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58 - 7. 질투는 나의 힘(58)
밤의 장막이 드리운 공터는 조용했다.
단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흡혈귀의 결계에 의해 갇혀 있던 공간이었다. 풀벌레조차 침입하지 못한 공터는 말 그대로 텅 빈 채로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폭풍 전의 고요에 불과하다.
마주 선 두 남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히고 있었다. 자그마한 불꽃이라도 하나 튀기면 폭발할 듯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여러모로 대조를 이루는 짝이 아닐 수 없었다.
우선 사내는 건장한 남성이었다. 평균보다 우월한 신장과 탄탄한 근육이 돋보이는 몸매, 그리고 우울한 분위기가 묻어 나오는 금빛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반면 그 정면에 선 소녀는 젊다 못해 어려 보이는 외모였다. 왜소한 체구와 보드라운 피부, 그리고 가녀린 팔과 다리까지 어딜 보아도 무인에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내가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저 소녀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괴물의 진정한 무서움을.
평생 강자를 찾아 헤매던 검객이 제 입꼬리를 비틀어 말아 올렸다.
“다시 봐도 연원을 알 수 없는 놈이로다… 누구를 사사했지? 또 뿌리는 어느 유파에 두고 있고? 젊은 시절 온 대륙의 은거기인을 찾아 헤맸지만, 너 같은 괴물을 만들 방법 따위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
어느덧 소녀는 흥미진진하다는 낯빛을 하고 있었다.
패배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투였다. 사실, 그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어여쁜 소녀의 외양을 하고 있다지만, 그 알맹이마저 그렇지는 않았다. 소녀는 대륙에 단 셋밖에 없는 마스터 중 하나였으니까.
검공(劍公).
그 짤막한 호칭이 담고 있는 무게는 길이와 반비례했다. 무수한 전설과 혈투 끝에 거머쥔 최고의 자리였고, 그와 승패를 겨룰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성국의 성자.
남부 열왕국의 대마녀가 본체를 되찾지 않는 이상, 검공이 일평생의 숙적을 제외한 모두를 상대로 승리를 자신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처럼 소녀의 여유작작한 태도에도 사내는 한동한 마땅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단지 시선을 슬쩍 돌렸다가,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며 반문을 던졌을 따름이었다.
살짝 무너져 내린 표정에서 황당한 심정이 어김없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소녀 행세를 하는 검공에 대한 이야기는 저도 난생 처음 들어봅니다만.”
그야말로 정곡이었다.
사내의 메마른 지적에 소녀는 일순 컥, 하고 신음을 흘리며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쳤다. 여유롭던 낯빛이 달아오를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검공은 목청을 높여 바락바락 외쳤다.
“그, 그건 사정이… 그래, 전부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
“무슨 사정인지 궁금하긴 합니다만…….”
사내는 말끝을 흐리며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엘시는 이미 기절한 뒤였다. 대마녀는 내동댕이쳐진 이후로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고, 남은 것은 오직 검공 하나뿐.
곤란하다.
그럼에도 사내는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 이 육체의 주인이었을 인격은 무의식의 세계에 갇혀 있었고, 강제로 깨우기 위해서는 사내도 진탕 취해 기절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털을 잔뜩 곤두세운 맹수를 앞두고서야.
아무리 주당이라도 술이 들어갈 턱이 없었다.
한 톨의 기대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가 사내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비켜 주시겠습니까? 제가 조금 바빠서.”
“오호, 그러냐? 그렇다면 미안해지는데…….”
검공의 손에 들린 새하얀 검신이 사내를 겨누었다. 예상하던 대로의 전개에, 사내는 결국 몇 번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검을 고쳐 쥐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싱긋, 미소와 함께 내뱉어지는 선전포고.
“……나는, 시간이 아주 많거든!”
그것이 신호였다.
팍, 하고 두 검객의 앞발이 방향을 바꾸며 새로운 위치를 점했다. 짓밟힌 흙이 그 궤적을 남기기도 전이었다.
일섬(一閃).
섬광과 섬광이 교차한다.
풍경과 시간이 부정교합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조조차 없이 허공에 그어진 은빛의 실선은 나란했다. 일순 세상조차 이를 인지하지 못한 듯 침묵을 지킬 정도였다.
하지만 경지에 달한 검격은 하나의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법.
쾅, 하고 폭음과 함께 폭풍이 나부꼈다. 은빛의 직선을 따라 일어나는 지반과,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나무가 비명을 내지르며 마찰을 일으켰다.
차라리 태풍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감히 누가 이를 두고 단 한 번의 공방이 만들어 낸 참사라 할 수 있겠는가.
이마저도 시작에 불과했다.
잔상조차 남가지 않고 도약한 두 남녀가 어느덧 공중에서 검을 마주하고 있었다. 탁, 하고 사내가 검의 궤도를 틀자 소녀의 검이 딸려 나가며 비스듬한 십자가를 이루었다.
그리고 더욱 힘을 주자, 폭음과 함께 퉁겨 나가는 두 인형.
카가각!
엇갈린 칼날이 애꿎은 지반과 공간을 쪼개며 기나긴 꼬리를 남겼다. 갈라진 허공으로부터 별빛이 혈액처럼 배어 나오다 흩어졌다.
