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59 - 7. 질투는 나의 힘(59)
꿈은 욕망을 비추는 왜곡된 거울이다.
어느 학자의 주장이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잠든 사이 억눌러 왔던 무의식의 영역을 얼핏 드러낸다. 그리고 그 상(像)은 깊숙한 곳에 잠든 욕망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소리였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반론을 직면하고 있는 이론이었다. 다만 그 해석은 다양한 분야에 널리 퍼져 있어서, 여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도 했다.
검술학부에 불과한 나조차도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
다만 의문이 하나 존재할 수는 있었다.
왜 느닷없이 내가 알 수 없는 이론을 떠올리고 있냐는 점이었다.
그 까닭은 단순했다.
꿈속에서 마주한 광경이 너무 의외였던 탓이었다.
자그마한 체구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새하얀 피부 위에 찍힌 푸른 눈동자가 무척이나 아름다운 소녀였다. 더불어 이제 소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커다란 고깔모자까지.
아무리 봐도 내가 아는 엘시 선배가 맞았다.
단 하나를 제외한다면.
“뭘 그리 눈만 휘둥그레 뜨고 있어? 넌 뭐냐니까… 앙?! 이 엘시 라이넬라의 말이 우스워?”
바로 말투였다.
나는 오랜만에 듣는 거친 어조에 멀거니 귀를 툭툭 두드렸다. 처음에는 미래에서 온 ‘엘시 선배’인가 싶었지만, 미래의 엘시 선배는 좀 더 점잖은 말투를 쓰곤 했다.
이처럼 날 것에 가까운 언어는 한 사람의 전유물에 가까웠다.
나를 알기 전의 엘시 선배.
설마 나조차도 모르고 있던 욕망의 정체가 이렇단 말인가.
사실 나는 험한 말을 쓰는 엘시 선배를 더 좋아하는지도.
이처럼 내가 혼란에 빠져 있는 도중에도, 엘시 선배는 으르릉거리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손에 전하의 파편들이 뭉치고 있었다.
다혈질인 점까지 판박이였다.
“어쭈, 아직도 대답을 안 해? 네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내 별명이 ‘라이넬라의 투견’……!”
“왜 이곳에서 울고 계십니까?”
결국 참지 못하고 내뱉은 물음이었다.
어차피 꿈이라면 무슨 짓을 해도 해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그래서 나는 깨어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많은 정보를 캐내 보기로 했다.
왜 내 꿈에 울고 있는 엘시 선배가 등장하는가.
실로 신경 쓰이는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내 태도에 도리어 당황한 쪽은 엘시 선배였다.
“……뭐?”
“왜 혼자서 울고 계시냐고요.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릴 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한 발자국.
내가 소녀와의 거리를 줄이자, 엘시 선배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 그걸 네가 알아서 뭐 어쩌려고… 그리고 왜 다가와?! 내 이름 못 들어봤어?!”
“엄청 많이 들어봤죠. 하여튼, 왜 울고 계셨냐니까요?”
엘시 선배는 내 강경한 자세에 점점 더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앙칼진 고양이처럼 굴더니, 이제는 겁 많은 소형견처럼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돌리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렇게 나와 엘시 선배 사이의 거리가 거의 사라져 갈 무렵이었다.
결국 소녀는 얼굴을 붉힌 채 빽, 하고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네, 네가 무슨 상관인데!”
“왜 상관이 없겠습니까? 저는…….”
당신의 약혼자인데.
그러한 말이 목젖까지 차올랐으나, 돌이켜 보니 이 설명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존재했다.
바로 엘시 선배가 나의 존재를 아예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느닷없이 약혼자를 자처해 봐야 정신병자 취급을 면하면 다행일 터였다. 또, 엘시 선배는 예전부터 고백한 남자를 모조리 차 버리기로 악명 높지 않았던가.
오해를 사서 내게 전격을 쏘아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일부러 다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들기로 했다.
이윽고 팍, 하고 뽑혀 나오는 손도끼.
소녀의 망막이 멍하니 그 섬뜩한 예기를 반사했다. 나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살짝 시선을 돌려야 했다.
“……알 필요가 있습니까? 제가 궁금하다는데.”
엘시 선배의 반응은 극적이었다.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외친 말에, 나는 살짝 상처를 받았다는 듯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엘시 선배는 내가 그러든 말든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내가 다시금 한 걸음을 내딛자, 소녀의 낯빛이 단숨에 창백해졌다.
