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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56)화 (556/649)

Chapter 556 - 7. 질투는 나의 힘(56)

“가족 없이 홀몸인 신세야, 우리 셋 다 마찬가지 아니더냐? 그러니 서로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관계를 가족이라 부를 수밖에… 그래봐야 말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지켰다.

대마녀가 이처럼 부끄러운 말을 건네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 의도가 무엇일까 고민해 보다가, 이윽고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대마녀도 엘시 선배를 혼낸 일을 신경 쓰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위로를 해 보겠다고 이처럼 쑥스러운 말까지 입에 담았으리라. 살짝 붉어진 볼만 보더라도, 대마녀가 나름 부끄러워 하고 있단 사실은 명확했다.

엘시 선배도 이를 모르지는 않았던 듯했다.

퉁명스러운 낯빛을 유지하면서도, 일부러 시선을 피해 부끄러움을 감추려 드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러다 기껏 짜낸 말은 혼잣말을 가장한 불안이었다.

“……흥, 말은 잘해요. 그러다 수백 년 지나면 또 잊어 버리는 거 아니야?”

“내가 너희를 어찌 잊겠느냐?”

대마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달빛을 등진 소녀의 미소는 어여뻤다. 그래서 나는 내심 두 사제가 묘하게도 닮았다는 감상을 품고 말았다.

솔직하지 못한 점이나, 웃는 낯이 유달리 예쁘다는 점이나.

대마녀와 엘시 선배는 누가 뭐래도 사제지간이라 할 만했다.

“자고로 가족이란 언제, 어디서 보더라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하거늘… 심지어 너희는 내가 직접 가르친 제자들이다. 스승이 돼서 어찌 알아보지 못하겠느냐?”

“……진짜로?”

그럼에도 끝내 일말의 불안감을 떨쳐 내지 못한 음색.

불우한 성장 과정을 거친 엘시 선배는, 이처럼 가족과도 같은 관계에 강한 집착을 보이곤 했다. 속으로는 비웃으면서도 내심은 동경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숨김 없이 서로를 지지해 주는 관계.

결코 서로를 배신하지 않는, 서로의 구원자들.

그래서 대마녀는 시원스레 단언했다.

“당연하지! 이 스승이 언제 거짓말을 한 적이 있더냐?”

나는 그 말에 씁쓸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사실 거짓말을 한 적은 많았다.

예를 들어, 시내에서 사온 엘시 선배 몫 푸딩을 몰래 먹고 오리발을 내민다거나.

하지만 이제 와서 눈치 없이 그딴 소리를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단지 나는 바랐다.

새로운 가족이 된 우리 셋의 관계가, 영원토록 이어지기를.

실로 허망한 꿈이었다.

이처럼 흔해빠진 소망마저 과한 욕심이 될 만큼, 시대는 지옥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사랑은 전장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다.

**

‘엘시’는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눈을 떴다.

오래 전의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이 시대가 아니라, 제 추억이 담긴 세계의 기억이었다.

그리고 또 구석에 처박힌 소녀의 모습을 본 것 같기도.

어느덧 세상의 경계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뒤죽박죽 섞인 공간들이 전위적인 예술 작품들을 그려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혼탁한 회상이 뒤섞인 풍경은 오묘하면서도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야말로 세상의 끝이었다.

결계로 만들어진 작은 세계가 붕괴하고 있었다. 아무리 소규모라지만, 하나의 세상이 붕괴하는 충격을 일개 인간이 감당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지금만 해도, 보라.

엘시의 몸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뒤였다. 무너져 내리는 공간의 틈새에 잠깐 끼었을 뿐인데도 이 꼴이었다.

이대로는 죽는다.

죽음 따위는 이미 한 번 경험해 본 뒤였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겪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도리어 무섭기까지 했다.

이 몸뚱어리는 ‘엘시’의 것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멀쩡히 살아가고 있던 소녀의 육체였다.