쿵, 쿵, 쿵!
잘려 나간 거목의 단말마가 침묵에 잠긴 숲 속에 울려 퍼졌다. 못해도 수십 그루의 나무 토막이 지축을 두드리는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전해져 오고 있었다.
그 찰나의 교차 끝, 소녀는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최고조에 달한 흥분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검로에, 흔들림 없는 자세…. 검 하나는 제대로 배웠구나. 스승이 누구지?”
“대륙 최고의 검객.”
“아하핫! 궁금한데? 나를 앞에 두고, 대륙 최고를 운운할 만한 칼잡이라… 하지만, 전투는 검도가 아니지……!”
후우, 하고 사내는 숨을 내쉬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차피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 아니었던가.
최초의 맞부딪힘은 단지 몸풀기에 불과했다.
순수한 검과 검을 겨루는 맛보기, 진정한 검의 세계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눈을 감을수록 감각은 더욱 예민해지고 시간의 흐름은 느려진다.
깊이, 더 깊이.
이토록 깊이 잠겨야만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래, 바로 지금처럼.
온다.
사고의 속도가 현상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느낀 찰나, 이미 온 세상이 토막 나 있었다.
그토록 둔중히 움직이던 시공간이 단숨에 수십 조각이 나 흩어졌다. 깨진 유리와 같은 시공의 단면들 사이로 비치는 장면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매서운 눈으로 사내를 노리는 소녀의 검.
상하좌우, 정면과 배후를 넘어 시간마저 격하는 일격이었다. 산산조각 난 거울 파편 위에 맺힌 상이 동시에 수백 줄기의 검격을 퍼부었다.
사내는 그때까지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숨을 죽인 채로, 검을 곧게 세웠을 뿐.
캉, 하고 튀긴 불꽃을 시작으로.
폭우처럼 빗발치는 칼날들이 모조리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불꽃놀이처럼 검격 하나하나에 대응하는 사내의 검은, 너무 재빨라서 오히려 정지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무려 수백 번의 참격이었다.
사내는 버틸 수 있더라도, 그가 딛고 선 지반은 그렇지 못했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쏟아진 일격이 수십을 돌파했을 때, 땅바닥이 형편없이 터져 나가며 사내의 몸이 살짝 기울었다.
그러자 단숨에 쏟아져 내리는 나머지 검격들.
쾅, 하는 폭음과 함께 사내의 몸이 완연히 무너져 내렸다. 그 상단에서는 소녀가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검을 내리긋고 있었다.
“아하하핫! 제법이었지만, 결국 이 정도……!”
바로 그때였다.
다시 한 번 시간이 정지한다.
마스터는 일종의 초인이라, 시공간의 구애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 따라서 이는 딱히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소녀의 안색이 굳은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흔들림 없는 사내의 디딤발.
도대체 어떻게?
지반은 이미 무너져 내린 뒤였다. 마땅히 그 위를 딛고 있는 사내의 발 또한 무너져 내려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사내의 발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허공이 단단한 땅이라도 되는 듯이.
문득 검공의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오래 전에, 이처럼 희한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는데…….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른거리는 옛 풍경이 망막에 맺히기도 전에, 사내의 몸짓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소녀는 깨달았다.
검이 아니다.
사내의 검극은 소녀를 향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뒷걸음질을 치는 척하며 빼놓았던 발을 디딤돌로, 낮아진 사내의 몸뚱어리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를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증기.
사내의 전신에 흐르던 땀방울이 연기가 되어 피어 오르고 있었다. 급격히 반전된 분위기 속에서 검의 존재감은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단련된 육체야말로 진정한 흉기가 아닌가.
이러한 감상이 불현듯 떠올랐을 찰나.
사내가 한 발자국을 내딛었고, 검을 든 손을 무게추 삼아 주먹이 멈춘 시공을 찢으며 날아들었다.
그래서 검공은 헛웃음을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광경을 본 적이 있냐고?
있다마다. 평생 잊히지 않을 기억이었다.
평생의 숙적을 만났던 날, 그는 검과 주먹 중에 무엇이 더 강하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저것이 그 대답이었다.
오직 인간의 몸으로, 지형지물을 뒤바꾸는 기적.
단 한 번의 주먹질로 산 하나를 날려버렸던 그날의 악몽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그 세 음절이 뇌 주름 사이사이에 똑똑히 남아 있었다.
‘붕산격(崩山擊)’.
“이런 씹…….”
그것이 마지막.
사내는 한 걸음을 내딛으며 허리를 비틀었고, 온힘을 다한 주먹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칼날을 헤치고 소녀의 복부를 강타했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소녀의 몸뚱어리가 직각으로 꺾이고.
귀가 먹먹한 폭음과 함께 흙과 나무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야말로 완력의 해일.
산 하나를 무너트릴 일격이, 소녀의 몸을 직격하고 있었다.
**
나는 울고 있는 소녀를 보자마자 헐레벌떡 내달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래야 한다는 의무감만이 내 사고회로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윽고 소녀의 앞에 당도한 내 무릎이 서서히 굽혀졌다.
내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담백했다.
"엘시 선배……?"
그리고 내 목소리를 들은 소녀는, 서서히 고개를 들며 훌쩍였다.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넌 뭐야?"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시건방진 어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