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52 - 7. 질투는 나의 힘(52)
‘태양을 바늘 구멍에 집어 넣어라.’
그래, 분명히 이랬었지.
그다지 귀 담아 들었던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야, 불합리하지 않은가.
어떤 의미에서는 난데없이 공간을 꿰뚫으라는 요구만큼 어이가 없는 소리였다.
노예 근성으로 유명한 마법학부 대학원생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지시가 아닌가.
하지만 내게 반론의 기회 따위는 돌아오지 않았다.
멀리서 여인의 가녀린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꺄악!”
“푸흐, 아하… 흐하하하하하하!”
그리고 뒤이어 터져 나오는, 호탕한 웃음소리.
맑고 깨끗한 음색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호쾌한 운율이었다.
나는 딱히 그 주인을 확인해 볼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목소리의 진원지는 뻔했으니까.
각각 흡혈귀와 검공이 내지른 소리일 테지.
이윽고 나와 대마녀의 눈이 멀뚱히 다시 전장을 향했다. 그곳에는 넝마가 된 옷을 가까스로 팔로 받치고 있는 흡혈귀가 보이고 있었다. 더불어 그에 못지 않을 만큼 제복 곳곳이 찢겨 나간 소녀까지도.
소녀의 눈동자는 맹렬한 승부욕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 감정을 ‘광증’이라 이름 붙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으득, 하고 이를 갈면서 검공은 목소리를 높였다.
“어떠냐, 이 괴물아! 내가 분명 말했었지… 난 받은 만큼 돌려 준다고!”
“미친년 아니야, 이거!”
묘하게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반전된 구도였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흡혈귀만큼이나, 검공의 육체에도 상흔이 남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혹시라도 ‘검공’이라는 전력이 이대로 이탈해 버린다면?
답이 없었다.
마스터에 준하는 괴물은, 오직 마스터로만 상대가 가능했으니까.
이러한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대마녀는 나지막한 한숨을 토해냈다.
“그럼, 부탁하마.”
“대마녀께서는……?”
그 반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쓰디쓴 미소와 함께였다.
“오랜만에 못난 언니와 놀아 줄 참이다. 너는 검 미치광이와 합류하거라.”
그제야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가설이 하나 있었다.
“그렇다면 검공께서 공간을 가르고, 제가 보조를 하면……!”
“아니, 검 미치광이는 안 된다. 이 결계를 이루는 술식은 오행과 관련돼 있어. 다시 말해, 비슷한 이치를 담고 있는 내 비전이 아니면 파훼가 불가능하다는 뜻이지.”
마지막 남은 희망이 파괴 당한 나를 바라보면서, 대마녀는 코웃음만을 남겼다.
“못해도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동안 준비한 결계다. 그러니 술자가 마스터와 대결을 벌일 수 있는 게야… 당연히,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되지.”
“……그렇다면 검공 어르신은 왜?”
“그래도 검객 아니더냐? 나보다는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줄지도 모르지… 그럼, 난 이만.”
그렇게 대마녀는 손을 팔랑이며 떠나갔다.
저벅저벅 내딛는 발소리에 두 여인의 이목이 집중될 때까지.
한창 전투에 집중하고 있던 흡혈귀의 낯빛에 당황의 기색이 어렸다.
“너, 어떻게……?”
“날 너무 얕보면 안 되지, 범재.”
그러면서 대마녀는 슬그머니 제 손바닥 하나를 위로 향했다.
이윽고 떠오르기 시작하는 불과, 물과, 전하.
“본신의 힘을 끌어낼 수는 없어도, 이대로도 세 원소의 힘은 사용할 수 있거든… 재능 없는 누구와는 달리, 말이야.”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그 의도가 뻔히 보일 정도였지만, 흡혈귀는 그까짓 사정을 일일이 신경 쓸 만큼 아량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도리어 열등감에 미쳐 있다면 몰라.
으드드득!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치아가 통째로 박살 나는 소리가 울려 퍼질 정도였다.
정작 당황한 쪽은 따로 있었다.
검공은 낯빛에 불쾌감마저 띄우며 대마녀를 제지하려 들었다.
“할망구, 미쳤소?! 이 괴물은 내 몫……!”
“그래? 그럼 난 그대로 꼬맹이나 가르치고 있어야겠구나.”
“……이지만 특별히 양보해 주지!”
단박에 설득이 끝난 소녀는 곧장 땅을 박차며 후퇴했다.
대마녀로서는 바라마지 않던 상황이었다.
아니, 사실은 흡혈귀에게도.
대마녀는 후우, 하고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럼에도 그 연녹색 눈동자에 떠오른 적의를 온전히 지워낼 수는 없었다.
“흐, 옛날 생각 나는데.”
“……나는, 생각 안 나.”
흡혈귀는 단칼에 말을 자르며, 핏빛 안개를 퍼트리기 시작했다.
안개에 닿은 허공이 일렁이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술이었다.
“더는 예전의 내가 아니니까, 응?!”
그리고, 폭음.
핏빛의 안개가 팽창하며 온갖 것들을 녹여 버리고 있었다. 일그러진 공간 틈새로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진홍의 칼날들이 대마녀의 연약한 살갗을 노렸다.
