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57 - 7. 질투는 나의 힘(57)
은하수가 펼쳐진 하늘은 고요했다.
달빛마저 은빛의 강물 앞에서는 그 찬란한 자태를 자랑하지 못했다. 무너져 내린 결계의 파편들이 꽃가루처럼 흩날렸다.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평생의 반려를 정하는 결혼식조차 이보다 호화롭지는 않을 터였다. 어느덧 두 남녀가 선 자리는 숲의 공터로, 달과 별이 하객이 되어 얌전히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을 무렵.
흘깃 등 뒤를 향하고 있던 사내의 금빛 눈동자가 정면을 향했다.
한 줌의 미련조차 묻어나오지 않는 태도였다.
소녀의 가녀린 손이 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음에도, 그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딛었다. 연약한 악력 따위는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다는 듯.
다만 그가 차마 계산하지 못했던 변수가 하나 있었다.
바로 사내를 붙들고 있는 소녀 또한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질질질.
소녀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바짓가랑이를 붙든 손아귀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 탓에 땅 위를 질질 끌려 다니는 굴욕을 당해야 했음에도 그랬다.
결국 먼저 항복을 표한 쪽은 사내였다.
그는 짜증스레 한숨을 푹 내쉬며, 시선을 다시 한 번 등 뒤로 던졌다.
이에 호응하듯 소녀도 고개를 치켜들었다. 고깔모자의 챙에 가려져 있던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그제야 드러났다.
밤의 장막 사이에서도 영롱한 빛을 발하는 동공.
심지가 굳은 시선이었다.
“너, 이안 맞지?”
“무슨 소리인지…….”
“내가 알던 이안 맞잖아. 나, 엘시 라이넬라야… 첫사랑을 몰라볼 줄 알아?”
발뺌하려는 시도는 즉시 좌절되었다.
강한 확신을 담은 소녀의 목소리에 사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 보면, 언제나 이랬다.
무슨 거짓말을 하려 해도, 제 마음을 꽁꽁 감추려고 해도.
소녀는 귀신같이 눈치를 채고 사내의 진심을 사정없이 캐묻고는 했다.
참으로 기구한 이야기가 아닌가.
오래 전의 기억이었다.
대수림은 불탔고, 소중한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다.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반복해 왔던 비극이었다.
오래도록 방치한 상처 위에는 딱지가 앉는다.
가슴에 난 상처도 마찬가지였다. 어느덧 흉터가 되어, 더는 통각조차 느껴지지 않은 지 오래.
그런데 이제 와서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다니.
사내는 다시 한 번 걸음을 내딛으려다가, 끝내 멈칫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만하지.”
냉담한 어조였다.
감정의 편린조차 드러나지 않는 음색, 메마른 말소리는 날카롭기까지 했다.
상처 입어야 마땅한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소녀의 눈빛이 꺾이는 일은 없었다.
“싫어.”
“아무리 그래도 내 마음은 안 달라져.”
언제나 깍듯이 공대를 하던 사내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의 차가운 평대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결코 긍정적이지는 않은 사유들이.
“이미 끝난 이야기야… 이제 와서 더 시간을 낭비해 봐야 무슨 소용이지?”
“사랑하니까.”
담백한 고백이었다.
하지만 그 짤막한 한 마디는, 사내가 고려하고 있던 무수한 숫자의 반박들을 일거에 지워 버렸다.
엘시의 시선은 여전히 우직하기만 했다.
“좋아하니까, 한 번 더 보고 싶으니까… 마지막으로 대화라도 나눠 보고 싶어.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먼 미래에.”
그나마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사내는 일순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었다.
“먼 미래에서, 모든 일이 끝나면… 그때.”
그것이 최후통첩이었다.
사내는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워낙 강경한 태도라서, 소녀가 땅에 질질 끌리고 흙투성이가 되어 신음을 흘리더라도 멈추지 않았다.
돌부리에 걸려 엘시의 몸이 덜컥이고 피부가 찢어지더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직도 소녀는 손아귀에 힘을 풀지 않았다. 도리어 애써 신음을 삼키며 외치기까지 할 정도였다.
“왜, 왜… 지금은 안 되는데?!”
“더 중요한 일들이 있으니까.”
그러지 않아도 만신창이인 몸뚱어리였다.
아무리 버티고 버텨도 한계는 존재했다. 엘시는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며 사내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지만, 덜덜 떨리는 팔이 끝을 알리고 있었다.
사내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나도, 나도 마찬가지야……!”
툭, 하고 마지막으로 사내의 바짓단을 붙들고 있던 소녀의 검지가 떨어져 나간 것은 그때였다.
팔을 뻗으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처량하기까지 한 몰골.
일평생 고위 귀족으로 살아왔던 여인이었다. 자부심과 오만함으로 똘똘 뭉쳐 살던 그녀가, 이처럼 필사적으로 군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이를 모르고 있을 사내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곧장 마지막 걸음을 내딛지는 못했다.
처음으로 괴로운 숨을 토해내며, 사내가 등을 돌렸다.
헤엑, 헤엑.
거친 숨을 토해내는 소녀의 눈동자가 몽롱해져 있었다. 의식을 잃기 직전이라는 뜻이었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붕괴하는 결계 사이에 이미 압사당할 뻔했던 육체였다. 마지막 힘을 짜내기는 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마지막’에 불과했다.
모든 기력을 소진한 뒤에는 혼절할 수밖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소녀를 내려다보는 사내의 눈빛 사이로 알 수 없는 감정의 잔향이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머뭇거리며 소녀를 향해 뻗어지는 손.
