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53)화 (553/649)

Chapter 553 - 7. 질투는 나의 힘(53)

나는 일순 생각했다.

혹시 검공이 또 나잇값 못하고 장난이라도 치는 걸까?

하지만 그 무엄한 가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폐기되었다. 그리 말하는 검공의 낯빛이 무척이나 침착했던 탓이었다.

도리어 알쏭달쏭한 질문을 들은 내가 더 다급해 보일 지경이었다.

실제로 답답한 마음이 앞서기는 했고.

다만 검공 말고는 당장 기댈 곳도 없는 처지였다. 나는 울컥하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애써 언어를 짜올려야 했다.

“당연히 가능하죠! 어르신께서 보여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불가능해.”

느닷없는 단언이었다.

일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넋을 놓은 나를 두고, 검공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검 한 자루로 하늘을 가르다니, 장난하냐? 그딴 게 가능할 리가 없잖느냐.”

“하지만, 어르신께서 분명……!”

“그게 바로 심상이다.”

즉각적인 답변이었다.

내 반론 따위는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듯, 소녀는 말을 이어갔다.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심상 세계에서는 다르지. 마치 꿈이 물리 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니, 태양도 바늘 구멍을 지나갈 수 있는 거야.”

지금까지 들었던 설명 중에서는 가장 명료했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이보다 더 명징한 설명은 없어 보였는데, 그럼에도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아서.

결국 나는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지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요?”

“믿어야지.”

검공은 그렇게 말하면서, 묵묵히 나를 바라보았다.

내 눈이 자연스레 허리춤을 향했다. 그곳에는 검과 손도끼가 매달려 있었다.

‘바늘 구멍’이라.

나는 무심코 검을 손에 쥐었다. 스스로도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태양은 무엇이냐?”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바늘 구멍은?”

“……그것도, 잘.”

그러자 검공은 알 만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야 당연하지! 태양을 떠올리지 못하는데, 어찌 바늘 구멍을 떠올릴까? 아직 너는 너를 잘 모르는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잘 봐라, 꼬맹아.”

검공은 그렇게 말하면서, 조용히 내 등 위에 손을 얹었다.

바로 그 다음 순간.

컥, 하고 나는 토막 난 숨소리를 내뱉으며 눈을 부릅뜨는 수밖에 없었다. 맹렬한 마력이 소용돌이 치며 끝없이 혈도를 침투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양이었다.

‘격류’, 아니 ‘해일’이라고 해야 할까.

당장이라도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는 마력의 양은 한도가 있었다. 이는 혈도에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이만한 양이라면, 혈도가 다치는 걸 넘어 목숨을 걱정해야 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가 무어라 반박을 하기도 전.

“……이것이 ‘태양’이다.”

그 한 마디에, 나는 일순 숨을 멈추고 말았다.

내 얼떨떨한 눈빛이 팔다리를 훑었다. 한도를 초과한 마력이 혈도를 돌고 있음에도, 아직 내 몸뚱어리에는 어떠한 이상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의문이었다.

어째서 나는 아무런 이상 없이 서 있을 수 있지?

“이것이 ‘너’다, 이안 페르쿠스… 대륙의 샛별, 검혼(劍魂)을 전수받을 유일한 제자!”

불현듯 깨닫는 바가 있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지금껏 ‘심상’이 지니고 있는 특수한 힘에만 주목하고 있었다. 그야 멈춘 시간 속을 움직일 수 있었으니, 누구라도 그랬을 터였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혈도를 흐르는 도도한 마력의 흐름이 이내 충만한 힘이 되어 모세혈관 하나하나로 뻗어 나갔다. 칼날이 찬란한 은빛으로 물든 것은 그 직후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한 빛으로.

내 몸뚱어리를 타고 흐르는 끝없는 마력에 비하자면, 이 검은 어찌나 얇고 왜소한가.

마치 바늘과도 같았다.

“어떠냐, 꼬맹아…….”

검공은 마지막이라는 듯 내 등을 두어 번 두드리며,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바늘이 태양을 머금지 않았느냐?”

나는 그제야 쓴웃음을 머금었다.

과연, 왜 대마녀가 검공을 내게 보냈는지 알 만했다.

그는 무작정 몸에 때려 박는 가르침을 선호했다. 반면 대마녀의 비전은 보다 복잡하고, 섬세했다.

태양을 바늘에 담았다고?

그것으로 끝이 나서는 안 됐다.

검 손잡이를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무수한 마력의 실선들이 내 혈도를 거쳐 검으로 이어지고 있는 감각이 선명히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실선들을 조이듯 당겼다.

“……호오.”

소녀의 나지막한 탄성과 함께, 내 검에서 빛나고 있던 은빛의 오러가 단단히 응집되기 시작했다. 작게, 작게, 그리고 더욱 날카롭게.

