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55 - 7. 질투는 나의 힘(55)
기억, 기억, 기억.
이보다 다양한 어감을 주는 낱말이 존재할까.
곱씹을 때마다 새로운 맛이 나는 음절이었다. 과육처럼 달콤한 향취를 풍길 때도, 흙처럼 풋풋한 쓴맛이 날 때도, 비릿한 피 맛이 지워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사내의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대수림의 밤은 차디찼다. 내리쬐는 태양의 열기가 가신 숲은 여전히 열기를 품고 있었지만, 한결 서늘해진 바람이 선선한 느낌을 주었다.
습도는 고온만큼이나 저온에도 예민하기 때문이었다.
대수림의 주민들이 밤을 차다고 착각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슴푸레 밝아 온 달이 비스듬히 밤하늘에 걸친 심야.
흐느끼는 소리가 정적에 잠긴 숲을 울리고 있었다.
“흐윽, 흑… 진짜, 나쁜 새끼…….”
대수림의 중심부, 전설 속의 괴물을 가둔 결계를 유지하는 심장.
그곳에는 오두막 몇 채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마을이 위치하고 있었다.
남부 열왕국의 국사(國師)이자, 모든 원소의 주인이라 불리는 ‘대마녀’가 기거하는 장소였다.
워낙 외딴 곳에 자리한 거처이기는 했다.
주민이라고는 단 셋밖에 없는, ‘마을’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달라지지 않는 사실은 존재했다.
삶을 연명하기 위해서는 취수원(取水原)이 필요하다.
아무리 위대한 ‘대마녀’라도 이 대전제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대수림의 중심부에는 몇몇 수원지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한 비경이 하나.
일명 ‘신비의 샘물’이었다.
세계수의 뿌리로부터 솟아오르는 깨끗한 물은 풍부한 마력을 함유하고 있었다. 밤에도 수면 위로 빛의 입자가 떠도는 연못은 황홀한 절경을 연출했다.
아름다운 풍광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멋진 광경을 앞두고, 내 귓가를 간지럽히는 소리가 고작해야 울먹이는 소리라니.
실로 한탄스러운 신세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슬쩍 등 뒤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갈색 머리카락에, 고깔 모자가 인상적인 소녀가 주저앉아 있었다.
끊임없이 흘러 넘치는 눈물을 닦으면서.
나 또한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었다. 어여쁜 여인이 눈물을 흘리고 있으면, 이를 닦아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까닭은, 그 눈물의 원인이 내게 있던 탓이었다.
나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사유였지만 말이다.
“그만 좀 우세요, 사매… 혼자 청승맞게 울다 들킬 수도 있죠. 사는 게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내 핀잔에도 소녀는 울컥해서 목소리를 높였을 따름이었다.
“그, 그게 문제라고! 그리고, 나 ‘사매’ 아니라니깐?!”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었다.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지금이야 질질 짜고 있다지만, 예전부터 그 성깔 하나는 유명하던 여인이었으니까.
‘싸움개’ 엘시 라이넬라.
내 아카데미 1년 선배이자, 끝내 마법학부 차석으로 졸업장을 받은 수재였다. 인형 같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거친 언사와 성미로도 잘 알려져 있기도 했다.
오죽하면 아카데미 생활 내내 귀가 따갑도록 그 악명을 들어와야 했을까.
‘금사자’ 델핀 유르디나, ‘눈 먼 뱀’ 시엔 황녀와 함께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삼인방 중 하나였다.
이처럼 학창 시절에는 엮이지 않기 위해 애를 썼던 여인이었다. 헌데 이 낯선 오지에서 단 둘만이 남아, 스승의 수발을 들고 있는 신세라니.
참으로 기구한 인연이었다.
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오늘 혼난 게 그렇게 신경 쓰였어요?”
“내, 내가 뭘…….”
“오늘 밥 태워먹었잖아요. 제자 노릇만 벌써 3년째인데, 아직도 불 조절도 못한다고 욕 먹었으면서.”
내 날카로운 지적에 엘시 선배는 윽, 하고 옅은 신음을 흘렸다.