이성적으로는 결코 위험한 길을 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왜, 엘시는 죽음을 무릅쓰고 몸을 내던졌는가.

그것은 본능이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원초적인 욕망.

몇날며칠을 후회와 자책으로 스스로를 상처 입히며, 끝내는 이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맹세했던 과거의 연장이었다.

그래서 힘에 집착했고, 나약한 내면을 숨기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엘시는 헐떡이는 숨을 들이키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망가진 세계의 곳곳을 훑는 그 시선이 매서웠다.

어디에 있지?

해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옅은 신음소리가 소녀의 귀에 포착되었으니까.

“끄으, 윽… 흐으…….”

가까스로 통증을 억누르는 소리였다.

엘시는 곧장 그 진원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워낙 공간이 엉망진창으로 왜곡되어 있었지만, 그 검푸른 머리카락을 착각할 리가 없었다.

‘대마녀’다.

헐레벌떡 걸음을 옮기자, 땅 위에 쓰러진 대마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몸 곳곳에 자잘한 상흔이 남은 몰골이었다. 더불어 제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는 그 몸짓에서, 여인이 앓고 있는 두통의 크기가 엿보이고 있었다.

“기, 기억… 끄으… 기억이……!”

그 혼잣말을 해석할 여유 따위는 남아있지 못했다.

엘시는 마지막 힘을 짜내 대마녀의 몸을 부축했다. 거친 숨결을 애써 가라앉힌 소녀의 목소리는 필사적이기까지 했다.

“이봐, 할망구! 괘, 괜찮아? 내가, 내가 어떻게든……!”

“바, 보 같은 년……!”

그러나 호의에 되돌아 온 것은, 이처럼 차가운 힐난이었다.

엘시는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그러든 말든, 대마녀는 이글거리는 눈빛을 한 채 엘시를 노려볼 따름이었다.

“공간진의 붕괴에 휩쓸리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어, 차원계의 미아가 될 수도 있단 말이다……! 네 실력으로 그곳을 탈출이나 할 성 싶으냐? 제 실력도 가늠하지 못하고 개죽음을 당하라고, 내가 그리 가르쳤어?!”

“그게, 무슨 소리…….”

“당장 혼자서라도 떠나!”

엘시는 혼란스러웠지만, 대마녀는 단호했다.

대마녀는 스스로의 이상을 눈치조차 채지 못한 모습이었다. 애초에 두통 때문에 제정신이 아닐 테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으르렁거리는 그 목소리에서는, 한 점의 거짓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활로를 잘 찾으면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이 결계는 오행을 기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술자만 이 공간에 남아있다면……!”

바로 그때였다.

우지끈, 하고 장대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결계를 유지하고 있던 기둥이 박살 나는 소음이었다.

하늘을 받치고 있던 공간에 일제히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그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가고 있어서, 감히 손을 댈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이를 목도한 대마녀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늦었구나.”

엘시는 그에 별다른 감상을 덧붙이지 않았다.

전적으로 동감하는 중이었으니까.

우르릉, 하는 굉음과 함께 하늘이 점차 붕괴하고 있었다.

하나둘씩 깨져 나간 파편이 땅바닥에 처박힐 때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폭음과 함께 지반에 파도가 일었다. 거목이 부평초처럼 흔들리며 뿌리째 뽑혀 나갔다.

끝이구나.

마른침을 삼키며, 엘시는 그렇게 직감하고 말았다.

누구도 이 상황을 뒤집지는 못했다. 산을 분쇄하고, 하늘을 벤다는 전설의 마스터들도 무너져 내리는 세계에서 어찌할 도리를 찾을 수는 없으리라.

유일한 희망은 오직 대마녀뿐이었다.

수백 년을 산 절대자의 낯빛에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 파편처럼 떠올랐다. 고뇌, 망설임, 이윽고 결심.

으득, 하고 이를 악문 대마녀의 입술에서 핏물이 배어나왔다. 만일 이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대마녀는 모종의 결단을 내렸을지도 몰랐다.

