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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54)화 (554/649)

Chapter 554 - 7. 질투는 나의 힘(54)

무수히 많은 꿈의 단면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낯선 기억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사춘기의 베갯잇처럼 눈물로 젖은 풍광도 있었고, 사막의 모래처럼 메말라 까끌거리는 장면들도 있었다.

대부분은 악몽이었다.

피, 날붙이, 그리고 죽음.

셋 중 하나라도 존재하지 않는 기억이 드물었다.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그 사이를 거닐면서, 혈액이 돌지 않는 뇌리로 사고했다.

아마도 인상 깊은 광경들만 남은 탓이리라.

전쟁만큼 무의식에 깊은 상흔을 남기는 경험은 드물었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예외는 아닐 터였다.

내 무의식의 공간도 이럴까.

길포드, 미트람, 레오릭, 유렌…….

하나둘씩 떠오르는 이름을 속으로 읊조리며 걸음을 옮기기를 얼마쯤.

문득 내 시야를 가득 메우는 풍경이 하나 있었다.

울고 있는 사내의 등이었다.

품에 안은 여인의 시체는 싸늘했다. 새파랗게 질린 피부와 더는 습기 있는 숨결을 내뱉지 못하는 입술,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들이 반파된 숲을 적셨다.

사내는 한참이나 울고 있었을 것이다.

시체의 온기가 식을 때까지는 그만한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다시금 걸음을 내딛으려 했다.

여태껏 모든 기억들을 그렇게 스쳐 지나갔으니까.

하지만 내 발목을 붙잡는 말소리가 하나 있었다.

“애송아,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피로가 잔뜩 배인 목소리.

내 시선이 멀거니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음울한 금빛 조명이 외로이 떠 있었다.

사내였다.

그는 어느덧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지반에 꽂아 놓은 검이 지팡이처럼 사내의 몸을 지탱했다.

내 동공이 두 사내의 모습을 번갈아가며 훑었다.

저 앞에서 울고 있는 사내와, 눈물샘조차 메말라 버린 사내.

한참을 침묵을 지키던 내 입술이 달싹였다.

“……그래도, 저때는 눈물을 흘릴 줄도 알았나 보지?”

“아직 어렸으니까.”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저벅저벅 울려 퍼지는 그 발소리마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사내는 나를 지나쳐, 땅에 박힌 못처럼 우두커니 섰다.

그 황금빛 망막 위로 과거의 풍경이 지나가고 있었다.

죽은 사매, 죽은 스승, 마지막으로 그 앞에서 눈물 흘리고 있던 자신.

“모든 비극이 세상의 억지처럼 느껴졌지. 소중한 사람들을 하나둘씩 잃을 때마다 그랬어.”

“이제는 그러지 않나?”

“비극이 평범한 시대였거든.”

묵직한 진술이었다.

나는 그 한 마디에서 어떠한 실마리를 보았다. 사내가 굳이 과거까지 찾아와, 제 세상도 아닌 곳을 지키려 분투하는 까닭을 말이다.

“나뿐만이 아니야. 모두가 그랬지… 가족이나 연인을 잃은 정도는 우스워. 마을 하나가 사라지거나, 팔다리를 잃은 채 절뚝거리며 창을 꼬나쥔 병사들도 많았다. 그리고 죽음이 차라리 나은 꼴을 당한 사람들도.”

한숨조차 섞이지 않은 음색이었지만, 도리어 그 잔잔한 어조가 증언의 진실성을 배가시켰다.

내 뇌리에도 남은 기억들이 있었다.

살점 씨앗의 재료가 된 고아들과, 악신에게 영혼을 바친 엘프들.

그들은 죽음보다도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심지어 그마저도 지극히 일부에 불과할 터였다.

암흑교단이 대륙에서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을지는, 오직 암흑교단만이 알고 있었다.

내 눈앞에 선 사내를 제외하고는.

“……네가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찾아올 미래다.”

사내의 금빛 눈동자가 다시금 나를 향했다.

얼음 호수처럼 투명한 망막 위로 옅은 수심에 잠긴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러니 앞으로 멍청한 짓은 하지 마라. 네 안위를 우선적으로 챙기란 말이다… 흡혈귀의 오행진은 시공의 평형으로부터 어긋나 있어. 만일 결계가 붕괴하면 일대가…….”

“……엘시 선배는?”

그러다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얼굴에, 나는 곧장 반문을 입에 담았다.

사내는 대답 대신 입을 다무는 편을 택했다.

“대마녀께서는 어떻게 되셨지? 일대가 붕괴한다며!”

“너는 신경 쓸 필요 없다.”

차가울 만치 무심한 대답이었다.

나는 그 말에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가, 이내 묘한 감상에 빠져들었다.

대마녀는 몰라도, 엘시 선배는 내 동료였다. 비록 그 몸뚱어리를 미래의 인격이 차지하고 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죽은 육체에 엘시 선배가 되돌아올 리는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사내는 내게 단언했다.

나’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그렇다면 나 말고 그들을 걱정해야 할 인물이 누가 있단 말인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래도 걱정은 되나?”