정곡을 찔린 모양새였다.
하기야, 그때부터 유독 우울해 보이기는 했으니까.
이래저래 한 지붕에서 살아간 지가 벌써 햇수로 3년이 넘었다.
아무리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고 마는 것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분명 엘시 선배도 내 기분이 훤히 들여다 보일 때가 있으리라.
그렇기에 섣불리 내 말을 부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답 대신 침묵을 지키고 있는 소녀를 향해, 나는 나지막한 위로를 건넸다.
“스승님도 그렇게 화낼 생각은 아니었을 거예요.”
돌아오는 메아리는 없었다.
엘시 선배는 제 얼굴을 더욱 깊이 파묻었다. 풀 죽은 눈빛이 흐릿한 달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오늘은 두 원소를 섞어 쓰다 실패한 거잖아요. 자칫하면 엘시 선배가 위험하니까…….”
“……알아.”
툭, 하고 내던지듯이.
그렇게 진심을 말하는 소녀를 위해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는 내가 침묵할 차례였다.
“내가 그 할망구 생각을 모르겠어? 밑에서 개 같이 구른 지가 벌써 3년인데… 나, 엘시 라이넬라야. 수재 중의 수재라고.”
“그런데도 눈물이 나요?”
“화 나잖아.”
이슬이 맺힌 눈동자는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밤의 마성이 나를 사로잡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 소녀까지도.
달빛의 마법에 홀린 여인은 부끄러움도 없이 제 진심을 털어놓았다.
“나는, 이렇게 멈춰 있을 틈이 없어… 어서 강해져야 한다고. 누구도 날 무시하지 못할 만큼…….”
“지금도 무시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네가 뭘 알아?”
울컥해서 내뱉은 말은, 딱히 나를 향한 원망으로 물들어 있지는 않았다.
애초에 진심조차 아니었다. 엘시 선배의 분노는 일종의 방어기제에 불과했으니까.
겉보기와 달리 유달리 심약한 소녀였다.
제 나약한 알맹이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녀는 이따금씩 강한 체를 했다. 그래야만 남들이 스스로를 깔보지 않을까 싶어서.
소용없는 짓이었다.
“진정한 귀족의 세계에서는 가족 따위 존재하지 않아. 오직 경쟁자, 물어뜯어서 끌어내려야 할 적들만 존재할 뿐이라고… 그런데 누구도 날 비웃지 않는다고? 천만에! 언제든 날 무시하고 짓밟으려 애쓸 놈들 천지지. 유일한 가족이라고 할 만한 사람을 잃은, 내 마음을 네가……!”
그러나 엘시 선배는 제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스스로 흠칫 놀라 말끝을 절었던 탓이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눈동자 위로, 말없이 소녀를 응시하는 내 모습이 맺혀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족을 잃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니, 실은 가족뿐만이 아니었다. 내 어린 시절은 그날 모조리 불타 버리고 말았다.
가문과 영지를 잃은 귀족의 마음을 어찌 짐작이나 하겠는가.
나 또한 알고 싶지 않았다.
말실수를 깨달은 엘시 선배는 황급히 내 시선을 피했다. 죄악감으로 물든 목소리가 더듬거리며 자그마한 입술의 틈새로 새어 나왔다.
“미, 미안… 실수였어. 결코 진심은 아니었……!”
“알아요. 우리 사이잖아요.”
엘시 선배가 안절부절 하지 못하며 고개를 숙이기 직전.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그맣게 헛기침을 했다.
내뱉고 보니 어감이 묘했다. 평소라면 사매가 이를 빌미로 나를 놀려대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의외로 사악한 미소를 짓거나 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입을 꾹 다문 채, 슬쩍 얼굴을 돌렸을 뿐.
그 낯빛이 발그스름했다. 오늘은 달이 너무 밝은 탓일지도.
나는 애써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막아 보고자 갖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니까, 뭐냐… 너무 강한 척 할 필요 없다고요. 앞으로는 울고 싶은 일 있으면 제 앞에서 울어요.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도 용기 아니겠습니까? 혼자 울다 들키니까 더 부끄럽잖아요.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가 뭔데?”