끝내 닿지는 못했다.
그러기도 전에, 움찔 몸을 떨며 사내가 손을 회수했던 탓이었다.
다만 꾹꾹 눌러 담은 고백만을 내뱉었을 뿐.
“난, 이미 사매가 알던 내가 아니야… 미안.”
이를 마지막으로 사내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마치 여인이 다시 붙들기라도 할까 두렵다는 듯.
허나 채 몇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소녀는 제 폐부를 짜내어 최후의 발악을 남겼다.
“……어쩌라고!”
비명, 차라리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소녀의 눈동자는 이미 흐리멍텅해져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직감적으로 깨달았으리라.
느닷없이 사내의 걸음걸이가 멈추었다는 사실을.
소녀는, 사내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네가 변해서, 뭐? 그럼 내가 얌전히 포기할 줄 알았어? 지랄하지 마… 네가 뭐라 하든 상관없어!”
덜덜 떨리던 목소리가 어느덧 중심을 잡고 정연해졌다.
빠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소녀의 의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나, 엘시 라이넬라야! 절대 포기 안 해… 절대 놓치지 않는다고! 두고 봐, 네가 그랬듯이… 나도, 결코 포기하지 않……!”
한계는 늘 원하지 않는 시점에 찾아온다.
소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몸뚱어리의 체력이 다한 탓인지, 여인은 꾸벅꾸벅 감겨 오는 눈꺼풀의 무게를 이겨 내지 못했다.
풀썩 땅 위로 엎어지는 육체.
그럼에도 사내는 한동안 떠날 길을 찾지 못하다가.
마침내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헛된 소리야 이미 몇 번이나 들어 온 참이었다.
이제 장난은 끝이었다.
애송이가 자꾸 육체를 되돌려 받기를 거부하고 있었지만, 그조차도 한계는 있었다. 결국 사내가 이 세계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첫 번째, 본래의 주인이 혼절할 것.
두 번째, 사내의 의식이 이곳에 남기를 원할 것.
지금으로서는 둘 중 어느 쪽도 만족하지 못한 마당이었다. 사내는 어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미 너무나 많은 싸움을 거쳐 왔으니까.
그래, 이대로 쓰러지는 편이 맞았다.
느닷없이 불청객이 쳐들어 오지만 않았다면.
칵, 하고.
사내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다만 귀신처럼 솟구친 검 하나가 제 정면을 가로막고 있을 따름이었다.
치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토막 난 불꽃들이 반구형을 이루며 내부로 스며들었다. 사내의 의아한 눈빛이 그제야 정면을 향했다.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더욱 기묘했다.
온몸이 외치고 있었다. 검이 눈앞에 있고, 검이 이 몸뚱어리를 노리고 있노라고.
하지만 장작 망막에 맺히는 그림자도 하나 없다니.
사내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윽고.
벼락이 세상을 양분한다.
횡으로 그어진 선이 시야의 끝과 끝을 잇고 있었다. 온 세상의 사물이 상단과 하단으로 갈라진 듯한 환각.
그 경계선에 금이 가고 있었다.
사내의 망막 위로 하나의 인형(人形)이 떠오른다.
“이제, 이제야 나타났구나… 꼬맹아!”
암청빛 머리카락, 푸른 눈동자.
이제야 갓 1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소녀였다.
그래서 사내로서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만나 본 이는 많았지만, 이러한 외형적 특징을 가진 인물은 한때의 주군밖에 없었다.
하물며 제 일격을 막아내다니.
사내는 헛웃음을 치며 소녀를 뿌리치려다가, 이내 놀라운 결과를 맞이해야 했다.
떨어지지 않는다.
검이 뱀처럼 휘어 감기며, 소녀는 여전히 사내의 앞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대수림의 독사보다도 강렬한 흥분의 냄새를 풍기며.
이윽고 사내는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무심한 황금빛 눈동자가 주위를 훑었다. 상하좌우를 가리지 않고 살피던 그의 입가에서, 끝내 불신을 담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온 세상이 검이다.
들숨과 날숨, 살갗을 스치는 바람, 시야를 어지럽히는 달빛과 별빛마저도.
결국 사내는 의혹으로 가득 찬 목소리를 내뱉는 수밖에 없었다.
“……설마, ‘검공’이십니까?”
“그럼 누구겠냐… 이놈아!”
이윽고 팍, 하고 온 세상의 공기가 칼날이 되어 사내를 덮치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모든 칼날이 팍, 하고 터져 나가며 그 사이로 사내의 신형이 드러났다.
무척이나 처참한 표정을 한 채로.
어느덧 사내의 정면에서는 사랑스러운 외모의 소녀가 서 있었고, 이를 보며 사내는 생각했다.
이쯤 되면 세상이 멸망하는 편이 옳지 않겠냐고.
한숨을 내쉬는 그의 목소리가 유독 애처로웠다.
**
무너지는 세계.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억지로라도 무의식의 공간에 남는다는 건, 사내의 기억 속을 표류한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뒤죽박죽으로 뒤얽힌 혼잣말이 귀를 긁는다.
그 와중에도 사내가 듣지 못했을 소리가 있었다.
증거는 없었다. 다만 그럴 듯하다는, 묘한 확신이 들었을 뿐.
어딘가 낯익은, 훌쩍이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나는 무심코 그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보았다.
감옥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울고 있는 고깔모자의 소녀를.
"……엘시 선배."
멍하니 뱉은 그 한 마디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푸른 눈동자가 나를 마주했다.
내가 보지 못한 얼굴을 하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