조롱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이 반문을 꺼내기 위해 신중히 말을 고르기까지 했다. 사내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솔직한 심정을 들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사내는 내 물음에 한동안 답을 주지 않았다.

단지 묵묵히 시선을 우는 사내의 등판으로 향했을 따름이었다.

침묵을 견디다 못한 내 입에서 또 다른 의문이 새어 나왔다.

“당신 스승이잖아.”

“내 스승은 아니지. 그분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으니까.”

“당신 사매고.”

“그건…….”

무어라 반론을 내놓으려던 사내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는 드물게도 노골적인 감정의 변화를 보이는 중이었다. 두 손으로 낯가죽을 훑어 내리고, 깊이 심호흡을 하는 모습까지.

내가 착잡한 심정일 때 보이는 버릇이었다.

그렇게 보면, 저 사내는 내가 맞기는 했다.

“……이미 끝난 이야기야.”

“어째서?”

“지금 와서 만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

난제였다.

일순 말문이 막힌 내가 침묵을 지키자, 사내는 한숨 섞인 읊조림을 이어갔다.

“이제 와서 뭘 어쩌라는 거지? 다시 만난다고 해봐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서 싫다고?”

“비효율적이니까.”

칼 같은 단언이었다.

사내는 재론의 여지 따위는 없다는 투로 재차 말했다.

“말했잖냐, 애송아. 내가 이 시간대에 개입할 수 있는 정도에는 한계가 있어… 그런데 그 소중한 기회를, 아무 의미 없이 날려 버리자고?”

“아무 의미가 없지는 않……”

“이미 끝난 일이다.”

벌써 두 번째.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얼굴에는 묘한 쓸쓸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 까닭은, 어떠한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테지.

이러한 추측은 얼마 지나지 않아 증명되었다.

울고 있는 과거의 한 단면에서 눈을 돌리지 않은 채로, 사내는 쓰디쓴 읊조림을 입에 담았다.

“이미 많이 울었고, 많이 후회했어…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 유일한 해답은, 더는 후회할 만한 일을 남기지 않는 것뿐이야.”

그 단단한 목소리에는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말 돌리기 따위가 아니었다. 아마도 저 말은 숨김 없는 사내의 신념이리라.

“……그래도 돌이키고 싶잖아.”

“그 후회를 딛고, 내가 이 자리에 섰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비극 끝에…….”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사내는 언제나 그렇듯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제멋대로 대화를 중단했다.

잔불처럼 흐릿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뒷수습까지는 해주지. 다시 말하지만, 다음부터는 머저리처럼 굴지 마. 네 목숨을 가장 소중히 여기란 말이다.”

그러면서 사내는 다시 걸음걸이를 내딛었다.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향하는 그 등이 퍽 외로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흘깃 울고 있는 사내의 기억을 살폈다.

검은 머리카락이 인상 깊은 여인이 품에 안겨 있었다. 자세히 보니, 흡혈귀를 닮은 얼굴이기는 했다.

대마녀의 본체는 이렇게 생겼구나.

숨이 넘어갈 듯 우는 사내의 낯빛에서는 증오조차 엿보이지 않았다. 단 한 방울의 물조차 더는 담아낼 수 없을 만큼 슬픔에 짓눌린 모습이었다.

어째서 이만큼이나 슬퍼하는 걸까.

나는 무심코 손을 뻗었다. 그야말로 별다른 의도 없이 저지른 짓이었다.

그러나 내 손이 울고 있는 사내의 화상에 닿는 순간.

훅, 하고 바닥이 열리는 감각이 나를 엄습했다.

난데없는 추락 끝에서 나는 무수한 기억의 해일을 맞이했다. 웃음 소리, 우는 소리, 그리고 수많은 인물들이 물가처럼 어우러지며 형형색색의 불꽃을 터트렸다.

이제는 낯익은 경험이었다.

나는 얼마간 사내의 기억 속을 헤맸다. 타인의 기억 속에서, 타인의 행색을 하고 타인의 감정을 느낀다는 건 독특하다 못해 폭력적인 경험이었다.

몇 달, 혹은 몇 년의 세월을 단숨에 때려 박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불현듯 정신을 되찾은 나는 강한 현기증에 신음했다.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는 내 기척에도, 사내는 변함없이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이대로 어딘가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이.

그래서 나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성대를 비틀어 짜냈다.

“……잠깐!”

우뚝 사내의 걸음이 멎는다.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사내의 뒤를 쫓았다. 그래봐야 몇 걸음을 내딛은 이후에는,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했지만.

사내는 여전히 나를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내가 한 마디를 꺼내기 전까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이 만나 봐야겠는데.”

헐떡이면서 내뱉은 소리에, 그제야 사내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 메마른 눈동자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감정은 몇 없었다. 아니, 이처럼 감정의 편린이라도 드러날 때가 드물 정도였다.

그렇다.

지금 사내는 동요하고 있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당신 사매.”

우묵히 날 향하는 금빛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 또한 그 시선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황량한 벌판에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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