힘겨운 싸움이었다.
애써 태연한 척을 하고 있지만, 핏빛 안개를 마력으로 밀어내며 피의 칼날들을 밀어내는 과정이 손쉬울 리는 없었다. 심지어 핏빛 무구들이 담고 있는 운동량은 상상 이상이었다.
쿵, 쿵, 쿵!
마치 망치로 정을 때려 박는 듯한 소음.
심지어 핏빛 안개가 찢어 버린 공간의 틈새에서 온갖 자연의 힘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폭풍우와 벼락, 그리고 고열의 불길이 낼름거리며 온 세상을 덮어갔다.
나는 못내 걱정스러운 낯빛을 지우지 못했다.
단지 그보다도 먼저 나를 가로막는 인물이 있었을 뿐.
탁, 하고 우쭐해서 내 앞에 착지한 소녀의 제복은 너덜너덜하기 짝이 없었다. 실상 의상이라는 기능을 상실해서, 그 너머의 새하얀 살갗이 여과 없이 보일 지경이었다.
민망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나는 금세 시선을 피하고 말았으나, 정작 소녀는 무엇이 잘못됐는지 깨닫지도 못한 모습이었다. 검을 꼬나 쥔 손을 치켜들며 외치는 폼이 썩 기분이 좋아 보였다.
“꼬맹아, 드디어 마음을 정했느냐? 암,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 말고… 검객은 무릇 검객에게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
“저, 어르신……?”
민망한 마음에 낯짝에 얹은 손을 치우지 못하며,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자 소녀는 영문을 모르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진한 반응에 죄악감이 내 가슴을 꾸욱, 하고 누르고 지나갔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그, 나신이……!”
“응? 아, 아아아!”
그제야 검공은 무언갈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이제야 좀 편해지지 않을까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찰나.
검공이 은근슬쩍 내게 달라붙는 기척이 느껴졌다.
장난스러운 미소가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어때, 예쁘지? 응?”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눈을 부릅뜬 채 소녀를 내려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또 시야의 구석에 비치는 새하얀 살결이 있어서, 다시금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우물쭈물하며 답을 하지 못하자, 검공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그래. 당연한 욕망이지… 이해한다. 뭣하면, 만지게 해줄까?”
“아니, 무슨 소리를… 드디어 미쳤습니까, 어르신?!”
이쯤 되니 나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내가 기함해서 목소리를 높였으나, 소녀는 오히려 즐겁다는 듯 깔깔대며 웃음을 따름이었다.
설마 흡혈귀가 무언가 수작이라도 부린 걸까?
진심으로 두려워진 내가 마른침을 꼴깍 삼킨 직후였다.
“……그러지 말고, 자! 한 번 만져 보도록!”
그렇게 당당히 외치며 소녀가 내민 것은, 바로 검이었다.
본인이 들고 있던 은빛의 검.
일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낸 눈빛이 망연해졌다. 그러든 말든, 검공은 흐뭇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네가 이 검의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구나. ‘새하얀 나신’… 무려 통일제국 시절에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유물이다. 또 도공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인상 깊은데…….”
“검공 어르신.”
단칼에 말이 끊기자, 소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멀뚱멀뚱한 푸른 눈동자를 보며 망설이기를 몇 초.
결국 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를 토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대마녀께서 고전 중이십니다. 어서 가시죠.”
“흐음, 그래? 저 할망구는 고생 좀 해야 되는데 말이야.”
의외로 검공이 순순한 성격이라 다행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가슴골이나 가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나와 검공은 곧장 작전회의에 착수할 수 있었다.
“검공 어르신, 태양을 바늘 구멍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까?”
단적인 물음이었다.
그리고 이 난관의 핵심을 이루는 문제이기도 했다. 이 오묘한 질문을 마주한 검공의 반응은, 참으로 담백했다.
“흐음, 약이 부족했나……?”
“아니, 아니. 대마녀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검공은 그제야 제 품을 뒤적이던 손길을 멈추었다.
그래봐야 온통 찢겨 나간 옷가지에 속주머니가 남아있을까 싶긴 했지만.
소녀의 닫힌 입술 사이로 흐음, 하는 침음이 새어 나왔다. 그 와중에도 등 뒤에서는 끊임없이 폭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쾅쾅쾅!
이따금씩 찌르르 고막을 울리는 소리까지 추가되고 있었다. 슬쩍 보니 무수한 빛의 궤적을 그리는 구체와 핏빛 안개가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도중이었다.
그러더니 균열.
콰직, 하는 소리가 얼핏 귓가를 스친 직후에.
지축을 뒤흔드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 후폭풍만으로도 대지가 온 세상이 진동할 정도였다. 나는 갈퀴처럼 내 살갗을 할퀴는 바람을 맞이하며, 애꿎은 소녀를 닦달했다.
“무언가, 짐작이 가는 부분은 없습니까?!”
그 탓일지도 몰랐다.
“검이 하늘을 가를 수 있느냐?”
검공이 난데없는 선문답을 시작한 것은.
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