난데없는 반문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짙은 여인의 향취를 풍기고 있어서, 나는 차마 입술을 달싹이지는 못했다.
단지 시선을 피하며 못 들은 체를 했을 뿐.
그럼에도 엘시 선배는 이대로 단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훅, 하고 달콤한 체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어느덧 소녀의 상반신이 내게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두 손으로 땅을 짚기까지 한 여인의 눈동자에는 강한 의지가 머무르고 있었다. 무얼 향한 의지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사매는 재차 내게 물었다.
“우리 사이가 뭐냐고.”
“그야, 그건…….”
그렇게 말을 더듬으며, 난감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찰나.
숨결이 와 닿았다. 서로의 숨소리가 속삭이듯 들리며, 두 눈의 거리를 재기도 전에 그 미모에 홀려 버릴 듯한 간격이었다.
들숨과 날숨을 몇 번이나 뒤섞었을까.
엘시 선배의 눈꺼풀이 슬그머니 닫혔다. 달빛을 흘리는 속눈썹이 오늘따라 유독 아름다워 보였다.
망설이고, 머뭇거리다.
내 손이 서서히 엘시 선배의 뺨을 향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이대로…….
“……쯧쯧, 잘들 놀고 있구나.”
“꺄, 꺄아악?!”
그 혀 차는 소리에 먼저 비명을 내지른 쪽은 엘시 선배였다.
경기라도 일으키듯 엉덩방아를 찧은 그녀의 눈빛에는 공포마저 어려 있었다. 그 시선의 끝에서, 꼬리를 물고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우리의 스승, ‘대마녀’였다.
겉보기로는 엘시 선배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소녀가, 곰방대를 꼬나 문 채 스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가 무슨 사이냐니? 사제지간은 가족과 같으니, 너희도 남매지간이 아니더냐. 고얀 놈들, 내가 예전부터 몇 번이나 말했거늘… 쯧쯧……”
얼핏 듣기에는 제자를 혼내는 스승과 같은 말투였다.
하지만 나와 엘시 선배는 알았다. 그 못마땅한 음색에서 심술이 묻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지 않아도 다혈질인 엘시 선배였다.
너무 놀라 이성을 상실한 그녀는 이내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아니, 이 할망구가… 진짜 미쳤나! 한창 분위기 좋았는데 무슨 짓… 꺄으아악?!”
물론 그 결말은 언제나와 같았지만 말이다.
딱, 하고 대마녀가 손가락을 퉁기는 동시에 엘시 선배를 향해 한 줄기의 낙뢰가 떨어져 내렸다. 불쌍한 엘시 선배는 불의의 일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바르르, 몸을 떨던 엘시 선배의 몸이 풀썩 엎어졌다.
감전의 후유증으로 근육이 마비된 것이다.
아무리 마스터에는 이르지 못했다지만, 전격 마법을 특기로 하는 마법사를 이처럼 단숨에 제압하다니.
나는 등을 타고 흐르는 한 줄기의 식은땀을 느꼈다.
“……나이 이야기는 금지.”
그 상쾌한 선언을 마지막으로, 대마녀는 이제야 속이 시원하다는 듯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엘시 선배가 부스스 몸을 일으킬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뚱한 표정을 한 엘시 선배는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대마녀 또한 비슷한 감상이었는지, 옅은 웃음을 터트리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푸흐흐, 꼴이 꼭 벼락 맞은 강아지 같구나!”
“……진짜 나중에 두고 봅시다, 스승님.”
으득으득 이를 가는 소리에도 대마녀의 웃음소리는 높아지기만 할 뿐이었다.
언제나와 같은 풍경이었다.
비로소 안심이 된 나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끝인가, 하고 내가 슬슬 발걸음을 돌리려던 무렵.
“다만, 빈말은 아니다.”
대마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뒷짐을 지고 달을 올려다보는 그 모습이 어딘가 쓸쓸하면서도 흐뭇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