한계까지 응축된 오러는 마치 고체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드높이 치켜든 검극이 하늘을 향했다. 칼날이 머금은 빛무리는 당장이라도 내 통제에서 벗어나고 싶어 안달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아주 조금만 더.

그렇게 내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확신이 들었을 찰나.

일섬(一閃), 하늘과 땅을 잇는 일직선의 궤적이 새겨진다.

상상했던 것은 단 한 자루의 검으로 하늘을 베던 절경이었다. 비록 세상을 반 토막 내던 그 기적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나는 그 광경을 조금이라도 재현해 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은빛의 경계선을 기준으로 공간이 갈라지고 있었으니까.

검공은 내 성공이 믿기지 않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된 거냐?”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아직도 들끓는 마력이 혈도 곳곳을 오고 가고 있었다. 단숨에 힘을 쏟아내다 보니, 혈도에 무리가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내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몇 초의 말미를 가진 뒤였다.

“글쎄요……?”

그것이 내 솔직한 감상이었다.

난생 처음 써 본 기술이었다. 당연히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얼떨떨하기만 한 나와 달리, 검공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되, 된 것 같은데? 꼬맹아, 너 진짜… 검재가 상상 이상이로구나! 설마 한 번에 해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마치 이미 알고 있던 기술을 재현해 낸 듯한 숙련도……!”

바로 그때.

와장창, 하고 은빛의 실선을 중심으로 공간이 깨져 나갔다. 허무할 만큼 시원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이윽고 그 틈새를 찢고 나타나는 인영이 하나.

자그마한 키와 고깔모자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엘시 선배’, 무심코 내가 그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렸을 무렵이었다.

“다들 멈춰!”

애절하다 싶을 만큼 절절한 감정을 담은 외침이었다.

엘시 선배의 푸른 눈동자에는 드물게도 초조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나를 흘깃 바라보는 낯빛에서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묻어 나올 만큼.

그 외침이 효과가 있었을까.

흡혈귀와 대마녀가 충돌하고 있던 지점에서 일던 소음이 멎었다. 그새를 놓치지 않고 엘시 선배는 다급한 호소를 이어갔다.

“다, 당장… 당장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해요! 바깥에, 습격자들이……!”

엘시 선배의 말은 마저 이어지지도 못했다.

쿵, 하고.

온 세상이 기우는 듯한 충격이 일어났다.

어리둥절한 시선들이 하늘 위를 향했다. 그곳에 마땅히 더 있어야 할 핏빛의 달은, 어느덧 금이 간 채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를 목도한 검공은 곧장 고함을 터트렸다.

“당장 빠져 나간다! 꼬맹아, 어서!”

이미 우리 앞에는 공간이 갈라져 있었다.

엘시 선배가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온 만큼, 우리 또한 내부에서 외부로 나가면 그만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머뭇거리며 빠져나가지 못한 까닭.

그것은 내 시선 끝에 걸린 여인 때문이었다.

대마녀가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모자에 가려져 그 눈빛에 떠오른 감정마저 읽을 수는 없었다.

내 마음을 모를 검공이 아니었다.

“이미 늦었어! 붕괴 속도가 너무 빠르다!”

그러면서 소녀는 우악스러운 손길로 내 목덜미를 쥐었다. 그리고 엘시 선배와 함께 우리 둘을 던져 버리고는, 이내 땅을 박차려 했다.

그보다 먼저 우리 앞의 공간이 무너져 내리지만 않았다면.

기묘한 광경이었다.

허공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투명한 조각들이 떨어져 내리며 온갖 장소의 풍경이 뒤섞이고 있었다.

불타는 숲.

대치하는 두 여인.

시야가 온통 그 풍경들로 물들자, 나는 미처 몰랐던 사실을 깨달았다.

두 여인의 모습이 눈에 익었다.

결계에 진입하던 때는 깨닫지 못했었는데.

검공의 판단은 재빨랐다.

“이런 씹… 어쩔 수 없다! 우리라도 당장……!”

그렇게 검공이 외치며, 반대편으로 발을 내딛은 순간.

“……안 돼!”

얌전히 쓰러져 있던 소녀 하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엘시 선배는 황망한 시선으로 허둥지둥 달음박질을 쳤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내가 되묻기도 전에.

그 자그마한 손이 무너져 내리는 공간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내 눈이 일순 검공을 향했다. 벌써 저 너머의 경계로 빠져 나가던 도중이었던 검공은, 필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꼬맹아, 제발……!”

나는 그 손을 맞잡으려다가.

무심코 등 뒤에 남은 엘시 선배를 시야에 담고 말았다.

그것이 끝.

아주 잠깐의 망설임은, 암전하는 시야로 끝을 맺었다.

"……머저리 짓도 가지가지 하는군."

얼핏 귓전을 스친 어느 사내의 탄식과 함께 말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