그래, 이변이 없었다면.

‘은하수’.

난데없이 하늘에 은하수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그야말로 찰나, 해일처럼 세상을 덮쳐 가는 은빛의 파도는 도도한 강물을 이루고 있었다.

“아…….”

무심코 탄성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은빛의 안개가 하늘을 절반으로 가르며 퍼져 나갔다. 그 안에 총총히 담긴 별빛들이 몽롱한 풍경을 연출하며, 무너져 내리는 세상의 중심에 기나긴 궤적을 만들었다.

우우우우웅!

세계는 비명을 내지르며 제 몸을 뒤틀고 있었다. 무언가 위험을 직감하기라도 한 듯이, 흔들리는 공간이 거친 비명을 토해내며 마지막 발악을 시도했다.

헛된 발악이었다.

콰직, 하고.

결계에 일었던 균열이 더욱 그 크기를 넓혀갔다. 아니, 이는 균열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었다.

단면.

무수히 많은 검흔이 세계를 통째로 해체하고 있었다. 무너져 내려도 아무런 피해도 일지 않을 만큼, 작디 작은 가루로 화한 결계의 파편이 별빛이 되어 흩어졌다.

무어라 감탄을 덧붙일 새도 없이 순식간이었다.

뒤죽박죽 얽혀 있던 주위의 풍경이 하나둘씩 지워져 나갔다. 그 자리를 다시 채우는 것은, 낯익은 숲의 풍광이었다.

결계 밖에 위치해 있던 아카데미의 숲.

엘시는 귀신에게 홀린 심정이었다. 말했다시피, 세계 하나가 붕괴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단 몇 초만에 세상이 산산조각이 나다니.

붕괴하는 공간을 도리어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는 발상은, 참신하다 못해 미쳐 있었다. 이처럼 단순무식한 해결 방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이 전제되어야 한단 말인가.

혹시 마스터?

엘시의 눈동자가 멍하니 대마녀를 향했다. 그러나 대마녀 또한 놀란 낯빛을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최소한 대마녀가 알고 있는 후보군 중에는 없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이러한 의문을 담고 있던 엘시의 눈동자에 낯익은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저 멀리에서, 묵묵히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사내의 등.

어째서일까.

그 쓸쓸한 그림자를 보자마자, 엘시는 덜컥이며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안.”

이후에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엘시는 대마녀를 다시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허겁지겁 달려 사내의 뒤를 쫓았다. 사내는 이제 막 땅을 박차고 사라지려던 찰나였다.

소녀의 목소리가 더욱 간절해졌다.

“이안, 이안, 이안……!”

위태롭게 비틀거리는 몸뚱어리는 당장이라도 땅바닥을 구를 듯했다. 지나치게 무리하고 있다는 뜻이었지만, 엘시는 제 몸뚱어리가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내의 금빛 눈동자가 흘깃 등 뒤를 향했다. 메마른 시선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쌀쌀맞을 만큼 냉담한 태도.

엘시가 달려오든 말든, 사내는 이대로 떠날 심산으로 보였다. 그대로 무릎을 굽히는 자세가 도약을 예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파직, 하고 땅에서 전하가 일었다.

그래봐야 사내가 흠칫 굳을 정도의 틈새밖에 만들지 못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산소조차 통하지 않는 뇌로 가까스로 짜낸 수단이란 이토록 무력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사내는 마저 도약을 하려 했다.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않았다면.

사내의 흠칫 놀란 시선이 다시금 등 뒤를 향했다. 기어코 달리다 땅을 구른 엘시의 몸이 몇 바퀴를 굴러 사내의 지척까지 당도했다.

그러고도 엉금엉금 기어, 두어 걸음.

흙투성이가 된 소녀의 손이 사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하아, 하아… 이안, 너구나..”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두 남녀의 시선이 비로소 허공에서 맞물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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