인 개념으로 여겨졌다. 또한 이러한 ‘시공간’은 우리가 딛고 선 배경 중 하나이지, 조작이 가능한 대상이 아니었다.

소설을 읽는 도중에 등장인물이 페이지를 찢어 발긴다고 생각해 보라.

상황 자체도 황당하지만, 그 행위가 불러올 결과 또한 참담했다. 해당 등장인물의 존재 자체가 성립하지 못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책에서 나오지도 않는 인물을 ‘등장인물’이라 부를 수는 없지 않겠는가.

따라서 ‘공간’을 조작할 수 있는 존재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흡혈귀’처럼 오랜 준비를 통해 대규모 마법을 준비하거나, ‘검공’처럼 현실 자체를 뒤틀어 버리는 절대자만이 공간에 손을 댈 수 있었다.

대마녀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흡혈귀의 결계에 들어서는 도중, 대마녀는 허공에 구멍을 뚫은 전적이 있었다. 이는 전적으로 대마녀가 온갖 진리에 통달한 마도의 정점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내게 이와 같은 중책을 맡기다니.

나로서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

“요령은 이미 알려주지 않았더냐? 내 말대로만 하면 된다.”

그와 함께 툭툭, 하고 내 팔을 두드리는 자그마한 손바닥.

나는 울컥 목젖을 치고 차오르는 반론을 삼켰다. 대마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 기억은 하고 있었다.

결계로 진입할 때 들었던 말 정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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