“히끅! 왜, 왜 하필 나한테…. 다, 다가오지 마… 아니, 말아 주세요!”
“대답만 하면 얌전히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마도.”
마지막은 덧붙이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까.
엘시 선배는 이제 다리에 힘이 풀려 엉덩방아를 찧기까지 했다. 엉덩이를 질질 끌며 내게서 멀어지려고 애를 쓰는 엘시 선배의 모습이 그리운 기억을 되살렸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추억을 떠올리는 내 걸음걸이가 일순 머뭇거렸다. 내가 도끼의 뒷면으로 손바닥을 탁, 하고 내리치자 소녀는 더욱 겁을 먹고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기 시작했다.
눈물 젖은 웅얼거림이 내 귀를 적신 것은 그때였다.
“흐윽, 흑… 왜, 왜 하필 나냐고오…….”
나는 그대로 한 걸음을 더 내딛으려다가.
문득 낯익은 자문에 화들짝 놀라 시선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울먹이는 소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나 많이 들어 보았던 의문이 아니었던가.
왜 하필 나지?
“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야… 강한 척만 조금 하고 싶었어! 누구나 그럴 수는 있잖아… 흐윽, 그런데 왜 삼촌은… 왜 나는… 왜 나한테만… 흑, 흐윽…….”
그러면서 더욱 움츠러드는 소녀의 품속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칠흑의 막대.
쨍강, 하고 구슬픈 소리와 함께 품속을 빠져 나온 유품이 퍽 외로워 보였다.
나는 몇 번인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소녀는 아직도 울고 있었으니까.
“무, 무서워… 기대를 받아서 무서워, 실망시킬까 무서워… 나는, 나는 그렇게까지 대단하지는…….”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모든 인간은 내면에 나약한 면을 지니고 있었다. 살과 피로 이루어진 존재로서 당연했다. 하지만, 일정 수준에 이른 무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었다.
초인이라 불리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 내야만 하는 시련이었다.
스스로를 이겨 내는 것.
아마도 이 소녀는 ‘엘시 선배’의 연약한 일면이리라.
끝내 버리지는 못하고, 가슴 속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겁 많은 계집아이.
나는 문득 미래에서 온 엘시 선배의 증언을 떠올렸다.
다시 육체를 돌려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고.
그 원인이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내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자, 소녀의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내가 아니라도 되잖아… 그 괴물을 어떻게 이겨… 응? 이제 나는 그만 놔줘… 나보다 더 강하고, 어울리는 사람이……!”
“엘시 선배.”
무릎을 굽히며 내뱉은 한 마디였다.
그러자 거짓말 같이 엘시 선배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눈물을 함뿍 머금은 푸른 눈동자가 멀거니 나를 향했다.
나는 일부러 자세를 낮추어 그 시선을 정면에서 마주했다. 그리고 묵직한 질문을 꺼냈다.
“엘시 선배… 왜 세상 사람들이 선배만 가지고 그러는 줄 아십니까?”
난데없는 물음에 소녀의 동공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러나 망설이기도 잠시.
엘시 선배는 옅은 기대를 담아 내게 물었다.
“……왜, 왜애?”
나는 그 물기 어린 시선을 받아내며, 옅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답했다.
“약해빠졌으니까.”
뚝, 하고.
소녀의 숨소리가 멎었다. 일대에 울리던 유일한 소음이 사라지자 곧 숨 막힐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넋 나간 푸른 시선은 아직도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해를 하지 못했다는 눈빛.
그래서 나는 일부러 재차 강조했다.
“약해빠져서, 만만하니까.”
이윽고 엘시 선배의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
산을 무너트리는 일격.
그 무시무시한 이름처럼, 붕산격(崩山擊)의 여파는 직격당한 대상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 후폭풍으로 찢겨 나간 대지가 기나긴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검공은 저 멀리 날아간 뒤였다.
그만한 위력의 주먹을 공중에서 허용했다. 당연히 몇 번이고 땅을 구르고 머나먼 곳에 처박혀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사내의 표정은 여전히 밝지 못했다.
도리어 내지른 주먹을 회수하는 그 낯빛에 옅은 긴장마저 묻어 나오고 있을 정도였다. 사내의 금빛 동공이 오므린 주먹을 향했다.
과열된 근육은 땀을 증발시켜 은은한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다만, 사내가 주목한 지점은 그쪽이 아니었다.
손목에 난 자상.
핏물이 뚝뚝 배어나오는 그 상처를 바라보며, 사내는 말없이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다.
그래, 알고는 있었다.
고작 이 정도로 끝날 리가 없다는 사실을.
대륙 최강의 검객은 그 기대를 어김없이 만족시켜 주었다.
단지 찰나.
서걱, 하고 시야를 횡단하는 절단면이 나타날 때까지 필요한 시간이었다.
나무나 바위, 심지어 지형지물조차 그 일직선의 궤적 앞에서는 무용했다. 마치 풍경화 위에 어린아이가 펜으로 장난이라도 친 듯한 모양새였다.
저벅저벅.
저 멀리에서, 걸음을 옮기는 소리와 함께 나른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1,404번.”
그때부터였다.
숲이, 양옆으로 무너져 내린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풍경이 통째로 잘려 나가 양옆으로 비스듬히 쓰러지다니.
황제를 맞이하는 인파처럼 숲이 굉음을 일으키며 갈라지고 있었다. 그 광경은 얼핏 새로운 막을 알리는 무대의 커튼콜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흙먼지가 자욱이 일어난 그 틈새로부터, 불현듯 떠오르는 푸른 도깨비불이 한 쌍.
소녀였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그 눈동자가 소녀의 흥분을 드러내고 있었다. 침착을 가장하고 있긴 했지만,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숨결마저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녀의 뺨에는 몇 방울의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결코 소녀의 피는 아니리라.
엄지로 제 뺨에 묻은 핏자국을 문지르듯 닦으며, 괴물은 히죽 미소를 지었다.
“그만큼 베었는데, 고작 닿은 건 한 번뿐인가… 검공의 이름이 부끄럽구만.”
그러면서 소녀는 할짝, 하고 제 엄지에 묻은 피를 혀로 핥아냈다.
침묵을 지키던 사내의 입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어떻게 산 겁니까?”
“마지막에 공간을 베었지. 나와 네 사이가 멀어지도록… 그런데, 그 공간의 틈새마저 찢으며 주먹이 날아들더구나. 내참, 그 인간도 참 어지간히 주먹질에 미쳐 있다니깐…….”
그렇다면 당신은 또 어떤가.
찰나를 찰나로 쪼갠 시간 동안 1,000번이 넘는 검격을 가하고, 그러고도 여력이 남아 마지막에 공간을 찢어 버리던 그 모습은?
사내는 이러한 의문을 꾹꾹 눌러 담았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러니 그는 가장 필요한 질문만 건네기로 했다.
“더 해봐야겠습니까?”
“당연한 말을… 나를 이렇게 달아오르게 만들고, 혼자 도망칠 생각이었나? 소녀, 실망이오… 이름 모를 마스터 양반.”
소녀는 드물게도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결코 이대로 놓아줄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사내는 끝내 한숨 섞인 경고를 보내야 했다.
“……이제부턴 우리 둘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참으란 말이냐… 응? 너무 궁금하거든. 도대체 어떤 미치광이가 만든 괴물이라서, 마스터 둘의 비전을 모두 잇고 있는지.”
그러면서 검공은 서서히 자세를 고쳐 잡기 시작했다.
명백한 전의.
사내는 이리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참담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검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남은 한 손을 허리춤의 손도끼로 가져가면서.
그리고 정적.
태풍이 불기 전, 최후의 평화였다. 마스터 둘의 충돌은 비단 개인 대 개인의 결투로 끝나지 않는다.
지도를 바꿀 정도의 후폭풍이 동반되는 것이다.
‘우리 둘’로 끝나지 않는다던 사내의 말이 뜻하던 바이기도 했다.
기싸움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승리를 따낼 단 한 번의 공방뿐.
이윽고 들불처럼 마력이 치솟는다.
마치 마른 짚단에 불을 붙인 듯했다. 그야말로 삽시간에 일대를 장악한 오러가 제멋대로 세상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질풍이 불고, 땅이 덜덜 떨리는 와중에도 두 검객의 낯빛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리고 두 검객의 손에 힘이 들어가려던 찰나.
저벅, 하는 발소리가 정적 사이를 파고들었다. 당황한 두 시선이 그 진원지를 향하는 것은 순리였다.
그곳에는, 멍청한 낯을 하고 있는 여인 하나가.
“뭐, 야…….”
그렇게 허탈한 의문성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를 목도한 두 사람의 표정에는 처음으로 낭패감이 떠올랐다.
'대마녀'의 재등장이었다.